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577화 (577/740)

577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콰창!

92층 반트 성 외성에 위치한 고급 술집 옥상에 있던 여인이 들고 있던 와인병을 집어 던졌다.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혈향 짙은 살기에 벽에 줄지어 서 있던 뱀파이어들이 목을 움츠린다.

스트레스가 쌓여 식욕이 오른 것일까, 영업장에서 일하는 뱀파이어 한 명의 피를 모두 빨아 버린 쉬네파가 미간을 문질렀다.

“영업장 몇 곳이 당했다고 했죠?”

“오늘 새벽까지 6곳입니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나섰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 헤럴드.

쉬네파의 심복이자, 그녀의 피를 가장 짙게 받은 자였다. 동시에 지금은 없는 강대한 흡혈귀를 이은 적통이기도 했다.

그녀도 함부로 하기 힘든 존재였기에 분노해 있던 쉬네파의 목소리도 한층 누그러들었다.

“영악한 자입니다. 칼리버의 이름을 대면서 난동을 부리고 있으니까요.”

“진짜 칼리버가 움직였을 가능성은요?”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주기적으로 발작을 하는 자니까요. 과거에도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같은 뱀파이어지만 쉬네파보다 오랫동안 탑에 있던 것이 헤럴드였기에 쉬네파는 고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칼리버의 이름을 대고 활동하는 건 분명히 다른 세력이다. 그러나 그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어느 쪽이든 곤란한 상황. 과정이 어떻게 됐든 피해를 보는 건 그들이었으니까.

특히나 그녀의 파벌은 더더욱 상황이 나빴으니.

“자할이 움직이고 있다고 했죠.”

“우리 구역 근처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빈도가 늘어났습니다. 아직까지 직접적인 마찰은 없었지만 시간문제라고 판단됩니다.”

영업장 여러 곳이 털리면서 안정적이었던 힘의 균형이 기울고 있다.

쉬네파가 유흥가와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었다면 자할은 인력소를 비롯한 갱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반트 성의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경비대와 특임대가 돌아다녀 쉬네파의 영역을 노리는 차였다.

두 곳 모두 뱀파이어로 만든 반트 성 고위 인사들에게 피를 공급하고 있었기에 영업장에 타격을 입은 쉬네파의 입지가 낮아진 것도 사실.

당장은 버틸 만했지만 다른 영업장까지 무너지면 고객이었던 이들이 자할 쪽으로 붙을 건 분명했다.

“그리고 이건 아직 대외비입니다만 오늘 새벽 칼리버가 다시 습격을 했습니다. 시체는 수거반이 따로 챙겼지만 다음 번에도 가능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콰앙!

그의 말에 테이블을 내려친 쉬네파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피에 미쳐도 적당히 미쳤어야지! 때를 안 가리고 일을 벌여!”

쉬네파뿐만 아니라 자할에게 있어서도 칼리버라는 인물, 정확히는 그의 형은 최대 고객이었으나 이렇게 행동하면 말이 달라진다.

오랫동안 탑에 있으며 그가 발작하는 일은 주기적으로 있었으나 지금처럼 분위기가 나빴던 적은 없었다.

가장 몸을 사려야 마땅한 자의 만행에 쉬네파는 살의가 뒤끓었다.

“그자를 찾아요. 그리고 처리해요. 더 이상 날뛰는 꼴은 못 봅니다.”

“뒷수습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대로 가도 뒷수습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예요. 자할도 시간이 지나면 같은 처지겠죠. 그자에게도 요청해요.”

“전달은 해 보겠습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헤럴드는 자할이 요청을 무시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욕심이 많은 자였고, 똑같이 버티면 먼저 무너지는 곳은 쉬네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놈들의 작업장도 무사하지 못하다면 말이 다르겠지만.’

반트 성의 뒷골목에서 피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 * *

한가롭게 햇볕을 쬐는 것도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된다. 치열함 속의 여유라고나 할까.

“아쉽네. 낮에는 뭘 하기 애매해서.”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지 않아요?”

여관 창문에 걸터앉은 날 보며 미야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며칠 부지런히 움직인 결과 꽤 많은 작업장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당연히 반트 성에서 난리가 났지만 시민의 피해는 전무. 정확히는 일반인의 피해는 없었다. 죽은 건 뱀파이어였으니까.

