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568화 (568/740)

568화 지켜보는 자들

아닌 밤중에 피 냄새라.

옅다. 정말이지 무심코 지나가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예민한 내 후각에도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이건 안 가 볼 수가 없군.”

난 발걸음을 옮겼다. 몰랐다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지금은 시체 조각가 칼리버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나마 아는 상황이다.

뱀파이어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 물론 특별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나야 이런저런 전투를 겪으며 피 냄새에 예민해져 민감하게 반응한 거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것 봐라?”

인기척을 죽이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정신을 잃은 여인과 목에 이빨을 박아 넣은 녀석이 보였다.

정체는 말할 것도 없이 뱀파이어.

갑작스럽게 나타난 나를 본 녀석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저리 꺼져!”

목격자를 없애기 위함인가 녀석이 달려들었다.

의식을 잃은 여인의 목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신나게 빨아 댔으니 피가 안 날 리가 없지.

“매너가 없네. 초면에 꺼지라니.”

휘릭. 콰아아아앙!

날카롭게 벼려진 손톱을 내뻗으며 덤비는 놈의 팔을 쳐 내는 동시에 목을 붙잡았다. 그대로 체중을 실어 바닥에 내리꽂자 머리통이 박살 난 녀석이 부들거린다.

생명력 한번 질기군. 그리 수준 높은 녀석은 아닌 거 같은데.

“끄으으으으.”

“이걸 어디다 써야 하나. 아니, 이 동네는 뭔 뱀파이어가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 건지.”

쯧. 짧게 혀를 차고 녀석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상처가 빠르게 아물고 있다. 이 정도면 초재생까지는 아니어도 어중간한 몬스터보다는 확실히 재생 속도가 빠르다.

뱀파이어는 상처 회복을 금방 하는 건가.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었군.

그렇다면.

-뿌득

죽어야지. 목을 비틀었다.

뼈가 어긋나는 감촉과 함께 신경이 마비된 녀석이 축 늘어진다.

비명을 지르려는 건지 아니면 숨을 몰아쉬려는 건지 입을 크게 벌렸지만 수도꼭지처럼 돌려 버린 탓에 기도가 막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냥 살려 가서 심문이라도 해 볼까 고민했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영 껄끄러워서 말이야.’

아직 뱀파이어가 어떤 놈들인지 모른다. 어떤 괴상쩍은 능력을 부릴지 모른다는 것.

보니까 이놈은 잔챙이 같고. 범행을 저지른 것도 어설프기 그지없다. 이제 막 뱀파이어가 된 건가. 아니면 칼리버 때문에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어떻게든 피를 빨려고 모습을 드러낸 건가.

어쩌면 후자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당장 나와 함께 이곳으로 온 미야도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사육장으로 들어왔다가 나한테 잡히지 않았던가.

다만 둘의 행동 원리는 비슷했으나 큰 차이가 있었으니.

“사람을 빨아먹으면 쓰나. 모기도 아니고.”

한 명은 끝까지 사람을 물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 녀석은 물었다는 거다.

몬스터라는 건 기준이 명확해 보여도 애매할 때가 많은데 내가 볼 때는 나누는 매우 간편한 방법이 있다.

사람을 먹이나 놀잇감으로 삼느냐 아니냐.

그런 의미에서 이 녀석은 사람 말을 하더라도 명백히 몬스터였고.

-빠드드득!

“넌 나랑 같이 가자.”

자비를 보일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 바퀴 더 목을 돌리고 어깨에 얹었다. 생명력이 질기기도 하지. 숨도 못 쉴 텐데 끈질기게 살아 있다.

이 녀석은 그렇다 치고.

“일단은 데려가야겠지.”

골목 바닥에 엎어져 있는 여인도 옆구리에 끼었다. 피가 좀 나서 지혈을 한 건 기본.

편하게 들어가고 싶었으나 칼리버를 잡으러 돌아다니는 특임대가 있어 빙 돌아가야 했다.

아무래도 지금 내 모습은 수상하기 짝이 없어서.

다행히 여관은 조용했고 별다른 목격자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밧줄로 뱀파이어를 고정시킨 후 여인을 침대에 눕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반쯤 졸듯이 벽에 몸을 기댔다.

적어도 반트 성에 들어온 첫날은 푹 잘 줄 알았더니만 같잖은 뱀파이어를 만나 선잠이나 자야 하고.

괜히 짜증이 나 녀석의 머리통을 때렸다.

