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565화 (565/740)

565화 반트 성

미야가 뱀파이어에게 물린 시점은 대략 2달 전.

길다면 긴 시간이다. 그렇기에 마을 사람들도 밖으로 나가 가축을 죽인 이를 잡으려고도 했다.

당연히 잡힐 일은 없었다. 범인은 미야였고, 마을 사람들은 가축을 습격한 대상이 마을까지 내려온 몬스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게 반복되다 보니 지금은 괴담 비스무리한 게 되었고.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지금은 촌극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당사자는 아니었다.

“이렇게 버티는 것도 얼마 못 갈 거라 생각했어요. 반트 성에서도 흉흉한 소문이 돌고 언젠가는 들켰을 테니까요. 마녀 사냥을 당하는 것도 무섭지만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더 무서워요.”

그동안 쌓인 게 많은지 한번 터진 말은 끝날 줄 몰랐다.

이해한다. 남한테 하지 못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암, 잘 알지.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는 건 힘든 일이지.”

“이블아이도 그런 게 있나요?”

“없다고는 못하겠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슬프게도 따로 하소연할 사람이 없는 건 마찬가지라.

멤버들한테 하소연해 봤자 깔깔거리기나 할 거고, 릴카나 몇몇 NPC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다.

그냥 짠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기만 해도 다행이지.

사실 이것도 자의로 공개했다기보다는 몰리고 몰려 말하거나, NPC가 커뮤니티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들킨 거였지만.

문득 릴카의 딱밤을 때리면 안 됐던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중에 앙심 품고 퍼트리지는 않겠지?

그럴 리가 없다. 난 항상 릴카를 믿으니까!

“아무튼 네가 말한 게 맞아. 지금까지야 어떻게든 버텼지만 길어 봤자 한 달 내로 잡혔을 거야.”

겁을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문제가 계속 발생하는데 방치할 리가 없지 않은가.

당장 일주일 정도 가축을 내보지 않았더니 잡히지 않았는가. 어디까지나 내가 대기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빠르냐 늦느냐의 문제지 결국에는 잡히게 되어 있었다. 결말은 말하지 않아도 알 정도로 뻔하고.

그것보다.

‘반트 성이라.’

미야가 뱀파이어에게 물린 장소가 그곳이다. 내 목적지이기도 하고.

혹시나 했지만 진짜 그쪽과 엮여 있는 녀석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널 문 뱀파이어의 얼굴은 기억나?”

“정확히는 안 나요. 턱 끝에 흉터가 있었다는 것 정도. 키가 컸어요. 아! 오른손 검지 손톱이 까만색이었던 것도요.”

“다시 만나면 알아볼 수는 있을까?”

“아마도요. 아니, 알 수 있어요. 특이한 냄새가 났어요. 오래된 나무 같은 냄새가.”

그 정도면 충분하다.

어차피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시간이 지난 만큼 머릿속에서 희석되는 건 물론이고, 똑바로 기억하고 있다고 한들 말만 들어서는 알 수가 없다.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확인하는 편이 빠르다.

92층을 클리어하는 열쇠일 것으로 추정되는 녀석을 찾기 위해서라도 미야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반트 성에 나타난 시체 조각가 칼리버.’

난 이 녀석이 뱀파이어일 거라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미친놈이 길거리에 널려 있지는 않을 테니까. 아무튼 결론은 났다.

“반트 성으로 간다. 이틀 뒤 떠날 거야. 그때까지 준비해. 인사 나눌 사람 있으면 나누고.”

그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섰다. 슬슬 동이 틀 거다. 사람들이 일어날 테니 적당히 시간을 끌어줘야지.

미야는 이미 공간 도약으로 사라졌다. 여태껏 여러 번 했을 테니 익숙할 거다.

“후우. 어떻게 둘러 대야 하나.”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 몬스터였다면 걱정할 것도 없이 죽였겠지만 어찌 어찌 동행하게 되었다.

마을을 떠나는 만큼 사건은 해결이라고 봐야 했으나 말로 해 봤자 사람들이 믿을 거 같지도 않다. 뭐든 눈에 보이는 게 없으며 미심쩍기 마련이라서.

“나가서 적당한 놈으로 잡아와야겠군.”

아직 시간이 좀 있다. 근방에 있는 몬스터 중 사람들이 납득할 만큼 험악하게 생긴 녀석의 머리라도 잘라와야겠다.

* * *

반트성으로 향하는 길. 내 체력과 속도면 이틀이면 당도할 거리였지만 동행하는 미야는 상황이 달랐다.

