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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567화 (567/740)

567화 꼭 쉬려고 하면

반트성은 하나의 도시. 그것도 어느 정도 근대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 도시였으나 세심하게 보면 그보다 본능적이고 법치주의를 무시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폭력과 돈이 뒤섞인 세계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보다 발전된 사회로 넘어가기 위한 과도기에 접어든 느낌이기도 했다.

그만큼 혼란스러웠으며 동시에 생동감이 넘치는 곳.

“크하아아악!”

“어디서 이런 괴물이!”

이런 느낌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지. 선 넘게 달려드는 놈들을 시원하게 쥐어팰 수 있으니까.

자고로 남을 쑤셨으면 본인도 쑤셔질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이건 내가 탑에 들어오기 전에 짐꾼으로 활동할 때도 가지고 있던 생각.

얕보이면 당한다. 이용당해 봤자 도움을 주는 사람은 없다.

빌어먹을 대격변을 겪은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되뇌었을 말이었고, 아마도 독하게 당한 사람은 머리에 확고하게 박힌 신념과도 같을 거다.

“다들 얼굴에 기름기가 도는 게 잘 먹고 잘산 거 같은데 힘 좀 써 보지?”

내 주먹을 맞고 바닥을 나뒹구는 놈들이 절반. 벽이나 천장에 처박혀 몸도 못 가누는 놈이 열댓은 넘는다.

그래도 손에 사정을 뒀다. 아무리 밑바닥에 사람들 등골 빨아먹는 놈들이라고는 하나 죽이는 건 경비대 입장에서는 곤란할 테니까.

이런 규모의 조직이 버젓이 활동할 수 있는 이유가 뭐겠는가. 다 봐주니까 하는 거다.

‘놈들에게 성의라고 돈도 좀 받아먹고 여기저기 흩어진 놈들보다는 이렇게 한곳에 모여 있는 녀석들이 관리하기 쉽잖아.’

언제 일일이 관리를 하겠는가. 경비대도 인력은 한정적인데. 서로 적당히 눈치 보면서 해 먹을 만큼만 해 먹으면 되는 거다.

이방인인 나는 예외. 놈들끼리 만든 규칙에 얽매일 필요 없다. 어느 정도 선은 지킬 거니까.

내가 원하는 건 뒷골목에 자리 잡은 녀석들을 쓸어버리는 것이 아닌 협조적인 관계를 만드는 거라서.

“죽어어어!”

“어우.”

가슴으로 파고드는 단검을 쳐 내며 턱을 후려갈겼다.

단번에 눈이 풀리며 날아가는 건달이 하나.

-타앙!

-팅!

기습하고 싶었는지 번쩍 책상 뒤에서 몸을 일으키며 총을 쏘는 놈도 있었지만 펠라인 세트는 가볍게 총알을 튕겨 냈다.

평범한 납총알로는 못 뚫지. 굳이 갑옷으로 막을 필요도 없다.

-콰득.

연달아 쏘아진 총알을 붙잡았다.

워낙 작고 빨라 잠깐 한눈팔면 잡기 힘들지만 놈의 시선과 몸의 각도,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만 봐도 어디를 쏠지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표적에 집중한다는 건 그만큼 자세가 정직하게 나온다는 거니까.

-파앙!

적당히 굴러다니는 의자를 집어 던졌다. 터지는 소리와 함께 총을 쥔 녀석이 대자로 뻗는다.

대충 손을 털며 바닥에 떨어진 총을 주웠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괜찮네.”

내가 쓸 일은 없을 거 같지만 소장 욕구가 생기게 생겼다. 그만큼 고전적이면서도 담담한 멋이 있었으니.

머스킷 소총도 낭만이 있지. 이 쭉 뻗은 총신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손잡이를 봐라.

개머리판도 단단한 것이.

-빠아아악!

“억!”

몽둥이로도 쓸 만할 거 같다.

괜히 신나서 날뛰다가는 잘못 맞은 누군가는 죽을 거 같아 적당히 몽둥이 찜질을 이어 갔다.

역시 만병지왕은 총이라니까.

“워, 원하는 게 뭐냐! 우리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아까부터 말했잖아. 가장 윗대가리 데려오라고.”

처음부터 정직하게 말했다. 우두머리를 데리고 오면 큰 피해 안 끼치고 이야기만 좀 하다 가겠다고.

거부한 건 이놈들이다. 날 보며 낄낄거리고 욕을 내뱉어도 무시하고 넘어갔었는데.

“공주님이나 가지고 놀 거 같은 무지개 인형이라고 하는 건 선 넘었지.”