* * *

날이 밝은 아침.

활짝 열어 놓은 창문 맞은편에 앉은 난 작게 감탄했다.

“오, 신기하네.”

미디어에 나오는 뱀파이어에는 여러 설정이 있다. 마늘을 싫어한다느니 십자가를 무서워한다느니 같은 거.

이쪽이야 애초에 세계 자체가 달라서 그런지 십자가에는 별 반응이 없었고, 개인 상점으로 구한 마늘에도 얼굴을 찡그릴 뿐 그다지 반응이 없었다.

흔히 들려오는 속설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들어맞는 것도 있었으니.

“진짜 햇빛 받으면 타 버리네.”

햇빛에 노출되면 타 버린다는 거였다.

여명과 함께 떠오른 태양 빛을 받은 녀석이 반짝이는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렸다.

하는 짓은 끔찍하지만 죽을 때는 나름 멋이 있다. 작게 감탄하는 것도 잠시.

‘…저급한 뱀파이어는 햇빛에 저항력이 없지만 급이 되면 낮에도 충분히 돌아다니겠군.’

난 차분하게 판단을 내렸다.

이런 판단을 한 이유는 하나.

변이 중인 미야가 나와 함께 낮에도 돌아다닌다는 거였다.

변이가 완전히 끝난 놈도 이런 꼴이 나는데 아직 불안정한 미야는 오죽할까. 그럼에도 함께 반트 성으로 올 때까지 고통스러워한다던가 몸 일부가 바스라지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억지로 참은 것도 아니다. 나와 함께 마을을 떠나기 전에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가축을 사냥하며 살았으니까.

즉.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햇빛에도 별 영향을 안 받는다는 거지.’

미야는 숙주가 되는 뱀파이어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았다고 권능이 말해 줬으니까.

숙주라고 불리는 놈도 버젓이 낮에 돌아다닐 게 분명했다.

잠깐만.

‘세미 뱀파이어는 낮에도 활동하지 않았었나?’

진짜 뱀파이어가 아니라서 괜찮은 건가. 어쨌든 사람이었다가 뱀파이어처럼 변한 거니까.

기준을 모르겠네.

어깨를 으쓱였다. 별 신경 안 쓴다. 세미 뱀파이어든 진짜 뱀파이어든 문제가 될 거 같으면 처리하면 그만이다.

-똑똑

“어, 들어와.”

노크 소리에 간밤에 잡아 온 뱀파이어를 묶어 두었던 줄을 발로 밀어 침대 아래에 넣었다.

살며시 문이 열리며 두 여인이 들어온다. 한 명은 미야였고 다른 한 명은.

“아, 안녕하세요. 저를 구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감사합니다. 카르리나라고 해요.”

어젯밤에 데리고 온 인물이었다.

내 방에 놔두긴 좀 그래서 자고 있던 미야를 깨워 넘겨줬다.

놀라면서 뭐라 뭐라 하기는 했는데 별수 있나.

“이블아이라고 합니다. 별일 아니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일단 여관으로 데리고 온 것뿐이라서요. 몸은 좀 어때요?”

“살짝 어지럽기는 한데 그래도 아프거나 하지는 않아요.”

가려운지 목을 문지르는 모습을 유심히 봤다.

내가 따로 조치를 취했기 때문인지 별다른 흉터는 남아 있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생명수도 뿌리기는 했는데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간밤에 잡았던 녀석에게도 신성력을 불어넣어 봤는데 별다른 반응이 없어서.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네.’

햇빛을 받아도 멀쩡하고 말이야. 물린다고 전부 뱀파이어가 되는 거 같지는 않다.

좋은 일이지. 물릴 때마다 죄다 변이되어 버리면 그게 뱀파이어인가 역병이지. 그런 게 가능했다면 진작에 이 세계는 뱀파이어가 지배했을 거다.

“요즘 분위기도 안 좋은데 밤에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해요.”

“그건 저도 알지만… 혹시 그때 미카엘은 못 보셨나요? 만나러 가는 도중에 괴한한테 습격을 당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그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미카엘이라.

‘그거 내가 잡은 뱀파이언데?’

설마 그동안 사람인 척 연기하며 꼬드기고 있던 건가. 그러다 밖으로 나오게 만들어 피를 빨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악질이다. 사람의 감정을 이용하는 괴물이라는 뜻이니까.

