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6화 움직여라 뱀파이어 놈들
오드릭의 아지트 입구에 있는 선객. 겉모습만 보면 그냥 좀 사는 사람으로 보였지만 옷깃에 고정된 배지는 베가 파티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외부 활동이 극단적으로 적은 곳이 베가 파티다. 내부와 연락을 넣기 위해서는 2급 괴물 사냥꾼 이상의 신분이 필요할 정도.
일을 마치고 오면서 들은 바에 따르면 괴물 사냥꾼의 등급은 꽤 세분화되어 있었다.
9급부터 시작해서 1급까지 오를 수 있는 것이 보편적이었고, 그 위에는 특급이 존재한다고 했다.
애초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부여하는 자격은 아니었지만 귀족들도 존중해 주니 어느 정도 공신력은 있다고 본다.
2급 정도만 돼도 어디 가서 일류 소리는 들을 정도의 전문가라나. 그 수도 그리 많지는 않다고 했다.
괴물 사냥꾼이라는 게 워낙 위험해 죽는 사람이 많기도 했고, 거기서 살아남아 더 위험한 괴물들을 죽인 자들만 높은 급으로 올라가는 구조였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사내는.
“오드릭, 오랜만입니다. 옆에 분은 처음 보는 얼굴이군요. 1급 괴물 사냥꾼 에더 필가튼이라고 합니다.”
“이블아입니다. 따로 급은 없죠.”
1급에 해당하는 실력자였다.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오드릭이 한가락 하는 전문가의 느낌이라면 이 녀석은 뭐랄까…….
‘강자.’
등반가나 NPC한테서 느껴지는 강자의 느낌과 비슷했다.
규격을 벗어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2급과는 채울 수 없는 간극이 느껴졌다.
아무리 한 분야의 전문가라도 어디까지나 사람의 영역 내에 있는 거니까.
상대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권능을 사용했다.
[에더 필카튼]
-92층의 NPC입니다!
-베가 파티 소속.
-1급 괴물 사냥꾼이죠!
오호라. 진짜 NPC였나.
어쩐지 날 보는 눈빛이 묘하다 했더니만. 이곳에 와서 처음 만나는 NPC다.
“크흠, 이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기별도 없이 이 시간에 말이야.”
“일이 저렇게 됐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이번에는 좀 과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아니, 저건 우리가 안 그랬는데?”
에더가 가리킨 쪽은 우리가 갔다 온 영업장.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이 났는지 시커먼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고, 불을 끄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의 고함에 소란이 일고 있었다.
오드릭 또한 불을 지르기 위해 기름통을 가져오기는 했으나 중간에 뺏겨서 그냥 빠져나왔었는데.
‘우리가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누가 불을 지른 건가.’
우연히 불이 났을 거 같지는 않다. 가스관이 따로 연결된 것도 아니었고, 그곳에 문제가 생겨서 불이 난 거라면 폭발음이 들렸어야 정상이니까.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가스등이나 기타 가열 도구가 쓰러져 불이 붙은 거라면 진작에 눈치를 챘겠지.
어떤 놈일까. 시기로 봤을 때 우리가 빠져나간 시간이랑 크게 차이 나지는 않은 거 같은데.
아마 영업장을 관리하는 뱀파이어 중 하나가 아닐까 싶긴 하다. 바퀴벌레로 변신하던 녀석도 막바지에 찾아왔었으니까.
놈이랑 비슷한 타이밍에 다른 놈이 와도 이상할 건 없었고, 불법 도박 시설에다가 사람의 피를 뽑아 돈을 빌려 주는 대부업까지 겸했으니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불을 지른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슬쩍 하늘을 바라봤다.
이미 해가 뜬 시점. 어정쩡한 놈들이 돌아다닐 시간은 아니니 어느 정도 실력에 자신 있는 놈이 왔겠군.
“일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좀 쉬고 싶은데 나중에 찾아오는 건 어떤가.”
“피곤한 거 알죠. 급한 게 아니었으면 이 시간이 찾아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준비할 시간은 필요할 테니 씻고 오시죠. 안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에더의 말에 눈을 찌푸린 오드릭이 가게 문을 열었다.
아지트의 위치가 밤에 활기를 띠는 블랙 마켓에 있기는 하지만 낮이라고 텅 비어 있는 건 아니다.
빈말로도 남들이 보기에 멀쩡한 꼴은 아닌지라 무작정 밖에서 버티기도 뭐했다.
오드릭을 비롯한 이들이 사라지고, 난 적당한 곳에 앉았다.
클린과 샤워 스킬이 있는 만큼 굳이 씻으러 가지 않아도 됐다.
오는 길에 바로 사용했을 수도 있지만 가능한 스킬을 사용하는 것은 직접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여기서는 마법적인 것들은 죄다 뱀파이어가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잖아.’
