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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562화 (562/740)

562화 괴물 사냥꾼

내가 이곳에 혼돈의 파편이 없을 거라 추측하는 이유가 있었다.

‘중립 NPC와 진짜 NPC가 섞여 있는 곳이야. 배경이 되는 세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곳이라는 거지.’

90층 전까지 겪었던 상위층처럼 말이지.

거인계, 연옥계, 정령계 등등.

혼돈의 파편이 탄생하거나 멸망시킨 세계는 7, 80층대의 테마였으니 굳이 90층대에서 반복할 이유가 없지.

이러한 근거를 통해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으니.

“이곳은 혼돈의 파편이 아니라 92층의 지배자의 영향을 받아.”

어디였더라. 70층대였던 거 같은데. 그곳에서 겪었던 천계도 비슷했다. 숭배자가 왕자로 있던 곳. 그곳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곳은 탑에 의해 그런 환경이 조성된 거고, 여기는 지배자의 의지에 의해 이런 모습을 가지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아마 자신의 살던 세계와 비슷한 환경을 탑에게 요구한 게 아닐까.

한 층의 지배자가 되면 그 정도 요구는 할 수 있을 거다.

짧게 턱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살던 세계의 모습을 가지고 올 수 있다?’

이거 혹하는 사람도 제법 있을 거 같은데?

멸망해 버린 세계에 향수가 있는 건 NPC들뿐만이 아니다. 탑에서 영원히 살아가고 싶은 탑 숭배자들도 노릴 만하다.

탑에서 오랜 세월 갇혀 있을 거 이왕이면 살아온 곳이 편할 테니까.

등반가도 마찬가지.

내가 왜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가. 이 빌어먹을 탑에서 영원히 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탑이 익숙해졌다 한들 난 현대인이다. 수도꼭지만 열어도 뜨신 물이 나오고, 문 근처만 가도 자동문이 열리는 곳.

터치 몇 번이면 스테이크도 배달되는 곳에서 살았다는 거다. 당연하게도 탑에 오랫동안 있던 등반가도 지구의 환경을 바라고 있지 않을까. 향수병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도 아니고.

다만 등반가라고 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당장 나랑 같이 올라온 상위 헌터들도 90층에 머물고 있잖아.”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그곳이 탑이더라도 상관없는 이들은 분명히 존재하니까.

워낙 사회와 단절된 탓에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걸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고.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가능성만 따지고 보면 안 될 게 없다. 그 모든 것을 계산하고 대비하는 건 불가능.

전체를 볼 수 없다면 눈에 보이는 거라도 파악하자.

발걸음을 옮겼다. 적막함 그 자체였던 산길과 달리 이곳은 사람 사는 느낌이 물씬 느껴지는 곳이었다.

지구처럼 전깃불이 들어오는 가로등은 아니지만 가스등이 켜져 있었고, 밝아오는 아침에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이 부지런히 불을 끄고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밥을 먹고 몸을 푼 농부들이 각자의 농기구를 들고 밖으로 나갔으며, 자전거를 타고 온 상가 주인들이 가게 문을 열었다.

탑에서 자전거를 보게 될 줄은 몰랐군.

마음 같아서는 좀 더 둘러 보고 싶었으나 구경은 나중에 해도 됐다. 기회도 많을 것이고.

‘어디서 정보를 모을까.’

술집? 아니면 정보상을 찾아봐야 하나.

묘하게 중세와 근대가 섞여 있는 느낌이라 갈피가 안 잡힌다. 어떻게 보면 내가 모르는 세계에 뚝 떨어진 거나 다를 바 없었으니.

밥부터 먹자. 숙소도 골라야 했다.

자경단에는 금방 떠난다고 말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 가능한 쓸 만한 정보를 얻은 다음 떠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호외요! 호외!”

내가 찾아다니지 않더라도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빵모자를 쓴 소년 하나가 깨어나기 시작한 마을을 뛰어다니면 종이를 뿌렸다.

쪽신문처럼 반으로 접은 포스터였는데 질 나쁜 종이 위에는 잉크도 제대로 마르지 않은 기사가 적혀져 있었다.

재밌는 게 없는 동네에서 회자될 만한 뜬소문과 루머, 동네 사람들끼리 수군댈 만한 불륜 이야기를 비롯해 누구네 목장에서 송아지가 새끼를 낳았다는 거와 같은 소소한 소식까지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적혀 있다.

이게 진짜 지역 신문이라는 건가. 호외라면서 아침부터 떠들고 다닐 만한 내용은 없어 보였으나.

“이건 좀 흥미가 생기는군.”

