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4화 변이
인기척은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감각을 날카롭게 세워 집중했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조심스럽게 나온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뿅 하고 나타났다고 해야 하나.
난 숨소리도 주의하면서 인기척을 죽였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없는 만큼 무작정 들이박을 수는 없는 노릇.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모습을 드러낸 만큼 상대도 경계심이 높을 테니까.
얌전히 있다가 추파카브라가 먹잇감을 사냥해 식사를 할 때쯤 움직일 생각이다.
‘운이 좋네.’
솔직히 내가 있는 쪽으로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녀석이 노리는 가축들을 사육장 안에 놔둬 먹잇감을 줄이고, 굶주린 녀석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게끔 했다만 마을에 있는 사육장은 여러 개였으니까.
물론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오기는 했지만.
‘그동안 죽은 가축들의 종류를 보면 선호하는 가축이 드러나지.’
소도 있고 양도 있다. 드물지만 염소도 사냥한 전적이 있다.
반면 돼지와 말은 건들지 않았다. 덩치가 작은 닭이라던가 토끼 같은 것도 사냥한 적이 없고.
후자는 대충 이해가 된다.
큰 상처를 입힌 후 피를 빨아먹는 녀석인 만큼 닭 같은 거로 배를 채우려면 수십 마리로도 부족하겠지.
닭이나 토끼는 밖에 풀어 두기보다는 사육장 안에서 주로 기르니 민가와 가깝기도 하고, 괜한 습격에 놀란 녀석들이 날뛰면 사람이 몰려오기 십상이었다.
그렇다면 돼지와 말은 왜 안 건드렸을까? 피의 양만 보더라도 상당히 괜찮은 선택지일 텐데.
의문이 꼬리를 물며 이어졌고 해답은 간단했다.
‘돼지를 키우는 환경이 더러워. 방목을 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사육장에서 보내기도 하고.’
근대의 모습이 일부 있다고는 하나 중세의 모습도 강하게 남아 있다. 특히나 이곳처럼 도시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곳은 더 그렇고.
깨끗하게 관리하는 곳도 있기야 하겠다만 이곳에서의 돼지는 남은 음식물 찌꺼기를 처리하는 가축.
오물이나 다를 바 없는 것도 섞여 있어 악취도 고약하다. 배설물도 아무렇게나 방치해 뒀고. 위생 의식이 별로 없다고 해야 하나.
결국에는 잡아서 먹을 가축인데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하지만 제주도 흑돼지도 과거에는 똥돼지라 불렀었다.
오물을 먹이면 고기가 생기다니. 가축으로 하는 연금술 아닌가.
아무튼.
‘더러워서 안 먹는다는 게 중요하지. 말을 공격하지 않은 이유? 그건 이 세계에서 말의 가치가 높기 때문일 테고.’
예나 지금이나 말은 몸값이 비싸다. 농사를 한다면 소의 가치도 높겠지만 이곳에서는 식량의 의미가 더 컸다.
마을에 있으면서 듣기로는 말 한 마리면 소 열 마리는 넘게 산다고 했다. 건드렸다가는 마을을 뒤집어서라도 범인을 찾을 게 뻔하다는 말.
소나 양이면 속이 쓰리더라도 운이 나빴다고 하고 말 일이었다. 방목 위주다 보니 종종 산짐승이나 몬스터에 의해 죽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범인은 소를 주로 사냥했다. 나도 소 우리에 숨었고.
-까드득, 까드득
뭔가를 긁는 건지 비트는 건지 모를 소리가 들린다.
슬슬 식사를 하려는 건가. 주변에 있는 가축들을 깨우지 않기 위함인지 소리가 조심스럽다.
지능이 높다는 뜻. 아니, 그냥 머리가 굴러가는 녀석이 맞겠지.
‘여러 상황과 단서를 종합했을 때 추파카브라의 정체는 사람이니까.’
진짜 사람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힌트는 많았다.
첫째, 사람이 없을 때만 사냥을 했다.
사람들이 잠드는 시간, 경계가 약할 때를 알고 있다는 뜻.
둘째, 더러운 곳에서 사냥하지 않는다.