내가 싫어하는 단어를 두 개나 집어넣다니. 악랄하기 그지없는 녀석들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성질을 부렸네.

그런 나의 무력에 놈들이 주춤주춤 물러선다.

“우, 우린 그냥 골목에서나 전전하는 조직일 뿐이야. 별 볼 일 없는 쓰레기일 뿐이라고!”

본인 입으로 저리 말하니 할 말이 없어진다.

대충 이곳의 우두머리라고 해 봤자 대단할 건 없다는 뜻인 거 같다만.

“그놈이라도 데리고 와. 그래야 나도 쉬지. 밤 중에 이웃한테 민폐나 끼치고 말이야.”

터엉.

바닥을 굴러다니는 갑옷을 발로 차고 의자에 앉았다.

나름 분위기를 낸답시고 배치한 원목 테이블에 양발을 올렸다. 건방지고 빈틈 많은 자세였지만 아무도 덤벼들지 않았다.

용기 내어 내게 뭐라 지껄이던 녀석이 천천히 맞은편에 앉는다.

뭐 하는 거지, 이 녀석?

“내가 이곳의 두목이다.”

“아오 씨. 그냥.”

진작에 나왔으면 힘 안 뺐어도 됐잖아.

손을 들어 올리자 잔뜩 쫀 녀석이 양팔로 얼굴을 가린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네. 됐다. 여기서 성질내 봤자 나만 손해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안 좋다고 해야 할지.

예상했던 것보다 별거 아닌 애들이라 큰 소란 일으키지 않고 접수한 것까지는 좋은데 딱 보니 그리 힘을 쓰는 조직은 아닌 거 같다.

말하는 투를 봐서는 여기 말고도 끼리끼리 뭉친 조직이 더 있는 거 같고.

그마저도 최근에는 몸을 사리느라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경우가 별로 없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정도 기반이 있는 놈들이면 도박 시설이나 유흥가 등을 운영, 관리하면서 고정적인 수익을 빨아먹으며 버틸 수 있으니까.

이놈들은 소매치기 같은 자잘한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덩치 유지가 안 되는 거고.

어떻게 할까.

‘그냥 다른 곳도 같이 털어?’

그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다만.

“편하게 앉아. 내 집이다 생각하고.”

“고맙, 군.”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나의 선심에 녀석이 똥 씹은 표정을 짓는다.

“대단한 걸 원하는 건 아니야. 요즘 시끌시끌하잖아. 시체조각가 칼리버. 자고로 하는 짓이 구린 놈은 구린 곳 위주로 다니게 되어 있거든. 그딴 짓 하면서 대로변으로 나가진 않을 거잖아.”

그랬으면 진작에 잡혔지.

칼리버라는 이름에 상대방이 얼굴을 찌푸린다.

“놈과 우리를 엮으려는 건 아니겠지? 그 미치광이에 대한 건 몰라. 그런 거 쫓아가다 보면 단명하기 딱이라고. 부스러기 먹고 사는 우리도 그 정도는 알아.”

“진짜 단명하고 싶나. 누가 둘이 한패래? 그래도 이래저래 들은 게 있을 거잖아. 외부인인 나는 모르는.”

천천히 일어나 녀석의 뒤로 돌아갔다.

턱.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쁜 짓 하고 살았으면 착한 일도 해야 균형이 맞지. 안 그러면 비대칭이 돼요. 팔다리가 홀수가 될 수가 있다고.”

꾸우우우욱.

어깨가 많이 뭉친 듯해 손아귀에 힘을 줬다.

“끄아아아아악! 알았어! 알았다고!”

“협조 고맙군.”

역시 어깨가 뭉친 게 맞다. 다음에도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혈액순환 좀 시켜 줘야지. 보니까 찌뿌둥한 곳이 많아 보이는데.

“대신 비밀로 한다고 약속해 줘. 우리가 말한 걸 알면 놈이 보복할지도 몰라.”

“이미 당한 조직이 있나 보지?”

“보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군. 직접적으로 칼리버라는 놈이 손을 쓴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놈의 이름을 듣고 무작정 쳐들어온 놈들이 깽판을 친 거지.”

가뜩이나 험상궂은 얼굴을 찡그린 녀석이 불평하듯 입을 열었다.

영주가 파견한 특임대와 현상금을 노리는 용병과 깡패의 중간 지점에 있는 놈들까지.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사라진 조직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는 꽤 규모가 큰 곳도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쓸려 버린 경우도 있다고.

“우리도 놈에게 좋은 감정이 있지는 않아. 그 자식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자잘한 돈까지 씹어 먹지는 않았을 테니까.”

으득. 이를 간 녀석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친다.

