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572화 (572/740)

572화 오드릭

뭐야 저 녀석.

찰나의 순간이지만 분명히 보았다. 팬던트를 깨고 나온 푸른 파장이 지나가자 움찔거리는 녀석을.

물론 놀랐을 수도 있다. 갑자기 파란 뭔가가 나오면 놀랄 수도 있지, 있는데…….

‘저기서는 안 보일 텐데?’

어디까지나 장난감을 깨트린 내가 봤을 때는 그렇다. 파장은 나아갈수록 투명해졌고 1미터도 가지 못하고 약간의 흐름만 남았으니까.

보고 놀랐다는 건 말이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도 못 챈 상황이다.

수상하다. 저놈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

반쯤은 감이었으나 난 내 감을 믿었다.

인파 사이로 모습을 숨기는 녀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따라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자연스럽게.

겉보기에는 평범한 녀석. 기성복이지만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었고, 챙이 있는 모자를 쓴 채 뛰듯이 걷고 있었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실까.

이동 방향도 이상하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걷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방향을 틀어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대놓고 뛰고 있다. 미행이 붙은 걸 눈치챈 건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노골적으로 움직이는데.

저건 뭐랄까, 도망치는 거에 가까운 움직임이다.

-타앗

마음 같아서는 벽을 타고 돌아다니고 싶지만 지금은 낮. 보는 사람이 많았기에 가볍게 뛰며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대략적인 지리는 외워 뒀다. 골목길이 워낙 많아 모두 익히지는 않았지만 대로변 근처에 있는 골목은 파악해 두었으니.

“이쪽이겠군.”

이곳은 좌측 말고는 갈 길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크윽! 이런 빌어먹을 파티 놈들이 또 괴상한 걸! 오드릭에 대한 복수인 건가? 아니야, 놈들도 특정할 수 없었을 텐데?”

골목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녀석을 볼 수 있었다.

고통스러운지 벽을 손으로 긁고 있었는데, 워우.

-까드드드득

손톱이 아니라 벽이 긁혀 나가고 있었다. 선명하게 파인 흔적을 보니 평범한 사람은 아닌 거 같고. 손톱이 자라난 것이 꼭 뱀파이어 같구만그래.

목을 타고 올라오는 혈관이 굵게 팽창하고, 입 사이로 송곳니가 얼핏 보인다.

아마 내가 깨트린 물건 때문에 생긴 현상이 아닐까 싶다. 최대한 햇빛이 닿지 않는 곳에 박혀 있는 걸 봤을 때 잠깐이지만 태양빛에 대한 저항력도 떨어진 거 같고.

그 증거로 얼굴을 가렸던 손등에 화상 자국이 남았다.

제법 극적인 변화라고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진정한 녀석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그래도 볼 건 다 봤다.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즈

[이둔 플랑]

-92층의 뱀파이어.

-반트 성의 세력 중 하나인 쉬네파를 따르는 자 중 하나.

-쉬네파의 피 일부가 흐르고 있습니다.

권능을 통해 확인했을 때도 뱀파이어라고 떠올라 있다. 쉬네파라는 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뱀파이어인 건 분명해 보이고.

세력 중 하나라고 했으니 다른 놈들도 있다는 거겠지.

이거 완전 뱀파이어 소굴이었잖아?

“이봐요, 괜찮아요?”

모습을 드러내며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녀석이 순간 몸을 경직시키며 경계했지만 그것도 잠시.

“아, 예. 하하. 잠시 길을 잘못 들었군요. 길이 워낙 복잡해서.”

“잠깐 쓰러졌던 거 같은데 몸이 안 좋은가 싶어서요.”

“현기증이 좀 있습니다. 지금은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그렇구나.”

“호의 감사드립니다.”

신사적으로 웃은 녀석이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고 내 옆을 지나친다.

“쉬네파는 잘 지내죠?”

우뚝.

녀석이 멈춰선다. 찰나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정적.

-쉬이이이익!

녀석의 손이 내게로 향했고, 고개를 뒤로 빼 피해 냈다.

확실히 빠르다. 저번 밤에 잡은 녀석이랑은 비교가 안 되는데. 지금까지 만난 뱀파이어 중에는 가장 실력이 좋아 보였다.

연달아 손을 내지르는 걸 손등으로 쳐 내고, 깊숙이 녀석이 파고드는 타이밍에 놈의 팔을 붙잡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콰아앙!

원심력으로 이용해 무게 중심을 바꾸며 놈의 머리통을 벽에 꽂아 넣었으니 뇌진탕이라도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사르르르르

놈의 몸이 시커먼 안개로 변하며 손아귀를 벗어났다.

