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8화 대표자 추천
한 층의 지배자가 될 수 있는 기회.
사실 말이 한 층의 지배자지 90층대에서 층은 영역 개념이다.
나야 91층이 키무아누가 있던 곳이었지만 모두가 이곳에 떨어진 건 아니다. 다른 91층에는 다른 누군가가 지배하는 곳이 있겠지.
아니면 아무도 지배하지 않은 곳이 있던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 새롭게 떠오른 선택지 때문이었다.
[91층의 지배권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지배자가 생겨나기 전까지 91층이 중립지대로 변경됩니다.]
[중립지대에는 대표가 생겨납니다.]
[대표가 관리권을 포기하거나 사망할 시 대상에게 지배권이 넘어갑니다.]
“중립지대라.”
이후 이어지는 설명을 봤을 때 중립지대는 그거다.
도전자가 없는 이상 특별한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곳. 관리하는 방향에 따라서 안전지대와 비슷한 곳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안전지대와 같이 회복 옵션이 달리는 것도 아니었고 몬스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혼돈의 파편이 있지는 않다.
다만…….
‘대표라는 것도 지배자랑 비슷한 구석이 있군.’
관리하는 층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어찌 됐든 관리자니까.
시스템에 의해 강제되는 규칙은 만들지 못하지만 권력은 가질 수 있다. 그것을 무시하는 건 힘들고. 왜냐.
[관리자에게는 추방의 결투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집니다.]
관리자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을 다른 곳으로 추방할 권한이 생긴다.
결투를 통해 상대방을 제압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힘만 충분하다면 막강한 권력인 건 변함 없다.
무력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내 생각에는 합당한 일이었다.
이곳은 탑. 괴물과 온갖 재앙이 판치는 공간.
관리자라 한들 무적은 아니다. 언제든지 도전을 받을 수 있고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으니.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무력은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했다.
“문제는 누굴 이곳에 앉히냐는 건데.”
누가 됐든 이곳을 관리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난 이곳을 벗어나 92층으로 향할 것이니까.
내가 있던 91층을 중립지대로 만드는 것은 결정했다. 적합한 사람을 찾는 것이 남았을 뿐.
머릿속으로 여러 후보가 스쳐 지나간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탑을 오르면서 여러 인연이 생겨서.
이 부분은 잠시 보류하고.
“애들부터 찾자.”
“그에에.”
난 발걸음을 옮겼다,
키무아누가 죽었다. 폭발의 여파에 휩쓸린 마그마 요정과 파하르의 생존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솔직히 장담은 못 하겠다. 나도 모든 것을 신경 쓰면서 싸운 건 아니라서. 그만큼 혼돈의 파편을 상대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스펙업을 이렇게 했음에도 정면으로 대결해서 반드시 이긴다는 장담을 할 수가 없다.
당연한 말이다.
‘99층에 올랐던 릴카와 킬더레스는 멤버를 꾸려 혼돈의 파편을 잡고 다녔다고 했어.’
그럼에도 모든 혼돈의 파편을 잡지는 못했고 결국엔 탑으로 들어와 NPC가 되었다.
99층에 오른 괴물 중의 괴물들이 말이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킬더레스가 얼마나 강한지. 당장 내가 사용하고 있는 마왕의 날개도 킬더레스가 남긴 것 아니던가.
몸에서 떨어져 나왔음에도 SSS급에 달하는 아티팩트. 본체는 얼마나 강할까.
거기에 릴카는…….
릴카는 넘어가자. 전투 관련해서는 전혀 모르겠다. 뭐라고 해야 하지.
“따지고 보면 릴카는 냥펀이랑 비슷한 느낌이라.”
각종 아이템과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것이 비슷하다. 물론 본신의 무력도 만만치는 않겠지만 직업이라던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생각하면 이쪽이 맞다.
탈모맨이야 킬더레스랑 비슷하고. 애초에 계승자다.
묘하게 릴카 파티랑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도 같고. 뭐, 따지고 보면 나나 핥짝이는 좀 별개인 거 같긴 하다만.
‘그러고 보니 릴카가 함께 돌아다녔던 사람이 더 있다고는 했는데 누군지는 말을 안 해 줬었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물어봐야겠다.
91층을 올라오면서 녀석과 가볍게 인사만 하고 넘어갔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데 너무 싱겁게 헤어진 거 아니냐 할 수도 있었으나.
‘90층대를 한 번도 안 죽고 올라갈 거 같지는 않단 말이지.’
처음부터 90층 안전지대로 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
시작은 막연했지만 이번 전투로 확실히 느꼈다.
죽을 수 있다. 어쩌면 한두 번 죽는 게 아니라 수차례 죽을지도 모르겠다. 비교적 전투에 특화되지 않은 녀석을 마주쳤는데도 이 정도다.
만약 전투 타입인 혼돈의 파편을 마주해야 한다면?
