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화 벌써 왔네
몸에 균열이 가는 듯하더니만 수없이 많은 바퀴벌레로 나뉘어 흩어지는 녀석.
오드릭이 바퀴벌레 친구라길래 은유적인 표현인가 했더니만.
“이건 진짜 벌레네.”
설마 말 그대로의 의미일 줄은 몰랐다.
비위가 약한 것도 아니고, 벌레를 무서워하는 것도 아니라서 크게 상관은 없다만.
‘징글징글하긴 하군.’
그냥 벌레가 돌아다녀도 그럴 텐데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한마음 한뜻으로 기어 다니니 더 그렇다.
콰직.
앞으로 지나가는 벌레를 밟았다.
터지는 감각이 묘하게 기분 더러운데.
다른 사람들은 어쩌나 보고 있자니 하는 건 비슷했다.
“밟아! 밟아!”
“뱀파이어 새끼면 박쥐로 변하든가 해야지 왜 바퀴벌레냐고!”
“벌레한테 물려서 뱀파이어 됐나 보지!”
“아하!”
“아하는 씨!”
총을 쏘아 대는 것도 잠시, 탭댄스를 추듯이 발을 놀리는 것이 우습긴 했으나.
-스르르륵
바퀴벌레가 떼를 지어 사람 하나를 뒤덮는 걸 보면 필사적으로 발을 움직여야 할 거 같기는 했다.
이것들이 평범한 벌레인 것도 아니고.
비명과 함께 바닥을 구르는 녀석의 위로 더 많은 바퀴벌레가 몰려들어 물어뜯는 것도 잠시. 엎어졌던 녀석의 떨림이 멎었고 식사를 마친 바퀴벌레가 떠난 자리에는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채 핏기가 사라진 시체만이 남았다.
흡혈까지는 하는 건가. 하기야 뱀파이어가 변한 거니 흡혈은 기본 옵션이겠지.
‘객체마다 고유 능력이 다른 건가.’
내가 상대했던 녀석은 안개로 변했었는데.
개인의 특징에 따라, 따르고 있는 뱀파이어 파벌에 따라 변화가 있든 하겠지.
이건 좀 눈여겨봐 둬야겠다. 변변찮은 놈들은 피 빨아먹는 거 외에는 별다른 능력이 없는 거 같지만, 일정 수준이 넘어가면 이런저런 능력이 생기는 거 같으니까.
종류는 다르지만 변신할 수 있다는 건 기억해 두자. 안개든 벌레든.
속으로 뱀파이어를 상대할 때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을 정리하는 동안 오드릭 무리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젠장, 벌써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기름 부어!”
“아직 많이 못 챙겼는데요?”
“잔말 말고 부으라면 부어!”
오드릭의 외침에 부하 한 명이 수통에 담아 왔던 기름을 뿌린다.
기름까지 챙겨 왔나. 저건 마지막에 사용하려고 했던 걸 거다. 지하실에 무턱대고 불을 지르는 건 미친 짓이니까.
털 거 다 털고 흔적도 지울 겸, 혹시 모를 뱀파이어도 태워버릴 겸 영업장을 떠날 때 사용하려 했겠지.
지금은 그런 거 따질 여유가 없는 상황인 거고.
벌써 오드릭의 부하 2명이 당했다. 나쁜 선택은 아니다만.
-텁
“불은 지르면 안 되지.”
상대방도 비슷한 생각이라는 게 문제.
벌레 사이에서 등장한 루쏘가 수통을 쥔 녀석의 손목을 붙잡더니 손을 휘둘렀다.
별다른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목이 달아나는 부하 한 명.
자연스럽게 기름이 담긴 수통을 빼앗은 그가 허리춤에 매단다.
바퀴벌레 사이에 숨어 있다가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라. 저건 좀 좋아 보이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면 바닥을 기어 다니던 벌레들도 사라지기는 형식인가.
싸우는 입장에서는 수많은 벌레 중 어떤 게 본체로 변신할지 알 수 없으니 꽤 유용하게 쓸 수 있겠다.
탐색은 이 정도면 된 거 같고.
“둘이 아는 사이 같던데 맞나?”
오드릭 옆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전에 본 적 있지. 쉬네파를 따르는 떨거지 중 하나. 그때는 여기가 아닌 다른 영업장에서 만났는데 벌레답게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군.”
“그때는 재밌는 게 많았잖아. 안 그런가, 오드릭?”
루쏘가 어깨를 으쓱이며 다가온다.
여유로운 모습.
일반인인 부하들은 이미 전멸이나 마찬가지. 그나마 멀쩡하게 서 있는 건 괴물 사냥꾼뿐이다.
