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화 늦은 자들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사건·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바로 날 줄은 몰랐는걸.
어쩌면 당연한 건가.
“시체 조각가 때문에 치안 병력 대부분이 중앙에 몰렸어. 외곽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지.”
일 터트리기 가장 좋은 시기 아닌가.
주변 눈들을 속일 정도로 공들이면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어떤 놈이 난동을 부리는 걸까.
너무 궁금하네.
-콰앙!
발을 박찼다. 땅이 터져 나가며 날아가듯 돌진했으니 안에 있던 이가 대응할 틈도 없이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따로 보호막이나 다른 조치가 있었다면 밑 작업이 좀 필요했을 수도 있겠지만 사일러스와 환상 안개는 그런 종류는 아니라서.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를 반긴 건 피 냄새와 불타는 건물. 그 안에서 벌어지는 학살.
척 보기에도 맛탱이가 간 것으로 보이는 뱀파이어가 중년의 목을 움켜잡고 비틀고 있었다. 즐기듯이 천천히.
아직까지는 사람 목이 돌아갈 수 있는 범위 내지만 조금만 더 틀면 최소 전신 마비다.
“헤이!”
“파, 파티?”
“어, 파티다. 네가 처맞는 파티.”
-서걱
우선은 인질 확보.
헛소리를 하는 녀석의 팔뚝을 잘라냈다.
뭔가를 해 보기도 전에 깔끔하게 떨어져 나간 팔뚝을 버리고 놈이 뒤로 훌쩍 뛰어오른다.
그대로 쫓아갈까도 했지만.
“이것부터.”
잘렸음에도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는 손아귀를 친절히 떼 내어 줬다.
“쿨럭! 커헉!”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지 기침 섞인 숨을 토해 낸다.
생존자는 이 사람 한 명뿐인가.
아내로 보이는 사람은 이미 죽었고, 옆에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이들의 시체도 3구 더 있다.
대가족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렵고. 애초에 서로 가족인지도 애매해서. 모임이 있었든, 아니면 살 곳이 애매해서 다 같이 사는 거든 육안으로 확인되는 희생자만 4명이다.
저쪽 무너진 벽 사이로 보이는 팔다리를 보아하니 사상자는 더 있을 거고.
사람이 모여 있어서 이곳을 노린 건가?
“다른 사람은?”
“아들이 있네. 제발 구해 주게!”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내 다리를 붙잡은 중년이 소리를 질렀다.
이런 눈치 없는 사람을 봤나. 있으면 있다고 조용히 말할 것이지 왜 다 들리게 떠들고 이러는지.
슬쩍 발을 밀어 중년을 떼어 냈다. 절대 귀찮거나 걸리적거려서 그러는 건 아니고, 뱀파이어가 버젓이 앞에 있는 상황에서 근처에 뒀다가는 다칠 수가 있다.
“그에에.”
“아, 왜. 맞잖아.”
덕춘이가 불신 가득한 눈빛을 보냈지만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적으로 보이는 건 저 녀석 한 명이고, 아들이라는 애는 잘 숨은 건지 도망친 건지 안 보이는군.’
최악의 경우 불에 타 무너진 잔해에 깔려 있을 수도 있다.
나름 구색은 갖춘 집이기는 했지만 낡고 부실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이야,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양심이 없네. 철근까지는 아니더라도 벽돌은 채워 놓지. 이마저도 아끼려고 사이에 흙도 안 채워 놓은 곳이 있다.
멀쩡한 집이었으면 암만 불이 났다 하더라도 벌써 무너지기 시작하지는 않았겠지.
‘덕춘아, 애 좀 찾아봐라.’
속으로 속삭였고. 작게 답한 덕춘이가 등을 타고 빠져나갔다.
회복 특성도 있으니 어지간한 부상은 바로 낫겠지.
구조는 덕춘이에게 맡기도록 하고, 난 저놈이나 제대로 잡고 있어야지. 가능한 얌전히 붙잡을 생각이다.
아이의 위치가 특정되지 않은 만큼 괜히 날뛰다 다치면 안 되니까.
그런 나를 보며 녀석이 상체를 구부리며 킥킥거린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금방 왔군. 항상 한 발 느리더니 말이야.”
“방금 날아간 손은 벌써 까먹었나. 한 발 느리긴 뭐가 느려. 피만 빨다 보니 정신 못 차리지?”
“크흐흐흐! 어이가 없군! 시간 끌기나 하고 말이야.”
어떻게 알았지?