“조금만, 조금만 천천히!”

“아까 쉬었잖아. 늦장 부리다가는 한밤중에 도착할 거야. 성문 앞에서 아침까지 기다리고 싶은 건 아니지? 거긴 밤에 문 잠근다며.”

“그러기는 하죠. 으으읏차.”

미야가 힘을 내서 발걸음을 옮긴다.

그동안 쌓였던 마음의 고생이 조금은 풀렸기 때문인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표정은 밝았다.

마을에 있던 소동. 일명 추파카브라 사건은 잘 마무리가 됐다.

괴상하게 생긴 몬스터의 얼굴에 재료로 쓰려고 놔둔 뿔이랑 지느러미를 붙이니 척 봐도 범상치 않은 괴물의 머리가 되었으니까.

급조한 괴물이었지만 사람들은 괴물을 잡았다는 것에만 집중해 환호했다.

몇몇 더 머물다가 떠나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미야에게 말한 시기에 맞춰 이동했다.

미야도 그사이 정리를 하고 나왔으니 우연의 일치인지 같이 떠나는 우리를 보며 눈이 맞았네 어쩌네 하며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도 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볼일 없는 사람들이라 멋대로 생각하게 두었다. 괜히 이렇다 저렇다 말해 봐야 입만 아파서.

“저번에 반트 성에 왜 갔었다고 했지?”

“초대를 받았어요. 가끔씩 있는 일이에요. 베가 파티라는 장난감 공장의 주인 되는 분인데 이벤트성으로 영지성 내에 있는 사람 말고도 주변 마을에도 몇몇 초대장을 보내거든요.”

“장난감 공장이라.”

볼을 긁적였다. 자신의 제품을 홍보하기 위함이든 아니면 대외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든 초대장을 보내는 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장난감 가지고 놀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

“무슨 소리예요! 어른들도 장신구로 많이 쓰거든요? 얼마나 정교한데요. 오히려 애들이 쓰기에는 너무 섬세한 작품이라고요. 애들은 툭하면 던지고 부수고. 튼튼하고 싼 걸 쥐여 주는 게 나아요.”

발끈하는 녀석.

생활력이 강한 건지 묘하게 꼰대 기질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장난감에 관심이 크다는 건 알겠다.

하기야 우리도 키덜트니 뭐니 하면서 애들보다 어른들이 더 구매하는 것들이 많지 않던가.

팬시샵만 가도 어린이보다는 대학생이나 젊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 대부분 커플이었지.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여전히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건 세상이 살 만하다는 증거였으니까.

“후후. 저도 가서 선물을 받은 게 있죠. 짜잔!”

자랑하고 싶었는지 가방을 내려놓고는 안을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냈다.

황동으로 만든 물건. 언뜻 시계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뒤에는 태엽을 감을 수 있는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눈썹을 올렸다. 이거, 생각보다 정교한데?

일단 마감부터 깔끔하다. 분명 양산품일 텐데 부스러기가 튀어나오거나 몸체의 규격이 미세하게 다른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애들이 가지고 노는 것보다는 테이블이나 전시장에 놔둘 만하게 생기기는 했네.

“잠깐 봐도 될까?”

“이블아이니까 특별히 보여 주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절대 안 보여 줘요. 이런 말하기는 그렇지만 도둑이 종종 들어서. 흠흠.”

중세는 중세다 이건가. 한 다리 거치면 다 아는 이웃인데도 도둑질이나 하고.

그래도 강도가 아니니 다행이다.

물건을 받아 들어 여기저기 살폈다. 상당한 금속 가공 능력. 황동으로 된 몸체 일부는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그 안으로 태엽 장치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계처럼 시침 같은 것이 딸깍거리는데 정확한 용도는 모르겠고. 안쪽에 싸구려 마나석이 보인다. 어딘가 익숙한 모습.

‘이거 오면서 주운 시계랑 같은 곳에서 만든 거 같은데.’

난 회중시계를 꺼내 비교를 했고 뒤에 음각으로 세공된 제품 번호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옆에 박힌 별 모양을 유심히 봤다. 처음에는 베가 파티의 로고인 줄 알았으나 그건 뒤편 중앙에 새겨져 있다.

단순한 멋인가. 탑에 오래 있어서 그런 건지 조금만 튀어도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게 아닐지 의심이 든다.

“베가 파티라는 곳 장난감 말고 다른 공산품도 같이 파나?”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쪽으로는 잘 몰라서.”

