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1화 들썩
연락이 왔다.
저번에 밤에 찾아가 적당히 손맛을 보여 줬던 뒷골목 녀석이 원하던 정보를 모았다고 서신을 보내왔다.
‘벌써 주거지를 옮길 때가 됐군.’
그래도 며칠은 더 버티려나 했는데. 뒷골목의 흔하디흔한 조직까지 내가 있는 곳을 알 정도면 다른 이들도 알고 있다고 봐야 했다.
녀석들이 나고 자란 곳이 이곳이니 더 빠삭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인맥보다는 돈과 힘, 권력이 정보를 캐내는 데 더 효과적인 법이니 비단 그렇지만도 않을 거다.
뭐, 반트 성이 커 봤자 성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타지에 간다고 정착하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이곳도 최근 사고가 터져서 그렇지 꽤 발전된 곳이다.
그러니 더 떠날 필요가 없지. 한곳에 오래 머문 사람이 많다는 건 사람들이 제법 고여 있다는 말. 어딜 가나 금방 방을 찾아낼 터.
“그럴 줄 알고 방을 여러 개 잡아 놨지.”
시간이 날 때 짬짬이 다른 여관에 들러 방을 잡아 버렸다. 장기로도 잡고 단기로도 잡고.
위치, 시설 수준 등등 마구잡이로 고른 만큼 패턴은 딱히 없을 거다.
앞으로는 이곳들 중 한 곳으로 랜덤해서 묵을 예정.
그건 그거고.
“오늘이 날인가. 한 번에 몰려오네.”
마침 갈매기한테서도 서류를 배달받았다. 좋네. 한 번에 다 훑어보면 되겠다.
반트 성에 들어온 지도 4일가량. 혹시나 다른 뱀파이어는 나오지 않을까 싶어 어슬렁거려 봤지만 별다른 일은 없었다.
“나가자.”
“이거 좀만 더 보면 안 돼요?”
“가방에 챙겼다가 나중에 봐.”
“가방이라면?”
“어. 숙소를 바꿀 거야. 그곳에서 실컷 봐. 오늘 밖으로 나오지 말고.”
“좋아요!”
반트 성에서 나오는 잡지더미를 챙긴 미야가 가방을 챙긴다. 들어왔을 때처럼 짐은 별로 없었다.
사람 산다는 게 조금만 머물러도 짐이 늘기 마련인데 이 녀석도 어지간히 욕심이 없었다. 이걸 소박하다고 말해야 하나 아니면 아직 쓸 줄을 모른다고 해야 하나.
하기야 나도 여가 생활이나 그런 쪽으로는 잘 모르니까.
밖으로 나와 괜히 빙빙 돌며 지낼 곳을 찾았다. 혹시 모를 미행을 피하기 위함이었고, 미야를 보고 접근하는 이가 있을지 슬쩍 떠본 거기도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별다른 낌새는 보이지 않았고.
-끼이이이
상가에서 구한 후드를 뒤집어쓰고, 상가 귀퉁이에 자리 잡은 여관에 들어갔다.
다른 곳과 달리 1층에서 책방을 하는지라 옆에 붙은 계단만 이용하면 됐다. 장점이자 단점.
계산만 하면 1층에 있는 사람들과 마주칠 걱정 없이 숙소에 들어갈 수 있지만, 반대로 우릴 노리는 사람도 그럴 수 있다.
뭐, 이쪽도 나름 신경을 쓸 거지만.
“덕춘이는 오늘 여기.”
“그에에?”
느닷없이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덕춘이에게 특별 과자 세트를 줬다.
“둘이 책 보면서 과자 먹고 있어.”
“와! 예뻐요! 진짜 먹어도 돼요?”
“먹을 수 있으면.”
“예? 어어엇!”
역시나 다양한 색감의 포장지와 장인 정신이 느껴지는 데코 따위는 무시한 채 과자를 집어먹는 덕춘이.
미야도 손을 뻗는다.
-찰싹
“아야야.”
“에이, 그래도 쳐 내는 건 좀. 더 있으니까 나눠 먹으라고.”
암만 그래도 그렇지 바로 손을 쳐 내네. 그럴줄 알고 하나 더 준비하긴 했지만.
과자는 입맛에 맞는 거 같으니 이쪽은 덕춘이한테 맡기고 난 뒷골목으로 가야겠다.
* * *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골목 풍경.
여전히 껄렁거리는 놈들의 뒤통수를 때리고 시원하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쾅!
“나 왔다.”
“…문을 굳이 찰 필요가 있나.”
“녹슬었나 봐. 잘 안 열리더라.”
경첩 하나만 겨우 붙어 기울어 가는 문을 편히 눕혀 줬다.