“자꾸 성깔 내네?”

“…놈에 대한 정보가 좀 있긴 하다. 다른 곳은 모르는 것들이야.”

슬쩍 손을 내린 녀석이 알고 있는 정보를 내놓는다.

특히 다른 조직은 모르는 내용이라고 강조하길래 집중해 들어 보니.

‘반은 쓰레기 같은 정보인데 나머지는 꽤 괜찮군.’

칼리버가 활동하는 시간은 12시부터 4시까지가 대부분.

조직이 관리하던 영업장에서 일하던 여인이 당해서 이것저것 알아본 거 같았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정보를 얻었으니.

“그 미친놈이 있던 자리에는 핏자국이 별로 없어. 팔다리 떼어 가는 녀석치고는 뒷수습이 깔끔한 편이지. 아, 시체 중에는 반으로 접어 버린 것도 있다더군. 잘 접어서 쓰레기통 같은 곳에 처박았다고.”

신체 일부를 잘랐음에도 핏자국이 많지 않다는 것.

범인의 정체가 뱀파이어일지도 모른다는 나의 예측이 강화되는 순간이었다.

뒤에 말한 부분도 중요했는데.

‘사람 몸을 종이 접듯이 접었다라. 미친놈인 건 분명하고 취향이 괴팍하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건 아닐 거다.

나름의 기준이 있겠지. 단순히 희생자를 모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그랬을 테니까.

“3일 뒤 다시 오지. 그때까지 얌전히 있으라고. 어디 도망칠 생각 하지 말고. 그때는.”

-따악.

-콰아아아아앙!

“네 몸이 터질 거야.”

자연스럽게 발로 찼던 갑옷에 설치한 신하 폭탄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다 보니 이게 굳이 손으로 안 만져도 설치할 만하더라고.

황급히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는 녀석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녀석의 몸에는 따로 설치한 게 없다. 해 봤자 멀리 떨어지면 별다른 효과가 없기도 해서. 그래도 협박하기에는 적절한 능력이었다.

“그때까지 칼리버에게 당한 이들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모아 와.”

“우리라고 하더라도 그건 힘들다!”

-타악.

가볍게 놈에게 주머니를 던졌다.

내 눈치를 살피던 녀석이 주머니를 열었고.

“그거면 도움이 되겠지.”

“무, 물론이야. 내가 밑바닥이기는 해도 이곳에 오랫동안 정착했지. 나름 인망도 좋다고! 잘 찾아왔다.”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진중한 표정을 짓는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금화와 환금성 좋은 보석과 금을 넣어 놨다. 저 정도면 정보 길드에 찾아가 정보를 사는 것도 가능하겠지.

사실 내가 직접 찾아가 볼까 생각도 했는데.

‘지금도 충분히 난리를 피웠어. 괜히 정보 길드까지 들락거리면서 경계심을 가지게 할 필요는 없겠지.’

외부인인 내가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는 현지인인 녀석이 정보를 물어 오는 게 나을 거 같다.

이곳에 있는 놈들은 대부분 양아치 기질이 있어서 잘 모른다 싶으면 바가지를 씌우거나 대충대충 일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럼 난 또 힘을 써야 했고 눈치채지 못하면 쓰잘데기 없는 정보를 큰돈 들여 사야 했다. 이런 놈들 특징이 호구라고 생각하면 자꾸 수작질을 하는 것도 문제고.

차라리 작더라도 어느 정도 힘을 쓰는 조직의 수장을 찾아가는 편이 좋았다.

이러려고 시한폭탄으로 협박한 거다.

“기대하고 있지. 애들 맛있는 것도 사 먹이고.”

“걱정하지 마라. 나, 마루노의 이름을 걸고 제대로 알아볼 테니까.”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며 자리를 나섰다.

허튼 수작을 부리거나 도주하면 끝이 좋지 않을 것을 암시하면서.

그러거나 말거나 마루노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을 두드린다.

이름이 마루노였나.

적당히 돈을 떼먹는 건 신경 안 쓴다. 원하는 것만 가져오면 말이지.

“이곳 여관 시설은 어떨지 궁금하군.”

놈들의 근거지에서 나온 난 여관으로 걸었다.

여전히 새벽인 시간. 하늘은 어두웠고 뜨신 물에 목욕할 시간은 넘쳐 났다.

여관 직원도 잠들어 있을 때였지만 적당히 성의를 보이면 물 정도는 데워 주겠지.

오랜만에 뜨신 물에 몸을 담글 생각을 하며 나아가던 그때.

“하, 씨.”

골목 어귀에서 은은하게 풍겨 오는 피 냄새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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