미야 때도 그렇다. 변이는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고 피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을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자제력을 잃었을 때, 갑작스레 변이가 빠르게 진행될 때. 이성을 잃었을 때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겠지.

물끄러미 카르리나를 바라봤다.

본인은 알까. 자신을 공격한 괴한의 정체가 연인이라 착각했던 이었다는걸.

“글쎄요. 주변에 다른 사람은 못 봤어요.”

“그런가요.”

“잘 들어갔겠죠. 개의치 말아요.”

살짝 시무룩해진 그녀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더니 뭔가를 내민다.

“이번에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시간 되면 들러 주세요. 답례를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여관을 나선다.

굳이 배웅해 주지는 않았다. 밤도 아니고 해가 떠 있으니 위험한 일은 없을 거다.

그보다.

“명함이라.”

“와, 베르델가 가문이네요.”

“음?”

오랜만에 받아 보는 명함에 피식 웃고 있는 타이밍, 옆으로 온 미야가 감탄했다.

베르델가 가문이라. 처음 듣는 곳이다. 유명한 곳인가.

“기사 가문이에요. 설마 그곳의 아가씨였을 줄이야. 어쩐지 태가 남다르더라니.”

“여기 기사도 있나?”

“그럼요. 영지에 기사가 없으면 영주님은 누가 지켜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는 눈빛으로 쫑알거리는 녀석.

이런 부분은 또 중세 같단 말이지.

뱀파이어 녀석 간도 크네. 기사 가문의 여식을 건드리다니.

턱을 긁적였다. 이곳의 기사는 어떤 느낌이려나. 검기도 쓰고 그러나? 아니면 그냥 신분을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모든 곳이 그러지는 않겠지만 내가 겪었던 세계는 대부분 기사 가문에 속한 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검술을 수련했어서.

반면 카르리나는 검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손에 굳은살도 없고 단련한 느낌이라고는 전혀 없었으니까.

명함은 잘 챙겨 넣었다. 어찌 됐든 미야도 알 정도면 상당히 유명한 집안인 게 분명했으니까.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만큼 사용할 수 있는 패는 많을수록 좋았다.

“아침 아직 안 먹었지?”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죠.”

마을에서는 해가 뜨기가 무섭게 일을 하는 만큼 아침은 꼭 챙겨 먹는 미야였다.

나도 비슷하고. 탑에 들어오기 전에도 그랬지만 탑에 들어오고는 더 그렇다. 마음 편히 늦잠을 잘 환경이 안 돼서. 체력이 좋아진 덕분이기도 할 거다.

적당히 빵에 수프로 배를 채우며 일정을 정리했다.

어제 상단에 들렀고, 밤에 뒷골목 놈들을 잡아 정보를 얻었다. 새로운 소식을 들을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겠지. 프램버그에 보낸 물건에 대한 정보도 바로 올 거 같지는 않고.

대략 남은 건.

‘베가 파티에 가 보는 거랑 정보 길드 들르기. 미야가 갔었던 동선 살피기 정도인가.’

그리 빡빡한 일정은 아니었다.

식사를 마친 후 베가 파티를 향해 먼저 움직였다.

“이건 뭐 그냥 벽이네.”

어디 강력범들만 집어넣은 수용소도 아니고 벽이 상당히 높다. 정문도 개방되어 있지 않고. 혹시나 싶어 둘러봤지만 가드나 초인종 같은 것도 없다.

내부에 연락을 넣을 방법 자체가 없다는 것. 남들 몰래 벽을 넘어 볼까도 생각했지만.

‘옵저버군.’

CCTV처럼 곳곳에 옵저버가 있다. 내가 파악한 것만 8개. 그 외에도 감시 목적으로 보이는 장치들이 있었으니 섣부르게 움직이기는 애매했다.

방범 시스템이 빡빡하다라. 하기야 기술력 있는 업체니까 보안 유지는 필수겠지. 그런 것치고도 심한 편이긴 하지만.

일단은 돌아가야겠다. 작정하고 뚫자면 못 뚫을 것도 없지만 지금은 미야와 함께 왔다.

이것만으로도 소정의 목적은 달성했다. 이곳을 보고 있을 내부 사람들이 미야를 봤을 테니까.

어찌 됐든 미야는 이곳에 초대를 받았던 인물.

혹시 아는가.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을지.

‘여기는 밤에 따로 찾아오든지 하고.’

정보 길드로 가자.

미련 없이 방향을 틀었다.

등 뒤로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옵저버가 일제히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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