비위가 강하니 약하니를 떠나서 오물 범벅인 곳에서 식사를 하고 싶지는 않겠지.
셋째, 사람들이 아끼는 말은 절대 건들지 않는다.
이곳 분위기와 가축이 가지는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넷째.
야생에 돌아다니는 짐승을 사냥하지 않는다.
이게 뜻하는 바는 두 가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니 함부로 나가기 힘들겠지. 그리고.’
전투에 익숙하지 않다.
이게 내 결론이다. 소도 단번에 죽일 만큼 강하지만 겁이 많다. 굳이 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가축을 잡아먹는 것도 이 때문.
아니었으면 괜한 소문 안 만들고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왔겠지.
전투 경험이 없거나 드물고, 몬스터를 상대하는 방법을 모르는 흡혈 괴물이라.
이거 진짜 뱀파이어 아닌가 의심도 살짝 들기는 하다만 확인해 보면 그만이다.
-우득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피 냄새가 피어오른다.
꿈지럭거리던 녀석이 드디어 사냥을 했다는 뜻이었고.
[레인보우 프리즘(SS)]
완전 은신을 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피를 빠는데 정신이 팔렸는지 내 쪽은 신경도 쓰고 있지 않다.
잠시 자리에 멈춰서 상대를 바라봤고.
‘사람이 맞네.’
내 추론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어릴 적부터 일을 하는 곳이라 얼굴만 보고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이제 갓 성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여인이 죽은 소의 배에 양손을 오므려 피를 받아마시고 있었다.
따로 피를 빨 수 있는 기관이 없을 거라 예상했다만 진짜 그냥 삼키고 있었던 건가.
특수한 능력이 있는지 피는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손과 얼굴, 옷까지 피로 물들어 흉악하기 그지없었으나.
“흐극! 끄으윽. 웩!”
눈물, 콧물을 흘리다가 헛구역질을 하는 것을 보면 뭐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상대방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는 잘 모른다. 아직 사람이 맞는지도 확신하고 있지 않다. 사람과 닮은 외형을 가진 몬스터도 존재했으니까.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살짝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저건 사람 팔이 아닌데?’
굵은 혈관이 꾸물거리는 오른팔이 눈에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깡마른 체구와 달리 오른팔만 비대하다. 색깔도 거무튀튀하고 피부 위로 돋은 핏줄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팔뚝을 타고 올라오는 핏줄이 목까지 이어진다.
피를 삼킬 때마다 천천히 핏줄이 옅어진다. 아마 피가 부족해서 생긴 변화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자세한 건 살펴보면 되겠지.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즈
저항감 없이 권능이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추출해 냈다.
[미야]
-92층의 중립 NPC
-뱀파이어에게 물렸습니다.
-변이가 진행 중입니다.
-숙주의 피가 짙습니다.
-자질이 깨어나고 있습니다.
-권능, 꽃 피는 핏방울(SS) 보유.
-공간 도약(S) 보유.
.
.
.
주르륵 떠오르는 정보.
아직은 사람이다, 아직은.
보아하니 뱀파이어에게 물린 거 같고. 저대로 놔두면 높은 확률로 세미 뱀파이어가 될 거다.
아니면 몬스터가 되기 전에 죽던가.
그보다.
‘자질이 깨어나고 있다?’
녀석을 문 뱀파이어의 피가 짙다는 건 또 무슨 소릴까.
피를 나눠 주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 피에 미쳐 있는 괴물이? 남의 피도 아니고 자기 피를?
게다기 권능 등급이 SS급이다. 스킬 하나도 S급이고. 미친 스펙이 아닐 수 없다.
아마 징조 없이 이곳에 등장한 것도 공간 도약 스킬을 이용한 거 같은데.
‘돌겠군.’
세계가 개판 되기 전에도 뱀파이어는 여러 미디어에 쓰인 단골 소재다. 그만큼 이런저런 소문도 많고, 설정도 많다만 실제로 등장한 뱀파이어에 대한 정보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사실상 인터넷에 떠돌거나 잡지 같은 데 올라오는 정보는 반쯤은 허구라고 보는 게 맞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어쩌면 이번에 뱀파이어에 대한 것들을 알게 될 기회일지도 모르잖아.’