눈치가 빠른 놈인가, 아니면 저기 눈치 없는 양반이 떠든 걸 들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다음부터 인질이 좀 얼빵하다 싶으면 기절부터 시켜야지. 괜히 일 꼬이게 하고 있어.
속으로 앞으로의 행동 플랜을 다잡고 있을 때 녀석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뿌드드득
-촤악!
잘리며 흩어졌던 피 일부가 놈에게 흡수되었고, 잘려나간 팔이 재생됐다.
호오.
“우연찮게 팔을 잘랐다고 우쭐할 수 없다는 건 네놈들이 가장 잘 알겠지. 큭큭! 허세 부려 봤자 불안에 떠는 것이 느껴진다.”
새삼 흔한 능력에 뿌듯해해서 좀 더 감탄해 줬다.
하긴. 재생이 상위 몬스터한테나 흔하지 헌터 중에는 그리 흔한 특성은 아니니까.
나도 덕춘이랑 포션이 있어서 그렇지 재생 능력은 따로 없다. 그나마 비슷한 거라고는 구사일생 정도?
송곳니와 충혈된 눈. 입가에 가득한 핏자국. 손톱도 그렇고 전형적인 뱀파이어가 맞다.
말은 하기는 하다만 그건 종족 특성이 가능성이 높고.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너무 쉽게 팔을 내주기도 했고.
게다가.
‘흘린 피를 모두 흡수하지도 못했잖아.’
뱀파이어는 피를 통해 온갖 짓을 벌일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도 어디까지나 미디어상의 설정에 불과했던 건가.
모르겠다. 아직 마주친 놈이 적어서.
뭐.
“확인해 보지, 뭐.”
가벼운 발걸음으로 놈에게 걸어갔다.
산책이라도 하는 듯한 걸음걸이로. 장난감 가지고 놀 듯 검을 빙빙 돌리며 앞으로 나아갔고.
-츠팟
놈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순간,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힘을 좀 뺀 대신에 속도를 높인 쾌검. 물리적인 거리가 있었으나 내게는 상관없었으니.
[검강]
-주르르륵
놈의 턱에 길게 혈선이 생기더니 피와 함께 아래턱이 잘려 나갔다.
아깝군. 목을 날리려고 했는데 놈도 나름 감각이 있는지 중간에 뒤로 몸을 뺐다. 완전히 피하지는 못해서 저 꼴이지만.
턱을 부여잡은 녀석의 눈이 커다래진다.
주춤주춤 물러서는 것이 날 꼬드기는 게 아니라 진짜 놀란 모양인데.
한 손으로는 턱을, 다른 한 손은 내게 뻗으며 뭐라 말하려는 거 같았지만 당연하게도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자신감에 비해 별 볼 일 없는 녀석인 모양. 이 정도면 난리를 피우지 않더라도 해결할 수 있겠다.
-타아아앗!
자신이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녀석이 뒤도 안 돌아보고 도주한다.
짐승과도 같이 팔과 다리를 함께 써서 달려나가는 것이 제법 빠르긴 했으나.
“멀리 가면 안 돼. 쫓아가기 귀찮아.”
적당한 나무 파편 하나를 쪼개 놈에게 던졌다.
푸욱! 그대로 놈의 종아리를 관통해 땅에 박힌다. 표본실에 박힌 곤충처럼 고정된 녀석이 손을 휘둘러 자신의 다리를 잘라냈다.
머지않아 다리가 재생되었으나 피가 부족한 건지 힘이 빠진 건지 온전한 형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골목으로 향한다. 삶에 대한 강한 집착.
본인도 저럴 거면서 왜 남의 목숨을 뺏고 난리인지. 진짜 피가 필요한 거면 공손히 대가리 박고 ‘헌혈 부탁드립니다’라고 해야지. 그것도 아니면 돈 주고 사 먹던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피라도 팔 사람은 많을 텐데. 미야처럼 동물의 피를 마시는 것도 방법이다.
“뭐, 이제 와서는 부질없지만.”
사람을 죽인 시점에서 아웃. 개과천선은 없다.
담벼락을 넘었다.
쿠웅. 바닥을 기고 있던 녀석 앞으로 착지했다.
나름 도망친다고 애쓴 거 같은데 안됐군.
“네, 네놈. 동류구나! 기어가 없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파티에 붙은 배신자냐! 아니면 위대한 분 중 한…….”
-퍼석
뭐라 떠드는 녀석의 머리통을 밟아 터트렸다.