슬쩍 확인해 보니 작업은 많이 못 쳤다. 금고 2개 정도? 따로 가져온 배낭에도 귀중품이나 돈을 넣기는 했는데 처음에 계획한 것에 비하면 반도 못 챙겼다. 손해는 손해대로 보고.
준비를 부족하게 한 거 같지는 않은데 저놈 하나 때문에 이렇게 됐다.
‘괴물 사냥꾼이 다 그렇지 뭐.’
때에 따라서는 일반인은 상상도 못 할 돈을 벌지만, 반대로 감당 불가능한 괴물을 마주치면 그날로 목숨 다하는 거니까.
지금은 조금 미묘하지만. 들었을 때 서로 한 방씩 먹여 준 전적이 있는 거 같아서.
좀 더 구경하고 싶기는 하다만.
“그쪽. 루쏘라고 했던가.”
“처음 보는 얼굴이군. 오드릭이 신입을 뽑았나? 보는 눈도 없군. 말단일수록 붙을 곳을 잘 찾아야 하는 법인데 말이야.”
“조언 고맙군.”
친절하기도 하지. 내 걱정도 다 해 주고.
“질문 하나 하지. 답을 잘하면 깔끔하게 보내 줄 거야.”
“깔끔?”
어. 깔끔.
놈이 고개를 갸웃하는 타이밍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바닥이 터지며 바람이 휘몰아쳤고 기겁한 녀석이 손을 내뻗기 무섭게 검이 반월을 그렸다.
허공으로 치솟는 팔뚝. 반 박자 느리게 피가 쏟아진다.
“크헉!”
망설임 없이 발로 놈의 가슴을 걷어찼다.
공처럼 날아간 녀석이 벽에 처박힌다.
“시체 조각가 칼리버. 놈에 대해 아는 게 있나? 내가 보기에는 그놈도 뱀파이언데 말이야.”
“어, 어디서 이런 괴물이!”
울컥 올라오는 피를 삼킨 녀석이 나를 노려본다.
괴물은 본인이면서 누구보고 괴물이라는 건지. 그 와중에 뱀파이어라고 피 삼키는 거 봐라. 종족값 확실히 하는 녀석이네.
내가 오드릭과 같이 움직인 이유.
뱀파이어와 괴물 사냥꾼의 관계나 파벌 등의 이곳 환경이 궁금한 것도 있지만, 다른 뱀파이어들을 만나기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놈들이 어떤 이해관계가 엮여 있고 싸우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내 목표는 반트 성의 소란을 잠재우고 다음 층으로 올라갈 실마리를 찾는 것뿐이니까.
지금 와서는 이런 생각도 가지고 있다.
‘이곳은 지배자가 있는 곳이야. 처음에는 베가 파티에 숨어 있는 게 아닐까 했는데 다를지도 모르겠어.’
이곳의 지배자는 사실 뱀파이어가 아닐까?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꼭 사람이 지배자일 필요는 없잖아.
92층의 특수한 환경.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이유를 찬찬히 생각할수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정말로 뱀파이어를 배척하고 싶었던 거라면 직접적으로 나서서 해결하는 방법도 있었을 테니까.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야.’
확신하는 건 아니다. 그저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그래서 묻는 거다. 반트 성에 영향력을 끼치는 뱀파이어 파벌은 3군데. 최근 떠들썩한 시체 조각가는 파벌에 엮여 있지 않은 새로운 세력이다.
사람들도 신경을 쓰고 있겠지만 뱀파이어 역시 칼리버에 대해 조사하고 있을 게 뻔했다.
팽팽한 파벌 경쟁을 뒤엎기 위해 영입을 하든, 위험으로 보고 처치를 하든 시체 조각가의 신변을 확보해야 다음 일도 진행될 테니까.
“시체 조각가 칼리버라. 오드릭의 부하가 아니라 현상금을 노리고 찾아온 자유기사였군.”
“놈에 대해 알고 있냐고 물었는데?”
검을 가볍게 돌리며 놈에게 다가갔다.
시답잖은 대화를 하려고 이러는 게 아니다. 슬슬 빠져나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작전 시간 자체가 짧기도 했거니와 밖으로 도망쳤던 영업장 손님들이 경비대든 뭔든 끌고 오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났으니까.
오드릭도 그걸 아는지 그나마 건진 것들을 챙겨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넌 그자를 잡지 못한다.”
오, 알고 있는 건가?
“네놈 따위가 설치기 전에 쉬네파 님이 잡을 테니까.”
“아, 그렇군.”
난 또 뭐라고.
결국 모른다는 거였네.