물론 그 과정에서 베가 파티 소속 괴물 사냥꾼 중에도 희생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많지는 않았다.

물론 이건 아는 사람들만 아는 이야기였고.

-속보, 건물 2차 붕괴. 내부에 있던 13명 전원 사망.

-불안에 떠는 사람들. 노화된 건물 탓인가 혹은 테러인가.

-이번 일은 시체 조각가의 테러라는 신원 미상의 제보가 잇따라.

겉으로는 뱀파이어들 또한 일반인인 척 살아왔기에 수많은 인명 피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했던 흐름대로 가고 있다. 이 정도로 들쑤셨으면 반응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듣자 하니 뱀파이어 세력 간에도 충돌이 있었다는 거 같고. 내가 건든 적 없던 영업장도 파괴되었다나.

오드릭의 정보통으로 들은 거니까 확실할 거다. 이번 소란을 핑계로 놈들도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거겠지.

서로 치고받으면 나야 좋은 일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어때? 이제 좀 힘 조절이 익숙해지고 있어?”

“어떻게든요.”

난 미야의 성장에도 관심이 생겼다.

이틀 차부터였나. 미야도 데리고 영업장을 공격했다. 물론 오드릭 무리와는 별개로 단둘이만 움직였다.

느리지만 미야의 변이는 진행 중이었고, 완전히 떨쳐 낼 수 없다면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했다.

실력을 키우기에 실전만 한 게 없으니 데리고 다녔는데.

‘확실히 평범한 뱀파이어들이랑은 달라.’

어떤 놈이 문 건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놈은 아닌 게 분명했다.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거나 사이한 술법을 쓰는 건 아니었으나 육체 변화만으로도 어지간한 놈들은 죄다 쓸어버렸으니까.

처음에는 거부 반응이 있었지만 뱀파이어에 대한 원망도 컸기에 지금은 무력을 행사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내가 지금 인간 병기를 키우고 있는 건 아닌가 살짝 고민도 들었지만.

‘나쁠 건 없지.’

살아감에 있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무력은 중요하니까. 특히나 진짜 괴물이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나도 미야가 강해지면 현장에 데리고 다니기 수월해지니 이것도 좋다.

지금도 혹시 몰라 미야를 문 뱀파이어가 있느냐고 묻고 있기는 한데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크게 기대도 안 했다. 못해도 네임드 급이 물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으니. 이런 잔챙이 중에 범인이 있을 리 없겠지.

미야가 보이는 잠재력을 봤을 때 파벌의 우두머리급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

단순한 짐작은 아니다. 베가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는 특수성 때문이지.

-똑똑

“시간이 됐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노크와 함께 에더가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내가 하는 일에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좋았기에 베가 파티의 초대를 받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들어가려 했는데 몰래 잠입하는 것보다는 정식으로 초대받는 편이 낫지.

베가 파티.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른 괴물 사냥꾼들에게 장비를 공급하고 뱀파이어를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분명한데.

‘절대 대놓고 움직이지는 않는단 말이지.’

뱀파이어들도 베가 파티가 무기를 공급하는 건 알고 있을 텐데 별다른 공격이 없다.

어쩌면 공격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봤을 때도 보안이 철저한 곳이었으니까.

굳게 닫힌 공간은 일종의 성벽과도 같았으니 방어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한 효과를 보일 거 같았다.

저기, 에더와 같은 1급 이상의 괴물 사냥꾼도 있으니 건들기 껄끄럽긴 하겠지.

“가자.”

미야와 함께 에더를 따라갔다.

초대받은 건 우리뿐. 오드릭이나 다른 이들은 초대받지 않았다.

“이쪽으로.”

베가 파티 근처, 주변을 살피던 에더가 신호를 보내자 담벼락으로 보인 공간에 균열이 일어났고.

-드르르륵

-치이이익

톱니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증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벽이 좌우로 갈라지며 문이 생겼다.

정면에 있던 입구는 눈속임 용도였던 건가. 아니면 비밀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쪽을 통해야 하는 건가.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철저한 수준이 아니라 편집증 아닌가 싶을 정도.

반트 성 대부분 가스 등을 조명으로 사용하건만 이곳은 발광석을 박아 뒀다.

