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561화 (561/740)

561화 92층

[92층에 진입합니다.]

[가장 인접한 지역으로 이동]

[92층-반트 성에 입장합니다.]

91층의 경계 끝, 그곳을 지나자 알람과 함께 광경이 바뀐다.

내가 있던 91층이 초원에 마을이 듬성듬성 있었던 것과 달리 이곳은 좀 더 건조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사막이나 황무지는 아니고 기후 자체가 조금 건조한 느낌?

폭발 몇 번 일으키면 불이 활활 타오르지 싶었다.

‘첫인상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군.’

어디 불타 버린 마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몬스터가 사람을 뜯어먹고 있지도 않았다.

운이 나쁘면 혼돈의 파편이나 그런 놈들과 바로 마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별 게 없네.”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은 그리 크지 않은 산이었으니까.

동산이라기에는 좀 컸으나 부지런히 걸으면 1시간 내로 정상에 설 만한 높이였다. 내가 있는 곳은 큼지막한 바위와 돌이 깔려 나무가 없는 장소.

눈에 들어오는 광경으로 봤을 때 산 중턱 부근이 아닐까 싶었다. 나쁘지 않다, 다른 곳에 떨어졌으면 주변 상황을 보기 위해서라도 높은 곳을 찾으러 돌아다녔을 텐데.

그냥 파이어 밤을 터트려 위로 올라가도 되기는 하지만 폭음이 워낙 커서 혹시 모를 적들의 시선을 끌게 된다.

“저기가 반트 성인가.”

난 저 멀리 보이는 성을 바라봤다. 투박하지만 튼튼해 보이는 성벽과 그 위에 보이는 저택.

중세 영지를 떠오르게 하는 곳이었는데.

“진짜 중세 느낌이 맞는 거 같단 말이지.”

“그에에.”

저기 농부로 보이는 이들이 밭을 갈고 농사를 하는 것을 보자니 정말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반을 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세계를 봐서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한 걸음만 가면 불구덩이에서 눈보라 치는 곳으로 넘어가는 정령계보다는 상식적이지.

물론 이곳에 있는 이들이 정상적인지는 두고 봐야 아는 일이지만.

그나저나.

‘마그마 요정은 다른 곳으로 떨어진 모양이군.’

같이 반트 성 어딘가로 이동된 건지 아니면 다른 92층으로 전송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91층이 여러 개라고 들었다. 그럼 92층도 여러 개겠지. 아니, 그게 맞을 거다.

이곳으로 넘어오기 전 알리오스가 해 준 말에 따르면 90층대는 하나의 커다란 대륙이다.

변방에서 시작해서 중앙에 있는 99층으로 향하는 형식. 변방일수록 더 넓은 땅덩어리를 가지니 중앙으로 갈수록 같은 층의 개수도 줄어들 거다.

머리를 긁적였다.

90층대는 혼돈의 파편이 있는 곳. 그것과 상반되게 굉장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99층로 향하는 것이 최종 목표니까. 어떤 과정과 경로를 선택할지는 본인의 몫이었다.

차라리 다른 층대에 있을 때처럼 분명한 목적이 있으면 편할 텐데.

몬스터 몇 마리를 잡아라. 멸망을 부추기는 세력을 없애라. 이런 식으로.

이제 어쩔까.

어쩌긴 뭘 어째.

“가 봐야지.”

망설임 없이 발을 옮겼다.

혹시나 싶어서 다른 곳도 살펴봤지만 사람의 흔적이 보이는 곳은 저곳 하나였고, 92층의 이름이 반트 성인 만큼 결국 위로 향하려면 성으로 들어가야 한다.

무작정 들어갈 생각은 없다.

최소한의 준비는 필요할 테니까.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 이곳은 어떤 분위기인지 한번 봐 보자.

* * *

이곳은 지구의 중세와 같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공통점은 있었다.

영주가 있는 내성. 그 밖에 위치한 외성. 외성 너머로 나가면 개척 중인 땅덩어리와 규모 작은 마을이 있다.

더 멀리 나아가면 다른 영지도 있다는 것 같다만.

‘거기까지 갈 일이 있을진 모르겠군.’

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혹시 아는가, 다른 영지도 경계에 막혀 있을지. 직접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밤에는 조용하네.”

가로등이야 당연히 없겠지만 모닥불이나 횃불 같은 것도 안 보인다.