저번에 민가에서 날뛰던 뱀파이어를 잡았을 때도 비슷했다. 뱀파이어냐고 물어봤었지. 위대한 분의 어쩌구 하면서 개소리를 해 댔었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스킬이든 뭐든 사용할 거지만 굳이 대놓고 사용할 생각도 없다. 다만, 이 녀석 앞에서는 다르지.
[클린(S) Lv.MAX]
[샤워(S) Lv.MAX]
사용한 즉시 몸과 옷에 묻었던 것들이 떨어지며 쾌적한 상태로 변했다.
생활 스킬이기는 하지만 최대치까지 레벨을 올려놔서 효과가 상당하다.
“등반가는 오랜만이군요.”
상대방도 NPC인 걸 숨길 생각이 없는지 등반가라는 말을 피하지 않는다.
뭐가 됐든 NPC는 각자 역할이 있고, 그것은 등반가가 탑을 오르는 데 있어 영향을 주는 형식이니까.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한 가지. 상대가 내게 적대적인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에더는 적대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날 공격할 이유가 없기도 했거니와 90층대에 올라온 등반가는 NPC와 붙어도 꿀릴 게 없는 강자니까.
수작을 부릴 거였다면 보다 은밀하게 행동했을 거다.
개운한 몸을 스트레칭하며 에더를 바라봤다.
“이곳에도 다른 애들이 안 왔나 보네요? 이번에 꽤 들어왔거든요.”
“92층도 구역이 다양하니까요. 아직 91층에서 올라오지 못했을 수도 있고요.”
“92층은 몇 개인가요?”
평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90층대는 외부에서 안쪽으로 파고드는 구조. 99층이 있는 중앙으로 갈수록 둘러싸고 있는 층의 개수도 줄어든다.
층이 낮을수록 더 많아지는 건 당연했는데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군요. 모르기는 몰라도 12개는 넘을 겁니다.”
생각보다도 많은 숫자다. 92층이 이 정도면 91층은 더하겠지.
이 정도면 91층에서 마그마 요정을 만난 게 신기할 지경. 이런 흐름이라면…….
‘멤버들이나 다른 사람을 만나려면 94층까지는 올라야겠는데.’
그전에도 운이 좋다면 만날 수 있겠지만 말이지. 그동안은 혼자 움직일 것도 염두에 둬야겠다.
단독으로 활동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니 딱히 문제 될 건 없고.
“찾아온 이유가 있겠죠?”
“베가 파티에서 이블아이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미야라는 사람도요.”
“초대를 하겠다는 건가요.”
“안전성에 대한 검증만 마무리된다면요.”
“등반가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할까요?”
무려 90층대에 올라온 등반가. 이것만큼 등반 의지를 나타낼 수 있는 게 어디 있을까.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라도 협력해서 뱀파이어를 잡으려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였다.
“그걸로는 안 돼요.”
“베가 파티 구성원이 모두 중립 NPC라 그런 건가요?”
그거라면 이해가 된다. 중립 NPC는 사실상 층의 배경이 되는 세계의 주민과 같았으니까. 등반가가 뭔지도 모른다.
“그건 아닙니다. 중립 NPC도 있지만 저와 같은 이들도 많거든요. 다만 이블아이가 위로 올라가는 과정 중에 필요 이상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인 거지요.”
필요 이상의 피해라는 말에 살짝 뜨끔했지만 애써 당당함을 유지했다.
아직 여기서는 크게 사고친 적 없다. 다른 곳에서는 좀 했지만.
“다들 생각은 다르겠지만 저희에게는 이곳이 새 삶의 터전입니다. 멸망한 세계에 있던 때보다 이곳에 있던 기간이 더 기니까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멸망한 세상. 좋으나 싫으나 NPC에게 탑은 삶의 공간이다.
다들 안전지대로 가고 싶은 이유도 이 때문이고.
달리 말하면.
‘등반가의 등장이 그리 달갑지 않을 수도 있겠군.’
아무래도 위로 올라가다 보면 본의 아니게 전투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탑은 자비롭지 않다. 시스템은 악랄하고. 아무런 조건 없이 위로 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그에 걸맞은 시련과 과제를 준다.
올라갈 자격을 증명한 자만이 위로 향할 수 있는 구조.
“가능한 평화로운 기간이 오래 지속됐으면 좋겠습니다.”
“평화로운 게 최고죠. 저도 평화주의자입니다.”
“그에?”
덕춘이가 의문을 표했지만 사뿐히 무시해 줬다.
“전 이곳에서 난동을 부릴 생각이 없어요.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조건이 시체 조각가 칼리버를 잡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고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해당 층에서의 영향력을 증명해야 하니까요.”
에데의 설명이 이어졌다.
90층은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곳. 층의 규칙을 정하는 지배자가 존재하기도 한다. 91층에서 만난 혼돈의 파편처럼.
당시에는 91층을 지배하고 있던 녀석을 잡아냄으로써 위로 올라갈 자격을 얻었었다.