-반트 성의 괴물! 다시금 길거리를 피로 물들이다.

적당한 곳에 대충 걸터앉은 채 기사를 읽었다.

-반트 성의 괴물이 나타난 지도 2개월이 흘렀다.

-그의 이름을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 시체 조각가 칼리버. 그가 빼앗은 신체 일부는 몇 개던가!

-지금까지 희생당한 사람만 8명. 지독하고도 끔찍한 살인범의 행방은 묘연했고, 자그마한 단서조차 밝히지 못했다. 행방불명된 이들까지 합치면 그 수가 무려 15명을 넘는다.

-반트 백작이 엄밀한 수색을 내렸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으며…….

실을 수 있는 쪽신문의 면적이 작아서일까, 요약하다 못해 설명이 부족할 지경이었으나 대략적인 이야기는 알아볼 수 있었다.

“살인범이 나돌아 다니는 건가.”

행방불명까지 합치면 15명가량. 이 모든 일이 두 달 만에 벌어진 일이라는 거지.

결코 낮은 빈도가 아니다. 일주일에 2명씩 사라졌다는 거니까. 이 정도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질 정도다.

물론 사람은 많고 그중 내가 당할 확률은 낮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안전 불감증인 거고. 막말로 벼락 맞을 가능성도 0.001퍼센트가 안 된다고 하지만 맞으면 100퍼센트인 거 아닌가.

그걸 떠나서 분위기 자체가 흉흉할 거다. 눈뜨고 나니 주변 사람 혹은 동네 사람이 죽어서 발견되거나 사라졌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으니.

‘이게 조건이군.’

그런 생각이 가득 들었다. 다음 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경계를 허물기 위해서는 그만한 업적을 세워야 한다. 내가 키무아누의 게임에서 승리한 것처럼.

이곳에서는 이 범인을 잡는 것이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유일하게 가늠할 수 있는 포인트는 하나.

‘시체 조각가.’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어딜 가나 미친놈들이 꼭 있다. 남의 신체는 왜 훔쳐가.

그냥 가져가는 것도 아니다. 죽인 다음에 신체 일부 어딘가를 가져가는 것이지.

작게는 귀나 눈. 크게는 다리나 몸통. 얼씨구? 어떤 건 목만 떼 갔네?

기사 끄트머리에는 조심스럽게 이런 예상을 써 놓았다.

-시체 조각가 칼리버는 자신만의 예술을 만들려 하는 것이 아닐까?

반쯤은 동의하는 바이다.

희생된 이들의 돈이나 귀중품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몇몇 털린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맨 처음 시체를 발견한 이들이 훔친 것으로 드러났으니 살인자의 목표는 희생자의 신체, 혹은 그 행위 자체에 있었다.

신체 부위를 엮어서 뭔가를 만들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특정한 이유가 있어서 신체 일부를 가져가는 건지는 모르겠다.

이건 알아보면 되는 거지.

쪽신문을 주머니에 넣고 안으로 들어갔다. 반트 성으로 들어가는 건 기정사실. 그전까지 최대한 정보를 모을 생각이다.

그게 뜬 소문이든 목격자의 증언이든 뭐든.

“저곳으로 가야겠군.”

난 시장 안쪽, 녹슨 간판을 내건 여관으로 향했다.

* * *

여관은 시끄러웠다.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몰라 4일 정도 머무는 것으로 했고, 대금은 대충 내가 가지고 있는 약초로 대신했다.

물물교환이 가능하다는 것. 이런 걸 보면 또 중세의 느낌이 나는데 말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약초가 아니라 포션 같은 거로 계산할 걸 그랬다. 내게는 상점에서도 살 수 있는 흔하디흔한 것이었으나 이곳에서는 제법 값이 나가는 거 같았으니.

아무튼.

“그러니까 글쎄!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봤다는 거 아니야?”

“지랄 좀 그만하게. 어찌 사람이 입만 열면 헛소리만 나오는가. 그것도 병이야, 병.”

“진짜로! 간밤에 자고 있다가 소가 울어 대길래 나가보니까 웬 희멀게 생긴 괴물이 소의 피를 빨고 있었다니까! 피가 싹 빨려서 가죽만 남았다지 않았나.”

“짐승이면 뜯어먹고 말지 피를 빨아 어따 쓰나? 흡혈 박쥐가 떼로 몰려도 그렇게는 안 될걸세. 그렇다고 뱀파이어는 더더욱 아닐 거고. 어디 그놈들이 짐승을 빨던가? 사람을 빨면 빨았지.”

“허! 그러는 자네야말로 뱀파이어는 잘도 믿고 있군그래?”