재생 능력까지는 나름 볼 만했는데 내구도는 형편없다. 정말 뱀파이어가 이 정도 수준이라면 긴장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만.
“위대한 분이라.”
말하는 꼴로 봤을 때 이놈보다 높은 녀석들이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데리고 가서 좀 더 심문하고 싶었지만 저쪽이 더 급해서.
지금도 건물을 실시간으로 타오르고 있다. 아이도 찾아야 하고 시체도 수습해야 한다. 생존자도 치료가 필요할 거고.
이만 돌아가 봐야겠군.
그나저나.
“파티. 기어. 그게 뭘 뜻하는 건지 모르겠군.”
뭔가를 의미하는 것이기는 할 텐데 단어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다.
뱀파이어 사이에서만 쓰이는 은어일 가능성도 있고.
아니, 그보다 나보고 배신자라고 말한 건 또 뭐야. 내가 모기로 보이나.
-구르르릉
건물 일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스킬을 사용한 대상이 죽었기에 더 이상 소리와 빛도 차단되지 않는 상황.
이제야 소란을 눈치챈 가정집의 불이 하나둘 켜지고 있다.
괜히 엮여 봐야 나만 손해. 사람들이 나오기 전에 구조 활동을 끝내려 몸을 던졌다.
* * *
“늦었군.”
“그래도 피해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옆에 선 사내의 말에 담배를 물고 있던 이가 얼굴을 구겼다.
“피해가 얼마 없다? 저기 죽은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게 말해 봐라! 하룻밤 사이에 5명이 죽었어!”
호통 소리에 놀란 사내, 도리안이 어깨를 움츠렸다.
눈앞에 있는 사내와 위아래 관계는 아니지만 상대는 훨씬 짬이 많은 파티원이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싸우면 지는 건 자신이었고. 아무리 그가 뱀파이어를 잡는 괴물 사냥꾼이라 하지만 상대방은 그런 놈들을 상대로 10년이 넘게 살아남은 베테랑이었다.
“아니, 그래도 보통은 전멸이잖습니까. 생존자가 있는 게 기적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야. 그래서 더 꺼림칙하군.”
사고를 확인한 경비대가 나와 불을 진압하고 있었다.
생존자들은 고작해야 둘. 결코 많은 수는 아니었으나 지금까지 놈들이 나타났던 곳에서 생존자는 없었다.
그렇기에 뒷세계에조차 알려지지 않은 어두운 영역으로 남을 수 있었는데.
담배를 길게 빨아들인 남자, 오드릭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떤 놈일까. 분명 누군가가 뱀파이어를 잡은 거다. 괴물 사냥꾼? 혹시 몰라. 다른 뱀파이어와 싸우다가 이 사달이 난 걸지도.’
이쪽일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세력이 나누어 있기도 했고, 10년이 넘는 경험상 필요하다면 서로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았으니까.
‘최근 우두머리들의 경쟁도 심해졌고.’
어느새 다 펴 버린 담배를 뱉어 낸 오드릭이 혀를 찼다.
그나마 한 녀석은 세력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뭘 하고 다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기에 그렇지만 다른 두 녀석은 아니었다.
“일이 꼬이는군.”
가뜩이나 시체 조각가라는 녀석이 날뛰고 있다.
놈의 정체도 확정되지 않는 상황. 이번 사건에서는 생존자가 나왔으며, 파티를 통해 들은 소식에 의하면 누군가 시체 조각가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인가.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라면 그자는 아군인가 적군인가.
-키릭
습관적으로 오른손을 대신한 기어를 매만진 오드릭이 등을 돌렸다.
해가 떴다. 뱀파이어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협약. 놈들의 영역이 아니었고 파티 또한 정면으로 나서기 껄끄러웠다.
한쪽이 규율을 깨는 순간 더 이상 반트 성에 평화는 없을 테니.
“파티에 요청해. 생존자들 입 다물게 하라고.”
“예? 제가 합니까?”
“그럼?”
-기이이이잉
오드릭의 기어가 마나석을 발광시키며 톱니바퀴를 굴리자 도리안이 질색하며 손을 내젓는다.
“아뇨. 뭘 물어보냐 이거죠. 안 그래도 제가 하려고 하는데.”
그의 변명에 콧김을 내뿜은 오드릭이 사라졌고.
“카앗, 퉤! 성질 더러운 거하고는. 콱 뒈져 버려라.”
침을 내뱉은 도리안이 파티에 연락을 하기 위해 자리를 떴고.
그의 소원은 반만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