촤아아악.
검을 그었다. 목이 잘린 녀석이 옆으로 쓰러지고 난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서서히 떠오르는 여명. 조금 있으면 부지런한 사람들이 일어나 거리로 나오겠지.
저 멀리 발소리가 들리는 것이 경비대도 이쪽으로 오는 거 같고.
“수확이 많지는 않군.”
그래도 쉬네파라는 녀석이 칼리버를 쫓고 있다는 건 알아서 다행인가.
쉬네파라면 3개의 파벌 중 하나. 오늘 턴 곳도 그녀석의 영업장이었다.
내가 직접 찾아내기 힘들다면 쉬네파의 움직임을 쫓는 것도 방법이겠지. 오히려 이쪽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꽤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후우. 이번 출장은 꽝이야, 꽝. 루쏘 저 자식이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카악 퉤!”
뒷정리를 마친 오드릭이 부하들을 끌고 지하실에서 올라왔다.
말은 저렇게 해도 어깨에 올린 금고를 두드리며 웃고 있다. 처음부터 저걸 챙기려고 온 건 아닐까.
“고생 많았군.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일을 마쳤어.”
“그런 거치고는 사람이 꽤 죽지 않았나.”
“원래 거친 일을 하다 보면 사람 몇 죽어 나가는 건 일도 아니지. 그쪽이 죽인 녀석 그래도 이름이 알려진 놈이야. 우리끼리 붙었다면 몇 놈 못 살아남았겠지.”
괜찮다는 투로 녀석이 고개를 까딱인다.
반응을 보니 다른 놈들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 같고.
“기사 출신은 확실히 다르긴 하더군. 이거 배분을 더 나눠 줘야 할 거 같아.”
“거절하지는 않지.”
보안을 위해 여관이라는 여관은 죄다 계약해서 부산물을 팔고 얻은 돈을 거의 다 썼다.
어딜 가나 돈은 필요한 법. 더 준다는 걸 거부할 생각은 없다.
“내 크게 절반을 주지! 금고에 있는 건 우리가 챙길 거고 나머지는 전부 주겠어. 현금을 원하면 장물아비를 통해 돈 세탁도 해 주지. 실력 깔끔한 사람을 알거든.”
오호. 절반이나 주면 손해일 텐데. 게다가 돈세탁까지.
“크흠. 그 대신이라 말하기는 뭐하지만 다음에도 시간 맞으면 같이 일을 했으면 하는데.”
“좋지.”
“비율은 섭섭하지 않, 음?”
“같이 일 좀 해 보자고.”
바로 동의할 줄은 몰랐는지 오드릭이 눈을 꿈벅인다.
뭘 놀라고 그런가. 전투력은 잘 모르겠지만 오드릭은 쓸데가 많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조직도 있고, 뱀파이어의 작업장의 위치도 알고 있다. 따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루트가 있는 건지 뒷골목에 오래 있으면서 소문에 밝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는 게 있다.
인맥도 어느 정도 있는 거 같고,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베가 파티와 연락도 가능하다.
이래저래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데 도움을 많이 줄 수 있다는 이야기. 뭐, 본인이 그걸 원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억울할 거면 날 만난 본인 팔자를 탓해야지.
“어, 음.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하마.”
떨떠름한 표정으로 악수를 한 오드릭이 턱을 매만진다.
뭔가 당한 거 같은데 뭘 당했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
덩치랑 안 맞게 은근히 눈치가 좋단 말이야.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나.
아무튼. 작업을 치기 전에…….
“전에 약속했던 건 기억하겠지?”
“당연한 말을 하는군. 이쪽 바닥에서는 신뢰가 있어야 돼. 없는 놈들은 다들 뒤통수에 총 맞고 뒈졌거든.”
받을 건 받을 생각이다.
쉬네파의 영업장 하나를 같이 치는 것으로 받기로 한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베가 파티에 들어가는 것.
2급 괴물 사냥꾼부터 그쪽과 연락이 닿는다고 했었다.
“아지트로 돌아가자마자 관계자에게 연락을 넣을게. 늦어도 이틀 안에 반응이 올 거야. 이래 보여도 난 2급이니까.”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지 당당하게 말한다.
나야 좋지. 이틀이면 시간이 붕 뜨기는 하는데 그사이에 나도 다른 걸 하면 되니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오드릭의 아지트, 투샷으로 향했고.
“지금 왔군, 오드릭.”
그곳에는 선객이 이미 있었다.
정장을 입고 서류 가방을 들고 있는 남자. 정장에 박힌 익숙한 로고.
“베가 파티?”
그쪽에서 사람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