“그야 뱀파이어는 실존하니까!”

“어디 그 대단한 낯짝이나 좀 봤으면 좋겠군.”

여관이라고 적혀 있기는 하지만 흔히 그러하듯 1층은 식당이었다. 이곳 같은 경우에는 술집이나 마찬가지.

식사 메뉴보다는 안주가 더 많았다.

‘맛은 별로 없군.’

조미료가 그다지 발달되지 않은 건지, 아니면 값싸게 메뉴를 내놓기 위해 안 쓴 건지 노린내가 고약하다.

그래도 소금 간은 되어 있어서 코가 마비되면 좀 나았겠지만.

‘난 마비가 안 되네?’

초인이 되면서 오감이 비약적으로 날카로워졌다. 시력도 더 좋아졌고 공기의 흐름도 피부를 통해 잘 느낄 수 있다.

맛도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으며 가장 먼저 피로해진다는 후각도 잘만 살아 있었다.

덕분에 짠맛 뒤에 숨겨진 날고기 향을 그대로 느끼게 됐지만.

그래도 불만은 없다. 적어도 여기서 먹는 건 몬스터의 고기가 아닌 짐승의 것이었으니까.

오히려 새롭다. 나야 중간에 요리 스킬을 얻었으니 상관없겠지만 대부분의 등반가는 모든 식량을 상점창에 의존하니까.

몬스터 고기는 소금물과 같아서 표류한 사람들이 바닷물을 먹다 죽는 것처럼 느리지만 분명히 독에 중독된다.

맛이 별로일지라도 독에 당하지는 않는다는 거지. 원하면 어디 밖에 나가서 사냥을 하거나 목장을 털 수도 있고.

-후룩

뜨거운 수프를 삼켰다.

나름 건더기가 있어 먹을 만하다. 혀를 굴려 가며 그나마 남아 있는 맛을 느끼며 주변에 앉아 있는 이들의 말에 집중했다.

“내가 보기에 뱀파이어가 성에 있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말이 안 되잖아? 영주가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데 지금껏 잡히지 않았다니.”

“허허, 이 친구 순진하구만. 무슨 뱀파이어가 도시에 있다고. 그냥 사람이 사람 죽인 거야. 모르는가? 사람이 가장 무서운걸?”

“그럼 자네가 봤다던 괴물도 사람이겠군. 입맛이 아주 특이한 사람.”

“그건 괴물이 맞다고!”

“염병도 정도껏 하게.”

어째 이 세계는 특이한 괴물들이 좀 있는 거 같다. 진짜 몬스터도 돌아다니는 세상인데 말이야.

뭐, 여기에서는 다른 짐승이랑 비슷한 취급일지도 모르겠다.

나야 지구에 없던 것들을 보는 거니까 몬스터라 하지 이들에게는 익숙한 놈들일 테니까.

반대로 흔히 보이지 않은 놈들은 알 수 없는 미스터리로 치부하고.

그나저나 피를 빨아 먹는 괴물이라. 묘사만 보면 이건…….

‘추파카브라 아닌가?’

괴담 중에도 있지 않은가. 밤중에 가축의 피를 빨아먹는 괴물, 추파카브라.

놀랍게도 지구에 있던 괴담이나 괴물들이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다. 하물며 이쪽은 아예 다른 세계고.

이런 괴물도 없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내가 아는 몬스터 목록 중에는 없지만.’

뱀파이어야 몬스터 사전에 등록된 만큼 정체가 확실했지만 추파카브라는 아니다. 그렇다고 아예 정보가 없는 건 아니고.

“남미랑 미국 쪽에서 봤다는 소문이 좀 있던 거 같던데.”

이것도 확실한 건 아니다. 나도 탑에 들어오기 전 몬스터 사전을 보며 공부하기는 했지만 멸망의 과도기에 접어든 만큼 어떤 괴물이 나타날지는 아무도 몰랐으니까.

상위층을 오르면서 나도 모르는 몬스터도 여럿 만났다.

수프와 딱딱한 빵.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와 채소를 볶아 만든 음식을 우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술에 취한 양반이 떠든 괴물과 반트 성에 있다는 살인마 시체 조각가 칼리버가 동일할 거 같지는 않다만.

-끼이이익

“우연치 않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 같군요.”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

난 성을 내며 맥주잔을 흔드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낯선 인물의 등장에 경계를 했지만.

“괴물 사냥꾼 이블아이라고 합니다.”

“오오! 괴물 사냥꾼!”

괴물 사냥꾼이라는 말에 그의 얼굴이 활짝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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