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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560화 (560/740)

560화 플레티넘

단 3개의 규칙만 존재하는 중립 구역.

그것도 지극히 개인적인 규칙이었으나.

“여긴 살 만하군!”

“대기하면서 얼마나 마음이 졸였는지 몰랐는데 말이야. 하하하하!”

“안전지대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군. 어찌 됐든 탑이 부여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의외로 NPC들은 만족했다.

다른 필드처럼 목숨을 거는 역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몬스터가 있기는 했지만 이곳에 머물 정도의 강자들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평화로운 곳.

이곳의 대표인 알리오스 또한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으니 각자 취향에 맞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여가를 보냈다.

‘뭐, 사람이 모이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기는 하다만.’

어딜 가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존재했기에 종종 시비가 붙거나 난동을 부리는 이도 있었으나.

“하여간 이 자식, 내가 사고 칠 줄 알았지!”

“그냥 쳐 내!”

단순한 다툼이면 모를까, 상식 밖의 사고가 일어나면 이곳의 주민들이 알아서 처단했다.

다들 높은 곳까지 올랐고, 멸망한 세계를 겪고 온 사람들이다. 괜히 분란 일으키며 혼란을 부추기는 놈들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

어렵사리 얻은 평화를 잃고 싶지 않은 거겠지.

당장 내 눈에 띈 탑 숭배자들도 슬쩍 수작을 부리다가 목이 날아갔으니 이 부분은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간혹 특출나게 강한 녀석도 있기는 했다만.

“예의가 없군. 예의가 없어.”

그런 놈들은 알리오스가 정리해 버렸다.

며칠간 이곳에 머물며 분위기가 안정되는 걸 보려 했는데 이 정도면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 같다.

지내면서 몇 가지 사실도 알게 됐고.

‘NPC들은 대기 시간이 있어.’

탑이 넓기는 하지만 100층까지 존재한다는 한계는 명확했다.

물론 서버에 따라 무수히 나뉘기는 하지만 그렇다 한들 오랜 세월 동안 멸망한 세계가 발생했으니 NPC의 자격을 얻은 이들은 많았고 당연히 그들이 머물 곳은 한정되어 있었다.

대충은 알고 있었다. 내가 죽이거나 완전한 역할을 뒤바꿔 버린 층도 존재했고 그 결과 이전에는 없던 NPC들이 새롭게 자리를 배치받았으니까.

당장 내가 쓸어버린 공간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뒤이어 오는 이들은 무혈입성을 하게 된다.

어떻게 엿을 먹일까 고민하는 탑이 그 모습을 지켜볼 리가 있나. 중요한 건 이거다.

‘대기 중인 상태에서도 어느 정도 염탐을 할 수가 있군.’

언제 어느 층으로 갈지 모르는 이들인 만큼 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내려 했겠지.

기다리는 동안 할 게 없으니 더 관심을 가질 건 뻔하고. 대충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를 엿듣고 있자니 더 확신이 든다.

여러 대화를 취합해 봤을 때.

‘의심하고 있었던 NPC들의 커뮤니티도 대기 NPC들과 연관이 있는 거 같아.’

이런 결론이 내려졌다.

추론에 더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상당히 신빙성 있어 보였다.

조용히 그들이 떠는 것에 주목했다.

‘나름 쓸 만한 정보를 얻었어.’

나나 다른 등반가들은 알지 못하는 소식도 어느 정도 들을 수 있었다.

저층이었으면 시스템에 막혀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겠지만 이곳은 90층대, 탑의 마지막 구간인 만큼 NPC들이 떠들 수 있는 것이 많았다.

대부분 쓸데없는 정보였지만 쓸모 있는 것도 있었으니.

“92층에도 유별난 놈이 있다는 거 같던데.”

“난 따로 소식 못 들었는데?”

“그럴 수 있지. 92층도 여러 개니. 올라온 것치고 오랫동안 해 먹은 등반가가 있다더라고.”

92층에 대한 소식이었다.

현재 난 91층을 클리어한 상태. 알리오스와의 약속도 있고 중립지대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머물고 있었으나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커뮤니티를 봤을 때 같이 올라왔던 상위 헌터 몇 명은 죽어서 안전지대로 돌아간 거 같았고, 멤버들 또한 아직 91층을 공략 중이었다.

하기야 내가 일찍 끝내기는 했다. 과정이 빡빡하기는 했지만 결과만 보자면 며칠 내로 클리어한 거나 다를 바 없었으니.

아무튼.

‘92층 중 한 곳은 등반가가 차지하고 있다는 건가.’