땅에서 올라오는 빛이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공기가 유독 좋아서 그런지 밤하늘의 별이 선명하다.

혹시나 내가 아는 별자리도 있을까 한참을 쳐다봤지만 이내 눈가를 문지르고 시선을 돌렸다.

산길에서 벗어나 길을 따라 움직인 것도 잠시. 관리가 안 됐는지 흙길만 이어졌고 마을도 따로 보이지 않았다.

있었으면 그곳에 들러 소문이라도 들어 보려 했는데. 어째 심심할 정도로 평범했다.

중간에 몬스터와 산짐승을 마주치기야 했지만 그거야 뭐, 탑에서는 일상이니까.

그래도 성과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미묘하군.”

말 그대로 미묘하다. 비록 마을은 찾지 못했으나 사람들이 오가며 버리거나 떨군 물건들을 몇 개 볼 수 있었다.

중간에 야영을 하다가 몬스터한테 당했는지 반쯤 썩은 시체 일부도 봤고.

바닥을 굴러다니는 물건 중에 몇 가지를 주웠는데.

“냄비. 부싯돌. 이건 가스등 같고. 제법 깔끔하게 만든 은수저. 태엽시계도 있군.”

비록 찌그러지고 부서져 쓸 만한 물건은 아니었으나 대략적인 문명 수준을 파악할 정도는 됐다.

이걸 흘린 이들이 잘사는 집 자제거나 행상인인지 농부와 같은 일반인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중세와 근대가 뒤섞인 듯한 느낌도 들었다.

여기, 유리가 깨진 태엽시계만 봐도 그렇다. 상당히 정교하게 만든 물건이다. 지구도 태엽시계의 역사는 중세까지 올라간다고는 주워듣기는 했는데.

‘이렇게 시간에 맞춰 숫자에 빛이 나지는 않지.’

마법적인 처리도 되어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럴 수 있다.

마법이라는 조건이 붙은 이상 내 상식 속의 발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테니까.

중요한 포인트는 이거.

“이런 물건이 양산품으로 나왔다는 거야.”

자고로 귀족이나 부자들이 사용한 거였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거다.

그러나 시계에 사용된 마나석은 대충 봐도 싸구려였고, 공장에서 찍어 낸 듯 단순한 제품 번호가 달려 있었다.

재질도 특별할 것이 없었고 따로 만든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지도 않았다.

이 정도 물건은 아무렇지 않게 쓸 정도의 환경은 된다는 거겠지.

하기야 뭐, 등반했던 곳 중에는 로봇이 튀어나오던 곳도 있었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부지런히 걸었기 때문일까, 해가 뜨는 시점에서 바튼 성에 가는 길목에 위치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 입구를 지키는 이들이 보인다. 영지 성이 아닌 마을이니 병사나 경비대는 아닐 거고 자경단에 가까울 거 같은데.

“호오.”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에 시선이 갔다.

3명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는데 앞에 선 2명은 각각 가죽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팔뚝만 한 검을 찬 채 창을 들고 있었다.

무장 상태가 양호한 것만 빼면 특색 없는 모습.

내 눈길을 끈 건 그 뒤에 그늘에서 한쪽 어깨를 벽에 기댄 녀석. 아무래도 자경단에서 짬이 찬 선임으로 보였는데.

‘총이라.’

녀석에게는 총처럼 보이는 물건이 있었다. 일자형 개머리판에 기다란 총신.

장식으로 붙어 있는 물건과 미미하게 빛나는 마나석은 지구의 것과 달랐으나 전체적인 디자인은 소총이었다.

탄창이 따로 없는 것으로 봐서는 화승총에 가까운 물건이라고 해야 하나.

소중하게 관리했는지 손이 타서 반질반질해진 나무 개머리판과 색이 벗겨진 손잡이와 달리 옆에 붙은 은장식은 산화되지 않고 반짝였다.

다른 귀금속과 달리 은은 관리를 잘하지 않으면 금방 산화되어 녹이 낀다. 저 정도면 은 전용 세척액으로 닦았다는 것.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정보.

‘짬이 찬 녀석이 들고 있는 것으로 봐서 이곳도 총이 일반적인 무기보다 위력이 강해. 한 놈만 들고 있고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게 구하기 쉽지 않아 보이고.’

적어도 길 다니다가 총 맞을 일은 많이 없을 거 같다.

