578화 꿀밤
잠깐 좀 보겠다는 말에 에더나 연구원 할 거 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긴 나 같아도 생판 모르는 사람이 내가 연구 중인 작업 좀 보자 하면 뭐 하는 놈인가 싶겠지.
그다지 이상할 반응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일을 몇 번 해 봤거든요.”
나도 무작정 찔러 보는 건 아니었다. 다양한 포션을 제작해 온 것도 있었고, 기타 다른 기운.
예로 들어 마기나 신성력, 혼돈을 가지고 중화하거나 부작용 없이 받아들이게 만들어 등반가나 NPC에게 적용한 경우도 있었다.
다른 거라면 몰라도 마나석 종류라면 가능성이 있다. 가장 처음 가지게 된 힘이 마력이었으니까.
형태만 다르지 마정석이나 마나석도 마력을 내뿜는 건 같았다. 문제가 되는 건 하나.
‘내 힘이 아닌 걸 그대로 몸에 꽂아 버리는 부분이지.’
이걸 감당하는 방법은 간단하다면 간단하다.
상대방이 마나석의 기운을 받아들일 만큼 튼튼하거나 보유하고 있는 마력이 높아야 한다.
아쉽게도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괴물 사냥꾼들은 해당사항이 없었지만.
애초에 스킬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니 체내에 있는 마력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몸은 급이 높을수록 튼튼하기는 하지만 다른 권능이나 스킬의 보호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순수하게 육체가 강인할 뿐. 어떻게 한다.
우선 장비 구조부터.
“장치 조절이면 필터를 쓰는 거겠네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거부 반응이 나타나는 거고요.”
“단순하게 요약하면 그렇긴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 트집 잡을 부분도 없는 말.
기어를 살폈다. 이식을 받고 있던 이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황이었기에 따로 기절시킬 필요는 없었다.
장비 제작을 맥스치로 찍은 나지만 겉모습만 봐서는 정확한 구조를 알 수는 없다. 보아하니 도면이나 설계도를 가지고 있는 거 같지도 않고, 있더라도 보여 주지 않을 거다. 난 외부인이니까.
그래도 상관없다.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내게는 권능이 있었고, 원한다면 도면보다 자세하게 정보를 뽑아올 수 있었으니까.
[기어Ⅱ- 왼팔(A)]
-맞춤 제작된 마도 공학 장비, 기어입니다!
-외부는 투박하게, 내부는 세심하게!
-압력 장치를 통해 구동됩니다.
-마력 회로과 싱크로율이 높을수록 컨트롤이 용이해집니다.
.
.
.
주르륵 떠오르는 정보.
괜히 SSS급 권능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바에 따라 정보를 간략하게 줄 때도 있고, 필요할 때는 상세히 말해 주니까.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에서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을 내주기도 하고.
“잘 만들었네요.”
한참 동안 정보를 살피던 난 기어를 내려놓았다.
프램버그처럼 세련되거나 고도의 기술이 들어간 건 아니지만 출력과 내구도는 흠잡을 데가 없다.
중심이 되는 장치는 가능한 단순한 구조로 만들어 충격에 강하게 만들었고 부품을 교체하기도 좋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었으니.
“마나석을 굳이 쓴 이유가 있을까요?”
“가장 구하기 쉬우니까요. 다른 좋은 대체제가 있더라도 공급이 부족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만큼 많이 사용한다는 거군요.”
기어에 박힌 마나석을 살폈다. 품질이 나쁘지 않다. 다만 좀 거칠다. 마력을 뽑아내는 방식도 가성비는 좋지만 부하가 걸리는 형식이고.
곁눈질로 기어에 박힌 로고를 살폈다.
“기어Ⅱ라, 시리즈가 더 있다는 뜻이겠네요.”
“총 다섯 등급까지 있긴 합니다.”
대충 가장 낮은 등급인 기어Ⅰ에서 시작해 기어Ⅳ까지 있고 그 위로는 기어 베가가 있다고 한다.
등급을 나눈 건 기능의 차이도 있기는 하지만.
‘기어의 성능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 따라 출력이 달라.’
오케이. 대략적인 구조는 파악했다. 상위 모델의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해결 방법은 대략 보인다.
“우선 마나석부터 치워야겠네요. 더 강하고 오래가며 조건만 지키면 안전한 거로.”
“…조건만 지키면 안전한 거요?”
“예. 제가 넣으려는 건 기본으로 자폭 기능이 들어갑니다.”
자폭이라는 말에 모두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무시했다.
들어 봤을지 모르겠다. 화조국과 릴카, 아래에 있는 호문쿨루스 제네타와 함께한 사업. 부활.
그 핵심이 되는 에너지원.