알리오스처럼 대표의 자격으로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직접 지배자가 된 건지는 모르겠다.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말하는 투로 보아 제법 오래 한 층에 머물고 있는 거 같았으니까.

최근에 들어온 등반가는 우리가 전부니 녀석은 이전에 위로 올라온 상위 헌터라고 봐야겠지.

“어떤 놈이려나.”

턱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후보군이 몇 있다. 루키 그룹과 요정 클럽. 로얄 나이트나 빅스타 길드에 속해 있을지 모르는 이들과 따로 소속이 없는 상위 헌터들.

그 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많지는 않다. 정말 많아 봐야 열댓 명?

대단하기는 하다. 어찌 됐든 90층대에 올랐다는 건 그만한 실력이 있다는 거니까.

반대로 생각하면 그런 이들도 더 이상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머물고 있다는 거지만.

이 정도면 됐다.

“가자.”

“이 정도면 오래 쉬긴 했지.”

나와 마그마 요정이 91층의 영역 끝으로 향했다.

이곳으로 온 지 약 20일이 지난 시점. 우리는 위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 우리를 배웅해 주는 건 알리오스와 페니.

“가냐?”

“가야지. 계속 있는다고 뭐가 되는 건 아니니까.”

“몸 건강하세요. 그리고 이거.”

심드렁하게 손을 흔드는 알리오스와 달리 페니는 큼지막한 보따리를 나와 마그마 요정에게 나누어 줬다.

“알리오스가 밤새도록 만든 음식이에요. 떠난다는 말을 듣자마자 준비하던 건데 저도 옆에서 도왔어요.”

“누가 밤을 새웠다고 그래.”

“부끄러워요?”

슬쩍 옆에 달라붙는 페니의를 흘낏 쳐다본 알리오스가 별말 없이 고개를 돌린다.

얼씨구. 입꼬리가 천장을 찍겠네.

괜히 계속 보다가는 속이 꼬일 거 같아 보따리를 챙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이곳에 머물며 요리 스킬을 전수했고 레시피도 꽤 알려줬다. 91층도 안정화됐고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

“아, 이블아이. 이거 받아라.”

그러 내게 알리오스가 뭔가를 던진다.

“이건?”

“우연히 괜찮은 보석을 얻었지. 세심하게 세공한 거다. 원래는 페니를 주려고 했다만 취향에 안 맞아서. 그냥 너 가지라고.”

녹색 빛을 띠는 엄지손가락 사이즈의 보석.

보석을 깎아 조각품을 만든 거 같았는데 정말이지 작은 부분까지 신경 쓴 악마 조각품이었다.

많고 많은 것 중에서 뭐 하러 악마를 고른 건가 싶었으나.

“아무래도 그놈들이 조각할 맛이 나더라고. 삐죽 튀어나온 게 많아서 그런가.”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냥 뿔 달리고 날개 달린 놈들은 워낙 독특하게 생긴 경우가 많아서 세공하는 데 재밌었던 것.

그만큼 살벌하게 생긴 물건이라 페니가 꺼리는 것도 당연했다.

혹시나 아이템은 아닐까 권능을 사용해 보자.

[절망하는 악마의 조각 보석(AA)]

-마계에서도 희귀한 보석으로 만든 조각상.

-뛰어난 세공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습니다.

-내포하고 있는 마기와 생생한 악마의 형상에 변이가 일어납니다.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이거 저주받은 거 아니냐고.”

“크흠. 악마들에게 주면 좋아할 거다.”

척 보기에도 신경 쓰이는 문구가 적혀 있다.

보석이 타고난 기운과 쓸데없이 뛰어난 알리오스의 세공 실력이 합쳐져 자연 발생한 아이템 같은데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 가늠이 안 된다.

일단 마기가 섞여 있으니 악마들이 좋아하기는 하겠다만서도.

‘그러고 보니 그걸 못 찾았네.’

91층을 클리어하는 와중에도 찾지 못한 물건이 있다.

잠깐이지만 내 권능에 저항한 마도구. 그것을 가지고 있던 녀석의 정체도 알아내지 못했고 마도구도 뺏지 못했다.

사실 혼돈의 파편인 키무아누가 가지고 있던 게 아닐까 의심했었으나.

‘아니야. 그놈은 그런 게 없어도 충분히 자신의 정체를 감출 수 있어.’

녀석의 특징상 그럴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게임이 진행되는 중에는 연금술사로 위장하고 있지 않았던가.

내 손에 죽고 나서도 별다른 아이템을 떨구지도 않았고.