그렇다면 모든 층을 오르기 위해서는 그 층의 지배자를 잡아야만 할까?
‘그럴 리가 없지.’
단순히 그런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작정하고 달려들면 된다.
90층대의 테마는 혼돈. 혼란스럽고 상식을 비트는 규칙이 존재하는 곳이다.
당장 이곳도 칼리버에 의해 뒤숭숭한 분위기이고.
에더의 말에 따르면 위로 올라가는 방법은 간단했다. 지배자를 잡아 버리거나.
‘혼란스러움을 잠재우는 것.’
두 방법 모두 동떨어진 게 아니다.
혼돈의 파편이 했던 게임 또한 혼란을 가중시켰으니까. 결과적으로 개판이었던 상황을 해결한 것과 같았다.
살짝 걱정되는 건 91층에 있는 알리오스인데.
“지배자가 잘 관리하면 혼란이 없을 수도 있지 않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문제는 언제나 발생하니까요. 물론 어떻게 관리하냐에 따라 그 시기가 늦어질 수는 있겠죠.”
잠시 턱을 문지른 에더가 말을 이었다.
“시스템이 혼란을 부추기는 대상을 심을 겁니다. 어쩌면 혼돈의 파편이 생겨날 수도 있죠.”
얼굴을 찌푸렸다. 하여간 쉽게 가는 법이 없네.
지금은 알리오스를 믿자. 내가 아는 NPC 중 가장 강한 녀석이니까. 시간이 좀 지나면 연합 사람들도 올라올 테니 도움이 되겠지.
‘우선은 내가 할 일부터 집중해.’
당장 내 앞에 있는 것도 해결하지 못하면 답이 없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뭐 어떤가.
‘그때는 내가 찾아가면 돼.’
무한 코인이 있으니 정말 위급한 상황이 있으면 내려가면 그만이다.
미간을 문지르며 상황을 파악했다.
결국 내가 잡아야 하는 건 칼리버. 베가 파티는 조력자가 될 수 있으나 날 온전히 믿고 있지 않다.
거기에 3개의 파벌로 나뉘어 있는 뱀파이어 세력까지.
이거 꽤 괜찮은 그림이 나올지도 모르겠는데?
“베가 파티의 목적은 뱀파이어를 잡는 게 맞죠?”
“그렇죠. 놈들이 있는 이상 계속해서 일이 벌어질 테니까요.”
“그거면 됐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내게 베가 파티의 초대를 받을 수 있을 거 같다.
* * *
그런 말이 있다.
호랑이를 잡으려거든 호랑이 굴로 들어가고 꿀을 얻으려면 벌집을 쑤셔야 한다고.
그렇다면 뱀파이어인 게 분명한 시체 조각가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기는, 제 발로 나오게 해 줘야지.”
-콰아아아아아앙!
폭발하는 건물을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뱀파이어가 작업하는 영업장 중 하나. 오드릭의 정보력은 틀리지 않았는지 근 이틀 동안 4개의 작업장을 없애 버릴 수 있었다.
괴물 사냥꾼들이 쳐들어오는 거야 번번이 있던 일이니 처음에는 큰 반응이 없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개 같은 새끼들아!”
“너희가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으냐!”
연달아 영업장이 엉망이 되면서 목적이 분명한 공격이라고 받아들이게 됐으니까.
심지어 마구잡이로 턴 것도 아니다. 뱀파이어 파벌 중 한 곳인 쉬네파의 작업장만 집요하게 노렸지.
이유는 간단했다.
“균형을 깨 놔야 다른 놈들도 움직이지.”
지금은 팽팽하게 힘의 균형을 잡고 있다지만 한쪽이 타격을 받으면 말이 달라진다.
기회를 노리고 다른 놈들도 움직일 게 뻔하지 않은가.
여기까지가 1차 목표. 2차 목표는 이거다.
“오드릭, 부탁했던 건 잘됐나?”
“돈으로 안 될 게 있나. 후우. 이렇게 일을 키웠으니 더 키우는 수밖에. 그래야 다른 놈들도 끌어들이고 부담도 나누지.”
난 손에 쥔 신문을 확인했다.
-다시 나타난 시체 조각가. 더욱 거친 모습을 보이며 기물파손까지 서슴지 않아.
내가 털어 버린 영업장을 공격한 범인으로 칼리버를 내세웠다.
놈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꼬우면 직접 나서서 내가 한 게 아니라고 주장하던가.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대중이 그렇게 믿는다는 게 중요했지.
칼리버의 악명이 높아질수록 뱀파이어가 활동하는 영역은 줄어든다. 경비든 특임대든 더 들쑤시고 다닐 테니까.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너희도 움직이란 말이야, 뱀파이어 놈들아.”
굳이 나 혼자 놈을 찾을 필요 있나. 다른 놈들도 움직이게 만들면 되지.
활활 타오르는 건물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