장난감을 돌려 줬다. 슬슬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 떠들면서 움직이다 보니 어느덧 반트 성 입구까지 도달했고.

“정지. 용무가 어떻게 되십니까.”

“몬스터 부산물을 팔러 왔습니다.”

난 따로 보따리에 담아온 물건을 보여 줬다. 5성급 몬스터의 이빨과 심장. 장비 제작과 포션 제작의 재료였으나 이런 식으로도 써먹기 좋았다.

가능하면 가는 길에 사냥한 걸로 처리하려 했으나 반트 성에 갈수록 주변 관리가 잘 되어 있어서 마땅히 잡을 게 없었다.

‘이것만 보면 치안이 괜찮다는 건데 말이야.’

어째서 성안에 숨어 있는 시체 조각가는 못 잡고 있는 것인지.

속으로 혀를 차며 부산물을 살핀 경비병에게 보따리를 돌려받았다.

“실력 있는 사냥꾼인 거 같군.”

“이블아이는 괴물 사냥꾼이에요!”

미야가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그 괴물 사냥꾼이 널 잡으려고 했어요, 이 사람아.

“괜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가 좋네. 이렇게 깔끔히 손질된 건 또 처음 보는군.”

“몬스터에 대하 좀 아시나 봅니다?”

“하하하하! 내 고향은 사냥에 몸담은 사람이 많거든! 지금이야 노인네들 몇 있을 뿐이지만.”

고향 생각이 나서 이런 거였군. 좋게 생각해 준다니 나야 고맙지.

“중간에 팔지 않고 직접 온 걸 보면 제값을 내줄 사람을 찾고 있는 거겠지. 파커 상단으로 가 보게나. 그곳이 짜게 굴 때가 있기는 하지만 양아치 짓은 하지 않으니.”

“조언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안으로 들어섰다. 내 옆으로 검문을 통과한 이들이 저마다 보따리와 마차를 끌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빈 수레도 있는 것을 보니 이곳에서 물건을 사고 돌아가려는 이들도 있는 거 같고.

“호오.”

평평하게 다듬어 깐 도로. 나름 조경이라고 나무도 좀 심어 놨고 마을과는 달리 발광석이 박힌 가로등이 있다.

초입부터 2층 집이 보였으며 쭉 뻗은 길을 따라 건물의 높이가 더욱 높아졌으니 중앙지로 들어가면 4층짜리 건물도 있지 않을까 싶다.

영주 성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지만 내성 안에 있어 확인은 불가능.

“여기 소매치기 많아요.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요.”

그래도 한 번 와 봤다 이건가. 미야가 눈을 부릅뜨고 주의 사항을 알려준다.

소매치기라. 그래. 사람이 많고 외부인도 많으니 좀도둑이나 건달, 소매치기쯤은 차고 넘치겠지.

바로 이렇게.

“으앗!”

“손목이 얇네. 부러져도 금방 붙겠어.”

-우득

망설임 없이 손목을 꺾었다.

미야의 가방을 칼로 뜯으려던 소매치기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반쯤은 습관으로 놈이 가지고 있던 단검을 발로 차 멀리 떨어트렸다.

그냥 손버릇만 나쁜 거면 적당히 혼내고 말려고 했는데 칼까지 꺼내는 건 아니지. 저게 가방으로 갈지 몸으로 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어, 언제?”

“가방이랑 보따리 달랑 메고 온 사람이니 만만해 보였던 거겠지.”

쪼그려 앉아 손목을 움켜쥔 녀석의 머리를 잡아 올렸다.

두려움에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을 뱉어냈다.

“내 이름은 이블아이다. 다음에 다시 마주치면 반대 손도 부러트려 주지.”

그 말을 끝으로 잡았던 머리를 놓았다. 바닥에 웅크린 녀석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미야가 슬쩍슬쩍 뒤로 돌아봤지만 이내 나를 따라왔고. 꿀꺽 침을 삼킨다.

이건 일종의 경고다.

소매치기를 하는 놈이 하나는 아닐 것이고 바람잡이든 동료든 주변에서 보는 시선이 있을 테니 조금은 과격한 모습을 보인 것.

잡스러운 놈들이면 그냥 그걸로 끝인 거고.

‘놈들을 관리하는 놈이 있다면 따로 소식이 들리겠지. 돈 가져와야 할 녀석이 손목이 부러져 돌아왔으니.’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골목이 많네. 아주 마음에 들어.”

가장 쉽고 싸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

뒷골목에 자리 잡은 놈들을 털어먹는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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