“아케인 젬을 넣을 겁니다.”
최상급으로 만들면 그 자체로 S등급에 달하는 아이템을 사용할 생각이다.
* * *
예상치 못하게 진행된 협동 연구.
처음에는 이럴 생각이 없었다. 베가 파티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던 거니까.
뭐, 대충 궁금증은 풀렸지만.
“오오오오오! 출력이 거의 2배입니다!”
“이건 혁신이야!”
“믿기지 않는군. 이런 게 가능하다니.”
베가 파티, 너희는 오늘부로 공돌이 집단이다.
워낙 폐쇄적인 구조를 띠고 있길래 뒤로 음흉한 짓을 벌이나 했더니만, 그저 뱀파이어를 싫어하는 공학도의 모임이었다.
건물 부지에 비해 사람도 많이 없고. 대부분 자동 설비로 이루어져 있었다. 건물 대부분이 공장. 그 외에는 안전을 위한 방범 장치.
왜 밖으로 안 나오나 궁금했는데.
‘얘넨 진짜 일반인이네.’
가지고 있는 파괴적인 지식과는 별개로 전투력이 형편없었다.
어디 이름 좀 날린 뱀파이어까지 갈 필요도 없다. 밖에 던져 두면 햇빛에 타죽는 뜨내기 뱀파이어만 들어와도 몰살이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눈에 보이는 1급만 6명. 저건 특급인가.’
그들을 보호하는 이들이 있었으니까.
벽에 등을 기댄 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여인을 바라봤다. 저 사람 NPC다.
[프렐다]
-92층의 NPC.
-특급 괴물 사냥꾼입니다!
-반트 성의 그림자, 자할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존재!
오른팔과 왼쪽 다리가 기어로 되어 있다. 길게 기른 붉은 머리카락에 가려 잘 안 보이지만 귀 한쪽도 그런 거 같은데.
권능을 통해 볼 수 있는 정보에 제한이 있는 걸 보니 내가 완전히 압도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마그마 요정급인가.’
대충 그 정도가 아닐까 싶다. 전투 스타일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사람이 지키고 있다면 뱀파이어들도 이곳을 노리기 힘들겠는데.
어째서 이곳과 직접 접선할 수 있는 대상이 1급 이상인가 했더니만 다 이유가 있었다.
거의 모든 인원이 기어를 착용하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뱀파이어와 싸우다가 신체 어딘가를 잃은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신뢰가 생기겠지.
그중에는 몸 군데군데가 기계장치로 되어 있는 이도 있었다. 저 정도면 이식받기 전에 죽었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인데 생명력이 질긴 모양이다.
“이블아이를 데리고 온 건 옳은 선택이었어요.”
“말했잖아요. 우리는 이해관계가 맞을 거라고.”
감동에 겨운 에더의 눈빛이 촉촉해진다.
이곳에 있는 NPC에게는 반트 성이 고향이나 마찬가지라고 했었지. 그 말이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
연구원들을 말할 것도 없고 뒤에 있던 괴물 사냥꾼들도 연구 성과에 눈을 떼지 못했다.
보호를 위해 온 것도 있지만 기어가 개량된다는 소식에 구경온 이들도 적지 않다. 전투력이 올라간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다음에는 놈을 만나면 제대로 복수해 줄 수 있겠군.”
“난 더 높은 녀석을 노릴 생각이다. 내 턱을 가져간 녀석은 이미 죽었거든.”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원한이 없는 자들이 없는데.
기묘한 공생 관계. 뱀파이어를 향한 적의로 모인 자들이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공동의 적은 사람을 뭉치게 만들지.’
틀린적 없는 말이다. 필요하다면 방금 칼을 맞댄 자와도 손을 잡는 게 사람이니까.
언제나 문제는 그다음이지. 무력을 지닌 자.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힘이 없는 자. 저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려나.
가만히 이후의 모습을 상상하다 이내 지워 버렸다. 거기까지는 내가 걱정할 필요 없는 영역이었다.
그나저나.
“시간이 너무 흘렀네.”
프로토타입 자체는 빠르게 만들었는데 이후 개량을 거치는데 시간이 많이 들었다.
단순히 에너지원만 바꾼거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에 따라 에너지를 추출하는 장치와 올라간 출력에 따른 기존 장비들의 개조가 필수적으로 따라붙어서.
그나마 장비 제작 스킬이 있어서 이만큼 줄였지 진짜 처음부터 시작했으면 년 단위로 고생하지 않았을까.
‘한 달 좀 안 됐군.’
3주 가량 된 거 같다. 그사이 보안을 위해 연구실에만 있었으니 바깥소식이 궁금하기는 하다.
“너희도 고생했다.”
“그에에.”