설명이 자세하게 나오는 것으로 봐서 나보다 한참 아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완전히 경계를 풀지는 않을 생각.
“이봐.”
“히이익─!”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자 기겁하며 비명을 지르려 하기에 입부터 막았다.
반사적으로 비대화된 팔로 날 밀어내려 했지만.
-꾸우우우욱
그대로 낚아챘다. 잠깐의 힘겨루기가 있었으나 당연하게도 나의 승리.
힘이 좋다.
나나 탈모맨과 비교하면 한참 달리지만 아직 변이가 완전히 진행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면 나중에는 얼마나 위험한 괴물이 되려나.
어림짐작해도 내가 아는 세미 뱀파이어 따위와는 결이 다를 거 같은데.
눈물을 줄줄 흘리며 벌벌 떠는 것이 유약하기 짝이 없다.
흘낏. 소 사체를 바라봤다.
정정. 유약하지는 않은 거 같다.
“기껏 조용히 들어와서 소리 지르면 쓰나. 사람들 깨어나면 어쩌려고.”
상대방을 배려해 주는 말과 함께 해칠 생각이 없다는 제스처로 윙크를 해 주었다.
“으읍! 읍!”
어째 더 떠는 거 같다. 눈물도 펑펑 쏟아지고.
어떻게 하지? 사일런스 스킬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난 그런 게 없어서.
일단 뒤통수를 때려서 기절을 시킬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타이밍. 조금은 진정됐는지 떨림이 좀 잦아들었다.
날 잡았던 손의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려 주니 이제 좀 대화할 준비가 된 거 같았다.
철푸덕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이렇게 해야 경계를 덜할 거 같아서.
상대가 공격하면 위험한 자세였지만 이 정도 격차가 있으면 별 상관 없었다.
“이블아이라고 해. 그쪽은?”
“미야, 예요.”
이름이야 권능으로 알고 있었지만 굳이 내가 먼저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턱으로 소를 가리켰다.
“뱀파이어한테 물렸더군. 아직 변이 중이고.”
“그걸 어떻게!”
“멀쩡한 사람이 피를 뭐 하러 먹어. 그게 아니더라도 손이 그 모양일 리 없지.”
내 말에 미야가 황급히 손을 등 뒤로 감춘다.
워낙 커서 다 안 가려졌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손톱 참 흉악하네. 핏빛으로 번뜩이는 단검을 보는 거 같다.
저러니까 소도 한 번에 죽이지. 아마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 몬스터는 다 찢지 않을까.
“그동안 마을 돌아다니면서 가축들을 좀 잡은 거 같더라?”
“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최대한 참는다고 참았지만 피가 없으면 팔도 이렇게 되고 자꾸만 사람을 공격하고 싶어져서!”
“그럼 그럼. 그럴 거 같아. 뭐라 하는 거 아니니까 그러지 않아도 돼.”
저 가축들은 내게 아니라서.
내가 키우는 거였으면 딱밤 먼저 때리고 시작했을 거다.
당황해서 소리치는 입 사이로 조금씩 자라고 있는 송곳니가 보였다. 지금이야 송곳니가 좀 길구나 하는 정도지만 시간이 지나면 확실히 존재감을 내뿜겠지.
그보다.
‘진짜 사람을 물면 감염되는 게 맞구나.’
세미 뱀파이어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몬스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변이 중인 대상을 보는 건 느낌이 달랐다.
지금이야 우리 세계에서 발견된 뱀파이어 대부분이 기아 상태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등장해서 제압이 가능했지만, 온전한 상태인 뱀파이어가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제거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생길 거고, 만약 기어코 탈출해 도시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기는 진짜 난리 나는 거지.’
한솥밥 먹던 이가 어느 날 갑자기 세미 뱀파이어가 된다면 피해가 얼마나 커질지 알 수 없다.
이미 많은 사람이 90층대를 돌파한 시점. 나날이 재앙을 비롯한 괴물들이 밖으로 나가는 빈도가 많아진 만큼 뱀파이어 또한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어쩌면 내가 널 도와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잠깐 대화 좀 할까?”
놈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최악의 순간이라도 고통 없이 보내 줄 자신은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