이거 내가 가지고 있는 안개 질주랑 비슷한데? 혹시나 싶어 붙잡아 봤지만 안개가 잡힐 리가 없었다.

적당한 거리를 벌리며 형체화한 녀석이 나를 노려본다.

“쉬네파 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인간.”

“쉬네파! 쉬네파! 쉬네파! 쉬네에에에에에──팡!”

“이노오오오옴!”

화가 잔뜩 났는지 놈의 목에 핏대가 선다.

얼굴이 붉어진 것이 고혈압으로 쓰러져 주지는 않을까 살짝 기대된다.

아쉽게도 그러지는 않았지만. 혈관이 튼튼한 편인가.

“협약에 따라 지금은 널 보내 주마. 다음은 없다는 것을 명심해라.”

“누가 보내 준대?”

“낮에 소란을 일으킬 수 없는 건 너희도 마찬가지. 규율을 어긴 놈은 파티에서도 쫓겨…….”

-서걱

검강으로 길게 이어진 검날이 놈의 가슴을 그었다.

목을 노린 것이었는데 놈도 어중이떠중이는 아니었는지 말을 하는 중간에도 몸을 뒤로 당기는 데 성공했다.

“너희가 말하는 파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난 외부에서 온 괴물 사냥꾼이다. 너희가 말하는 규율이니 뭐니 하는 건 알 바가 아니라는 뜻이지.”

“그런가. 기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보니 외부인이 맞군. 검을 쓰는 걸 보니 제대로 된 기사 출신인가. 흐음. 이거 변수가 나타났어.”

가슴이 갈라진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미간을 찌푸린 녀석이 훌쩍 뒤로 몸을 던진다.

“다음에 보지.”

-사아아아아아

그것을 끝으로 놈이 안개가 되어 모습을 감추었다.

쫓아갈까도 싶었지만 그냥 가게 두었다. 나도 안개화를 사용하기에 잘 안다. 틈만 있으면 어디로든 갈 수 있어서 사실상 쫓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나야 스킬로 사용하는 거지만 저놈은 종족값으로 사용하는 거 같고. 이제 보니 안개 질주가 뱀파이어 종족 스킬이었구나.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다지 신기하진 않았다. 출처가 어디면 어떤가. 그냥 쓰면 되는 거지.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저런 녀석들이 몇이나 있는지 모르겠군.”

뱀파이어라고 모두 허접한 놈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반트 성 내부에 있는 뱀파이어들의 파벌이 갈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파티라는 곳과의 규율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어쩐지 낮에는 별다른 사고가 안 생긴더라니 이런 게 있었나.

그건 그거고.

“파티라, 여기부터 만나 봐야겠어.”

내가 반트 성에 온 이유는 두 가지.

92층 클리어를 위해 반트 성의 문젯거리를 없애는 것과 미야를 문 뱀파이어를 찾아내는 것.

두 가지 목표가 같을 가능성이 높았다. 같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접점은 있겠지.

그건 그건데.

‘아직까지도 92층의 지배자를 못 만났군.’

정작 이곳에 있을 지배자를 만나지 못했다.

어디에 꽁꽁 숨어 있는 걸까. 사람들 사는 모습을 보니 직접 나서서 따로 뭔가를 하는 거 같지는 않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인지 드러낼 수 없는 것인지. 어차피 있다 보면 만나게 될 거다.

손을 털었다. 소란이 있었기 때문인지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파티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서는 찾았다. 골목에 박혀 있던 녀석이 떠드는 걸 들었으니까.

오드릭. 놈은 분명 오드릭이라는 이름을 내뱉었다.

문맥상으로 봤을 때 뱀파이어와 싸우고 있는 파티의 일원일 게 분명했다.

조금은 더 있다 찾아갈 줄 알았는데.

“뒷골목 놈들에게 부탁할 게 벌써 생겼네.”

놈들도 좋아라할 거다. 가만히 있으면 뭐 하나. 뭐라도 생산적인 일을 해야 사람이 발전이 있지.

후드를 뒤집어 쓰고 골목 밖으로 나갔다.

* * *

번화가와는 거리가 있는 지역.

주거지역과 미묘하게 떨어진 채 요즘 시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밤 늦도록 영업을 하는 곳이 모인 장소.

“블랙 마켓이라, 이름 한번 직관적이네.”

반트 성에 있는 사람들은 이 거리를 블랙 마켓이라고 불렀다.

야시장이랑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단순히 시장이라기에는 주점과 홍등가, 암상인, 장물아비와 불법적인 뭔가를 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지만.