아니군. 하나 떨구기는 했다. 91층을 클리어하면서 보상을 받기는 했으니까.

이곳의 지배자가 될 수 있는 권한과 상당한 양의 혼돈 수치. 카오스 박스를 추가로 받았었다.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랜덤 박스.

최악의 경우 새로운 혼돈의 파편이 나타날 수도 있어 함부로 열기에도 꺼림칙한 물건. 그런 게 어느덧 2개가 됐다.

‘이걸 어떻게 할까. 갖다 버려?’

잠깐 고민하기는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디 테러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위험한 물건을 아무렇게나 방치할 수는 없는 일. 일단은 가지고 있자.

혹시 아는가, 엄청난 물건이 나타날지?

이쯤에서 떠오르는 무언가.

[SSS급 권능, 차원 상인의 무자본 혜택이 번뜩입니다!]

릴카의 계승자가 되며 얻은 권능을 사용했다.

하도 쓸모가 없어서 까먹고 있었다. 난 그걸 알리오스에게 전했다.

“뭐지?”

“랜덤 박스. 그냥 심심풀이로 열어 보라고. 또 알아? 정말 괜찮은 게 나올지?”

“주니 받지.”

입꼬리를 올린 알리오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거면 됐다. 나와 마그마 요정은 91층 경계로 향했고.

[92층에 진입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일렁거리는 장막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 * *

축축한 공기가 머금는 동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한 공간이었으나 내부는 달랐다.

동굴을 뚫어 환기를 할 수 있었고 내부에는 고풍스러운 원목 테이블과 책장이 가득하다.

흡사 도서관을 떠올리는 공간, 그곳에 앉아 펜촉에 잉크를 묻히는 고블린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기껏해야 1성급 몬스터인 고블린이었음에도 풍기는 기세가 남달랐다.

그저 눈길을 주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느껴졌으니. 자그마한 덩치와는 다른 존재감에 주변 공기가 무거워진다.

“그래서, 놈은 어땠지?”

“기대 이상이라고 해야 하나. 혼돈의 파편을 잡은 건 이미 들었겠죠?”

고블린 앞에 단검을 던지며 놀던 이가 어깨를 으쓱인다.

그 모습이 장난스럽고 한없이 가벼웠지만 동굴에 모인 이들 누구도 나무라지는 않았다.

그저 침묵을 지킨 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그분이 눈여겨보는 자다. 보통 놈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더군.”

“가능하면 저도 좀 더 지켜보고 싶었는데 계속 있다가는 휩쓸렸을 거 같아서요. 와, 그때 그 폭발은… 가르티 님도 그곳에 있었으면 멀쩡하긴 힘들었을걸요?”

빙긋 웃음을 지어낸 남성이 가르티를 보며 양팔을 뻗었다.

아직 앳된 모습이 남아 있는 자의 이름은 패트. 탑 숭배자의 골드 등급인 자였으나 평범하지는 않았다.

90층대 밑에 있는 떨거지와는 격이 다른 자였으니. 가르티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으나 눈에는 스산한 빛이 맴돌았다.

골드 등급이라고 다 같은 등급은 아니었으며, 그 위의 다이아 등급과 비교한다면 한낱 반딧불에 불과했으니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숭배자 집단의 계급에는 한 가지 계급이 더 존재했다.

모든 숭배자의 위에 위치한 자를 제외하고 고작해야 3명 밖에 없는 등급.

워낙 소수기에 숭배자 증명패에 조차 적히지 않은 등급.

플레티넘.

책상에 펜을 끄적이며 형형한 눈빛을 내는 고블린, 가르티 또한 플레티넘 등급이었다.

종의 한계를 뛰어넘어 가히 영웅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 그가 패트를 바라봤다.

“행동거지를 조심해라. 네가 멋대로 까불고 다니다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까.”

“그건 모르죠. 여기저기서 들려온 정보랑 일치하던데요? 물론 마지막에 보여준 폭발을 놀라웠지만 뭐든 쓰기 전에 죽으면 아무것도 아닌 거니까요.”

자신감이 넘치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패기에 불과한가.

패기만 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가르티 또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91층을 염탐한 것은 훌륭했다. 이제 92층으로 향해라.”

“아무렴요. 바로 가지요.”

패트가 씨익 웃었다.

“적어도 93층까지는 오갈 수 있으니까요. 다음에는 녀석의 목이라도 선물로 가져오죠. 기대해요. 개봉 박두!”

가르티가 턱을 괴며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90층대에 사람이 너무 많군. 솎아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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