차라리 잘됐지. 마법이나 스킬 같은 거면 몰라도 일반적인 총기류는 맞아도 상관없다.

일반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난 보호 스킬이 사기적이라.

아무튼.

“거기, 멀뚱히 서 있지 말고 검문받아야지?”

“짐이 없는 게 상인이나 이주민은 아닌 거 같고. 이곳에 온 목적이 뭐냐.”

내가 가만히 서 있자 살짝 짜증이 났는지 앞에 선 두 명이 창을 흔든다.

뒤에 있는 놈이 길게 하품을 하는 것으로 보아 야간조로 보초를 서다 교대를 기다리는 거겠지.

나도 굳이 녀석들의 신경을 긁을 생각은 없다.

“반트 성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들르려고 왔습니다. 조용히 있다 갈 생각입니다. 하하.”

가볍게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자고로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하지 않던가.

“요즘 밖에 몬스터가 종종 나돌아다닌다는데 겁도 없군.”

“이 시간에 온 걸 보면 밤에 길을 걸은 거 같은데 말이야.”

마을 자경단치고는 눈썰미가 좋네. 군기도 어느 정도 잡힌 거 같고.

“제 한 몸 지킬 정도는 돼서 말이죠.”

툭. 허리에 찬 검을 두들겼다.

틀린 말은 아니다. 진짜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수준은 아니거든.

“밤길을 뚫고 혼자 걸어온 실력자라. 이거 수상하군. 크흠. 우리도 마음 같아서는 그냥 보내 주고 싶지만 이것도 일이라 수색을 좀 해야겠어.”

“그렇지. 그렇지. 괜히 이상한 녀석 들여보냈다가 사고 치면 털리는 건 우리라서. 뭐라고 해야 하나. 선량하고 올바른 사람인지 검증이 필요하달까.”

슬쩍 앞으로 나온 녀석이 헛기침을 하며 손가락을 비빈다.

이건 어딜 가나 비슷하구만. 적당히 성의를 보이라는 거다. 하는 짓이 자연스러운 것이 일종의 관행인 듯한데.

살짝 곤란하다. 내가 이쪽 화폐가 없어서. 어딜 가나 금은 가치가 있으니 금붙이 하나를 내미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랬다가는 이런저런 소문이 날지도 모른다.

금덩이를 아무렇게나 뿌리는 사람이 혼자 다닌다고.

차라리 오는 길에 산적이라도 만났으면 돈이라도 탈탈 터는 건데.

“그냥 보내라.”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타이밍, 심드렁한 표정으로 뒤에 서 있던 고참이 둘을 불러세웠다.

“아침부터 뒷담화를 들으면 운수가 안 좋지. 척 보기에도 그냥저냥한 칼잡이는 아닌 거 같고. 들어가. 말했던 것처럼 조용히 있다 가고.”

그가 엄지로 뒤를 가리키자 잠시 시선을 교차한 자경단 둘이 옆으로 물러섰다.

의외의 호의에 고개를 까딱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곁눈질로 놈을 살피자 녀석 또한 날 응시하고 있다.

흐트러진 모습이었지만 총을 쥔 자세가 달라져 있다. 마음먹는다면 언제든 총을 겨눌 수 있도록.

호의가 아니라 경계였나. 괜히 싸우고 싶지 않은 건 놈도 마찬가지인 거 같았다.

눈이 좋군.

“여관부터 찾아볼까.”

녀석에게 신경을 끈 난 마을 내부를 바라봤다.

멀리서 봤을 때는 작은 규모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그리 작지 않다.

돌아다니는 사람과 소음만 들어도 최소 수백 가구는 살지 않을까 싶을 정도.

입고 있는 옷도 제법 정갈했고 색이 좀 탁하기는 하지만 염색된 의류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칙칙한 색이 편하기는 하지. 흙 묻어도 티도 덜 나고.

길거리에서 흙내와 짐승의 냄새, 오물의 역한 내가 풍겨 올라온다. 기묘한 조합의 악취에 코를 찡그렸지만 다른 이들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도 이놈들은.

‘중립 NPC로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곳도 아니고 90층대에서 만나는 중립 NPC라.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내가 상대하게 될 대상이 누구인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예상 안이기는 하다만.

‘이곳에는 혼돈의 파편이 없겠어.’

조금은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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