경비대는 없다. 그저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력으로 밤거리를 관리하고 있지.

뒷골목 녀석에게 물었을 때 제대로 된 규모를 가지고 있는 조직들은 다들 이곳에 영업장을 차리고 있다고.

“냄새만 맡아도 범죄의 냄새가 올라오는군.”

“이런 곳이 있는지는 처음 알았어요.”

내 옆에 딱 붙은 미야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야를 데리고 가기에는 영 껄끄러운 곳이라 여관에 두려고 했는데 최근에 계속 나 혼자 돌아다니다 보니 같이 가겠다고 강하게 어필해 왔다.

처음에는 무시하려 했지만.

‘뭐, 여기에 미야를 문 녀석이나 관련된 놈들이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

위험하다고 방에만 놔둘 거였으면 여기까지 함께 오지도 않았다. 어찌됐든 본인을 문 대상을 직접 본 건 미야뿐이었으니까.

내가 보기에도 여기에는 뱀파이어가 있을 법했다.

시체 조각가 칼리버가 나타나고 나서 번화가도 밤에는 문을 닫지만 이곳만큼은 활발하게 영업을 하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평소보다 더 활기를 띤다고 한다. 밤에 나오는 사람들이 죄다 이곳에 몰려서.

“저리 꺼져!”

“이런, 개자식이!”

그만큼 취객과 건달들이 득실거리며 주먹질을 해 댔지만 말이지.

고만고만한 애들끼리 싸우는 게 제일 재밌는지라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 구경하고 있다. 누가 이길지 베팅을 하는 건 물론이고, 아예 각 영업장에 있던 가드들도 하나둘 나와 사람들을 통제하며 오락거리로 쓰고 있다.

여기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뜻이겠지.

“가자.”

“앗! 네.”

분위기에 휩쓸려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미야를 끌고 나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쏠렸을 때 목적지로 향할 생각. 뒷골목 녀석을 닦달한 결과 오드릭이라는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정확히는 그가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는 펍이었지만.

“투 샷.”

샷건과 맥주가 그려진 간판. 오드릭과 그의 패거리가 있다는 것 같은데.

딸랑.

문을 열자 종소리와 함께 그곳에 앉아 있던 이들이 나를 뒤돌아본다.

환기를 잘 안 시켰는지 땀냄새와 곰팡내가 올라오는 곳. 몸에 비해 작아 보이는 민소매를 입은, 살크업 대머리가 눈썹을 올린다.

“여긴 어린 애들이 올 곳이 아니다. 나가.”

내가 동안이기는 하지.

쓸 만한 눈썰미에 고개를 끄덕이며 카운터에 있는 의자를 빼 앉았다.

“오드릭을 만나러 왔다.”

-드드드드득

-드르륵

오드릭이라는 말 한 마디에 주변에 앉아 있던 이들 모두가 일어섰다.

각자 도끼나 망치 같은 쇳덩이를 쥐거나 따로 숨겨 놨던 총을 꺼내 날 노려본다.

다들 눈빛이 살벌한 것이 사람 몇은 죽여 본 거 같은데. 아니면 비슷한 뭔가를 잡았든.

미야가 내 옷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느긋하게 감상하듯 놈들을 둘러봤다. 그 수가 14명. 따로 눈여겨볼 만한 놈은 없는 거 같고 전원 사람이다. 뱀파이어가 아니라.

몇 가지 집중할 만한 건.

‘파티 소속이 몇 있네.’

전원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파티에 속한 이들이 5명이다.

제대로 찾아왔다.

“그를 공격한 이가 누군지 알려 주러 왔으니 총 내려 두지. 그게 싫으며.”

-철컥

“같이 쏴 볼까?”

로브 안에서 총을 꺼내 장전했다.

일전에 탑을 오르는 초기에 쓰라고 개량했었던 소총류가 있었다.

스킬이고 뭐고 없는 초반에는 냉병기보다 총기류가 훨씬 효과가 좋아서 제작 도면과 함께 제작법을 쁘띠 연합에 올렸었는데 지금도 물량이 좀 남아 있어 하나 가져왔다.

사실 총보다는 스킬이 더 강하기는 한데 여기서는 아무래도 이런 걸 보여 주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고조되는 분위기. 나를 향하고 있는 새까만 총구를 보는 찰나.

“다들 총 내려. 그쪽도 마찬가지고.”

주방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꽤 심하게 당한 듯 온몸에 붕대를 감고 팔과 다리에 부목을 댄 인물.

오드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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