그냥 열까도 했는데 이놈들은 위생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지 손잡이에 정체 모를 오물이 묻어 있어서 만지기 싫었다.
번화가에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깨끗하게 다니려는 거 같던데 얘들은 영.
“비켜.”
“앞에 자리도 놔뒀는데 왜 여길…….”
“여기가 편해.”
먼저 앉아 있던 두목을 빼내고 상석에 앉았다.
음, 역시 이쪽이 좋다. 등 뒤에는 벽, 눈앞에는 문이 있어서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하기 아주 좋다.
어지간한 몬스터나 적이라면 벽 정도는 우습게 뚫고 오겠지만 그거야 뭐 그때의 일이고.
테이블 위에는 놈이 준비한 거으로 보이는 자료가 있었는데 양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시체 조각가 칼리버에 대한 정보가 그만큼 없다는 뜻인가. 나를 불러냈으니 허탕만 쳤을 거 같지는 않고.
“최근 놈이 모습을 나타낸 건 보름 전이다. 반으로 접힌 채 발견됐지. 42세 남성. 취객이었다는군.”
“흐음. 진짜 시체 조각가 맞아?”
맞은편에 앉은 녀석의 설명을 들으며 페이지를 들췄다.
반으로 접는 행위야 칼리버의 것과 비슷하다만 놈은 신체 일부를 가져간다. 그에 반해 이놈은 멀쩡하고.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는 상자 안에 구겨져 들어간 시체가 보였다.
“종종 이런 경우가 있긴 하지. 그라고 항상 잘라 가는 건 아니야.”
전에도 비슷한 말을 했던 거 같다.
나도 그래서 놈이 노리는 사람의 공통점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 희생자들에 대한 정보를 확인한 거고.
성별, 나이는 공통점이 없었다. 그중에는 평민도 있었고 빈민가 출신도 있었으니.
뭔가 놈이 노리는 것이 명확했다면 함정을 팠을 수도 있는데 기준을 모르겠다.
반면에 단순히 죽인 대상의 특징은 명확했으니.
‘흉하거나 더러운자.’
흉터가 크거나 악취가 나고 오물을 묻히고 다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병든 사람도 대상이다.
이거까지야 녀석이 준비한 기본 자료고.
“분명 너희만 알고 있는 정보가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성격도 급하지. 바로 뒤에 있다. 이야기하게 만드느라 고생 좀 했지.”
입꼬리를 올리는 것이 괜히 한 대 쳐 주고 싶었지만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칼리버에 대한 괴담은 무성했으나 실제로 본 사람은 없었고, 그렇기에 이름도 가명, 얼굴이나 몸을 본 사람도 없다.
몽타주라도 있었으면 그나마 수사망이 좁혀졌을 텐데.
“생존자가 있었다니.”
“아무도 몰랐을 거야. 나도 우연찮게 알게 된 거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놈이 뭐라 떠들어 댔지만 신경 껐다.
그런 것까지는 큰 관심 없다. 설마 했던 생존자가 있다는 게 중요하지.
서류를 봤을 때 공격을 받았는데 살아남은 게 아니다. 현장을 본 목격자가 살아남은 거지.
심지어 증언에 의하면 눈이 마주쳤는데도 죽이지 않고 보냈다고 되어 있었다. 다만…….
“노인네 혀까지 뭉개 놨더군. 말을 못 해. 지금까지 해 왔던 걸 생각하면 자비 넘치는 행동이긴 하지만 말이야.”
“흐음. 일단 그림 실력은 있으나 마나할 정도군.”
목격자는 천민이었고 말은 할 줄 알지만 글은 모르는 까막눈이다. 그림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림으로 뭔가를 표현하기도 힘들었으며, 무엇보다 칼리버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나름 정보까지 추려 왔다.
말도 못 하고 글도 못 쓴다지만 몸으로 어떻게든 표현해 냈고, 뭔가를 가리키는 등의 비언어적 표현으로 설명을 했다 하니까.
키워드는 5개.
“큰 키. 손장갑. 마스크. 안경. 아니, 선글라슨가. 어쨌든. 망토를 둘렀는데 안에 가방을 메고 있는 거 같다라.”
묘한 조합들이다. 키가 큰 거야 그렇다치고 나머지는 소품적인 요소가 커서 원한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다.
마스크나 고글 같은 건 벗으면 그만이니까. 망토도 그렇고 차라리 안에 메고 있다는 가방 안에 뭐가 있는지가 더 궁금하다.
자른 시체 넣어 가려고 그러는 건가.
이것만 보면 영양가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2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다른 생존자가 더 있을 수 있다는 것.’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봤음에도 죽이지 않는 대상이 있다. 그 기준이 뭔지는 알 수 없다.
두 번째.