“으으. 이제 끝인 거예요?”
객관적으로 말하면 덕춘이는 한 게 없지만 미야는 꽤 도움이 됐다.
변이가 진행 중인 만큼 신체 능력만 따지면 어지간한 이들보다 튼튼해서 기어의 안전성 테스트를 실험해 줬다.
내가 직접 할 수도 있지만 패시브 스킬이 워낙 많아서 객관적인 판단이 안 됐다.
‘확실히 늘었어.’
예전이었다면 이 정도 기간이 지났으면 미야가 피에 갈증을 느꼈었을 텐데 실전을 겪으면서 통제력이 올랐다.
이제는 거의 한계지만. 마른침을 삼키는 횟수가 많아진 게 슬슬 동물의 피라도 마셔야 할 거 같다.
“내가 할 건 이걸로 끝이야. 이 이상은 알아서 연구해라.”
“이것만 해도 몇 년은 앞당긴 겁니다! 충분히 놀라운 성과예요.”
“이번 시리즈의 이름은 이블아이로 결정했습니다. 하하하하!”
자랑스럽게 기어를 들어 올리는 연구원.
개량된 덕분에 기어 모델에 변화가 생겼다. 전체적으로 성능이 향상되었고 최상위 모델이 하나 더 생겼으니.
[기어- 이블아이(SS)]
-새롭게 개량된 신제품!
-아케인 젬을 이용하여 출력도 최고!
-부담도 최고입니다!
-그래도 쓸 만하죠?
무려 SS급 장비가 탄생했다. 나 혼자 만들었다면 SS급 장비를 만드는 게 거의 불가능했을 거다.
베가 파티에서 대부분의 것들을 준비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거지. 그래도 뿌듯한 건 마찬가지.
그런 나를 격려하는 것인가.
[놀라운 업적! SS급 장비를 제작했습니다!]
[칭호, 공학자를 획득합니다!]
오랜만에 칭호를 획득할 수 있었다.
뭐든 칭호는 있으면 좋은 법. 효과를 봐 보니 뭔가를 만듦에 있어 보조치를 부여해 줬다.
‘어째 내 이름이 붙은 아이템이 하나 더 생겼네.’
칭호 메시지를 지운 난 묘한 느낌으로 물건을 살폈다.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닌데 내 이름이 붙은 것들은 죄다 SS급 이상. 대단하다면 대단한 일이었다.
종종 누군가의 이름이 붙은 아이템을 얻고 신기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블아이라고 붙어 있어서. 쁘띠공듀의 성검. 이런 아이템이 돌아다녔으면 거짓말 안 하고 탑 전체를 뒤져서라도 다 찾아 파괴했을 거다.
아무튼.
“저는 나가 보도록 하죠.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는데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거라.”
“오오, 그렇지. 바쁜 사람을 우리가 너무 붙잡고 있었어.”
“언제든 원할 때 오세요. 급과 상관없이 이블아이는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조치해 두겠습니다.”
“그럼. 어디 다치지 말고. 하하하! 다치더라도 기어가 있으니 염려치 말게.”
이미 내가 한 일들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다.
시간이 제법 지났으니 반트 성에서도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잡혔을 거다.
파벌 간의 균형이 어떻게 됐는지, 시체 조각가의 활동이나 치안 수준 등등 확인할 게 한가득이다.
베가 파티가 보유한 정보통을 통해 들어온 이야기도 있기는 한데 아무래도 난 직접 눈으로 봐야 믿어서.
한동안은 베가 파티도 바쁠 거다. 당장 기어는 만들어졌지만 당장 쓸 수 있는 건 프로토 타입을 비롯해 3개 정도가 전부다.
새롭게 장비를 장착한 이들도 적응할 기간이 필요하니 한동안은 몸을 사려야겠지.
강화가 마친 후에는 훨씬 강해지겠지만 그 과정 사이에는 취약할 테니까.
“나도 가겠어.”
“음?”
출구를 향해 가는 내게 프렐다가 다가왔다. 방금 제작을 마친 기어를 들고.
목소리 처음 들어 본다. 그동안 팔짱 끼고 구경만 했던 녀석이라.
기어를 가져가는 건 문제 되지 않는다. 애초에 그녀를 위해 만든 거다.
특급 괴물 사냥꾼은 베가 파티가 가진 최고 전력인 만큼 가장 먼저 장비를 받는 건 당연했는데.
“그거 적응 기간이 필요할 텐데요?”
저건 작정하고 출력에 몰빵한 거라 쉽게 다룰 물건은 아니었다.
“실전만큼 빠르게 익숙해지는 게 없지.”
그건 그렇지.
그런데.
“왜 반말?”
-빠악!
일단 그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