나야 어두워도 상관없지만 미야는 야간 시야가 없어서, 덕분에 편히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건 뭐랄까. 연구실 느낌이네.’

장식 하나 없는 벽면과 손바닥만 한 창문이 달린 문이 연달아 이어져 있다.

슬쩍 미야를 바라보니 낯선 표정을 짓는 게 미야도 초대받았을 때 이곳으로 오지는 않은 거 같았다.

-끄아아아아악!

순간 들려온 비명.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하자 에더가 어깨를 잡았지만 무시하고 그쪽으로 들어갔다.

문이 잠겼는지 바로 열리지 않았으나.

-콰드득!

문이 안 열릴 때는 힘이 부족한 게 원인일 때가 대부분인 법. 덜렁거리는 문고리를 바닥에 던지고 내부를 살폈다.

연구원으로 보이는 이가 4명. 수술대로 보이는 곳에 고정된 남자가 하나.

“누, 누구인가!”

“경비는 뭐 하고 있어!”

“멋대로 들어오면 안 되네. 적응자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줘서는 안 돼!”

갑작스러운 난입에 연구원 둘이 나를 막기 위해 다가온다.

혹시 불법적인 실험을 한다던가, 강제로 납치해 온 사람을 실험 쥐처럼 쓰는 건가. 이런 식으로 폐쇄적인 집단 중에는 정신 나간 놈들이 많아서 그런 생각이 먼저 든다.

만약 내가 생각한 게 맞다면 이곳도 손을 잡을 만한 곳은 아니라는 뜻.

“이식을 받고 있을 때는 최대한 스트레스를 적게 받아야 합니다.”

“이식?”

그런 내 앞을 에더가 막아섰다.

이식이라, 아.

“그거였군.”

난 비명을 지르던 사내의 왼쪽 어깨를 확인했다.

괴물 사냥꾼이 기어라고 부르는 마도공학 장치가 연결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는 마나석의 에너지와 그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지 시퍼렇게 올라오는 핏줄.

고통 때문인지 온몸을 비트는 것이 눈에 띄었지만 강제적인 뭔가로 보이지는 않았다. 기어를 이식하는 연구원들의 안전을 위해 몸을 구속한 것이지.

그 증거로 팔다리가 결속된 남자의 어디에도 고문이나 학대적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뱀파이어에게 당해 팔 하나를 일은 자입니다. 보통이라면 은퇴하겠지만 기어를 장착하면 이야기는 달라지죠. 물론 몸에는 부담이 많이 됩니다만.”

“본이이 원한 건가.”

“기어는 검증된 이 중에서도 신체 일부를 잃은 자가 본인 스스로 원할 때만 이식을 합니다. 안정성이 검증된 기어는 숫자가 많지 않거든요.”

그렇다면야 뭐. 내가 더 뭐라 할 건 없다.

결국 강해지기 위해서 스스로 선택한 거니까.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는 괴물 사냥꾼이 비규격적인 힘을 내려면 그만큼 위험 요소를 안고 가야만 한다.

어찌 보면 은퇴해야 할 사람을 어떻게든 다시 싸우게 만드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다르게 말하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뱀파이어와의 균형을 맞출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들은 팔다리가 잘려도 재생하지만 사람은 아니니까.

“저 사람도 1급인가요.”

“아마 기어가 이식되면 그렇게 될 겁니다. 기존 실력도 좋았던 사람이니까요.”

작게 턱을 쓸어내렸다.

“기어를 안전하게 장착되는 확률이 낮습니까?”

“통상적으로 64퍼센트로 보고 있습니다. 이마저도 데이터가 쌓여 올라간 수치죠.”

“원인은 암만 봐도 신체에 마나가 바로 들어간 것으로 보이고요.”

“장치를 통해서 조절을 하지만 이런 식으로 주입하는 건 부담이 많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나도 대충은 안다.

세상이 개판 나고 마나석이 발견됐을 때 인위적으로 헌터를 만들어 보겠다며 실험이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실험에 의한 헌터가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모두 실패했다는 거겠지.

중요한 건 마나석의 마나를 안전하게 체내로 받아들이는 것.

“잠깐 제가 좀 보죠.”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