놈은 본인의 외형을 감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눈여겨봐야 한다.
아직까지 시체 조각가를 보고 살아남은 인물은 한 명 뿐이었고 그 외에는 다 죽었으니까.
위장하면 좋겠지만 글쎄. 다 죽이면 그걸로 암살 아닌가.
더군다나 저 모습은 위장이나 변장보다는 그냥 가리는 용도가 강하다. 누가봐도 수상쩍어 보이는 모양새니까.
얼굴이나 몸에 콤플랙스가 있나? 아니면 다른 이유?
아무튼 유독 몸을 뭔가를 둘러싼 녀석이 있으면 눈여겨봐야겠다.
이어 난 릴카와 프램버그, 화조국 등등에 보낸 편지의 답장을 확인했고.
“흐음.”
작게 숨을 내뱉었다.
톡톡. 책상을 몇 번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직 두목도 개운한 표정으로 일어선다.
“이제 볼일이 끝났나 보군. 앞으로는 마주칠 일 없으면 좋겠군.”
“아냐, 나중에 또 올 거야. 그보다 혹시 파티라는 곳을 아나?”
“파티? 베가 파티?”
“거기 말, 음. 그래. 혹시 기어라는 게 뭔지는 들어 봤고?”
“이상한 소리만 골라서 하지 마라.”
“모른다는 거군. 알았다. 수고해.”
-쾅!
“야!”
바닥에 눕혀 놨던 문을 다시 벽에 박아 넣고 밖으로 나왔다.
녀석이 소리를 지른 거 같았지만 착각인 듯하니 무시하자.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조금씩 해가 저물고 있다.
이쪽 세계는 하루가 좀 짧은 편인가. 뭐 좀 하고 보면 밤이다.
그냥 내가 바쁘게 돌아다녀서인 것도 같지만.
“미야가 좋아하겠군.”
뱀파이어 진행을 막는 방법. 정확히는 사람 피를 안 빨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화조국에서 제공한 정보였는데 아직 변이 중일 때만 가능한 일이었으니.
‘본인을 문 뱀파이어의 피를 마셔라라.’
역으로 자신을 변이 시킨 존재의 피를 빨아 흡수하라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방법은 적혀 있지 않다. 그저 그렇게 하면 피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만 나와 있을 뿐.
이들도 오래된 기록에서 찾아낸 것이라서 어떤 원리인지, 정확한 결과가 나오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릴카가 훈련용으로 좋다며 ‘사랑의 매(SSS)’ 같은 물건을 추천한 것보다는 낫다.
다음은 프램버그에서 온 내용.
베가 파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탑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곳이기는 하나 워낙 폐쇄적이고 대부분의 거래를 화조국을 통해서 하는 만큼 아무래도 다른 층에 뭐가 있는지는 잘 모를 수밖에.
그래 한 가지 알아낸 것이 있었으니.
‘별 표시가 없는 물건은 진짜 정교하게 만들어진 장난감이야.’
과하리만치 정교하고 고급 기술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장난감 외의 용도는 따로 없어 보였으나, 별 표시가 달린 물건들은 달랐다.
“초소형? 무언가의 원리?”
어떤 물건을 만들기 위한 프로토 타입. 초소형화 시켰으니 프로토 타입이라고 말하긴 뭐하지.
아무튼 비슷한 장치를 만드는 원리 중 일부가 들어가 있으며,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현실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재현하는 것이 가능한 장치라고 했다.
말 그대로 장치. 외형은 장난감이지만 실 기능과 원리는 마도공학 장치에 가깝다고 했다.
아는 사람은 알아볼 것이고, 장난감 같은 형태를 띠고 있어 기술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몇 번 만지작거리면 어떤 기능이 달린 건지 알 수 있을 거라고.
그냥 만든 게 아니라 이거지? 마치 이런 게 있다며 알 만한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거 같네. 남들 시선도 피하면서.
베가 파티 역시 수상하다.
“잠깐, 나도 하나 있잖아.”
목걸이처럼 줄에 대충 걸어 둔 게 있다.
투명한 관에 푸른 액체가 담겨 있는 것. 대충 물시계 비슷한 것이었는데.
이건 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일단 상단에 있는 톱니 먼저 돌려보고 뒤집어도 보고. 그래도 반응이 없어 손에 쥐고 세차게 흔들었는데.
“아.”
-콰직
-파아아아앗!
힘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 버린 유리관에서 푸른빛이 퍼져 나왔다.
살짝 손이 벌어질 정도의 반발력. 그리 위험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뭘까. 묘하게 청량한 느낌과 묵직한 흐름은…….
고개를 갸웃하고 있던 때.
-움찔!
퍼져 나가는 푸른 기운에 유독 몸을 들썩거리는 녀석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