아니, 그걸 떠나서 탑 숭배자들까지 방해를 한다면?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91층에서는 숭배자들을 만나지 않았다. 내가 있던 곳이 유독 NPC 순환이 빨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끽하면 죽어 나가니 놈들끼리 뭉쳐도 언제 쓸려 나갈지 몰라서.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 아마 만나는 일이 더 많겠지.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확실하니까.
‘90층대 어딘가에는 숭배자들의 왕이 있다.’
그게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위로 향한다면 언젠가 만나게 된다.
지금까지 만났던 숭배자들과는 격이 다른 놈일 게 뻔했다. 탑 전역에 힘을 뻗치고 있는 것만 봐도 보통 놈은 아니겠지.
긴장을 늦추지 말자.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고 오감에 집중했다. 지금은 생존자를 찾는 게 급선무다.
작은 소음과 진동에도 귀 기울이며 수색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으에, 아아.”
“마그마 요정!”
“폭탄마!”
가늘게 들려오는 신음 소리를 듣고 잔해를 파냈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가득한 공간. 폭발의 대미지를 줄이기 위해 급속으로 용암을 굳혀 화강암으로 쉘터를 만든 모양.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역시 뛰어나다.
그렇다고 한들 모든 대미지를 없앤 건 아닐뿐더러 체력적으로나 마력적으로나 한계에 다 달았던 만큼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조금씩 흘리고 다니던 용암이 더 나오지 않는 걸 보니 내뿜을 수 있는 건 전부 내뿜어 막은 거 같다.
건조된 마그마 요정이라. 이건 보기 힘든 광경이군.
“죽는 줄 알았잖아!”
“악! 미안.”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울컥한 마그마 요정이 주먹으로 코를 때린다. 힘이 빠지긴 했어도 초인은 초인. 코가 시큰거렸지만 참았다.
“으으. 살아남은 건가.”
다행히 근처에 있던 파하르도 같이 챙겼는지 옆에서 웅크리고 있던 파하르가 살며시 눈을 떴다.
안색이 창백한 것이 마그마 요정보다도 상태가 안 좋은 거 같았지만 표정은 밝았다.
“혼돈의 파편을, 잡은 건가. 대단하군.”
“운이 좋았지.”
“단순히 운으로 잡을 수 있는 녀석이었다면 진작에 잡았다.”
“진짠데.”
솔직히 운이 좋았다.
놈과는 상성이 맞아서. 친구 칭호가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지는 몰랐지.
두 녀석에게 포션을 먹이며 몸을 회복시켰다. 듣자 하니 다른 이들은 폭발에 휘말려 몰살되었다고.
40명가량이었던 마을에서 생존자라고는 나 포함 3명뿐이라니. 극악의 생존율이었으나 그 원인 중 하나가 나였기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니지. 내가 문제가 아니라 키무아누가 문제지. 그 자식이 곱게 죽었으면 이럴 일은 없었을 테니까.
모든 원흉은 그 녀석이다.
“그에에.”
“아, 왜. 맞잖아.”
턱을 쓸어내리며 잠시 고민하던 덕춘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암만 그래도 그 녀석이 더 문제긴 했지. 그런 놈이 하나라도 밖으로 나간다?
‘객관적으로 말해 망할 거 같은데.’
물론 혼돈의 파편 한 명이 나간다고 지구가 바로 멸망하지는 않을 거다.
다만 조금씩, 순차적으로 무너져 내리겠지. 오지혁과 김소담이 있기는 하지만 둘만으로는 혼돈의 파편을 잡는 건 불가능하다.
둘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둘이 가지고 있는 혼돈 수치가 문제인 거지. 그래도 스킬이 초월됐으니 허무하게 죽지는 않겠다만 좋게 봐 줘야 잠깐 저지하는 게 전부다.
이 부분은 잠시 넘어가자. 바깥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모르니까. 생각보다 멸망이 별로 진척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니 난 이쪽에 집중하자.
‘탑에서 혼돈의 파편이 죽어도 언젠가는 되살아난다.’
91층의 지배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을 때 이런저런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중에는 혼돈의 파편이 다시 등장한다는 것도 있었다. 이곳에 대표를 세워도 탑의 의지에 따라 새로운, 혹은 죽었던 혼돈의 파편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더 까다롭다. 혼돈의 파편이 다시 등장했을 때 꺾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버틸 사람은 필요했으니까.
그래야 죽기 전에 대표 권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물러서기라도 하지. 괜히 나 때문에 엄한 사람이 죽을 필요는 없다.
여러 상황을 따졌을 때 생각나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파하르, 부탁 하나만 하자.”
“부탁?”
“이곳은 곧 중립지대가 될 거야. 혼돈의 파편인 키무아누가 사라졌으니까. 내가 지배자가 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난 92층으로 향할 거거든.”
“미리 말하지만 난 이곳을 관리할 수 없어.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이전에 있던 이들 수준의 NPC가 4명 이상 달려들면 질 거야.”
자기 객관화가 확실하네.
뭐, 맞는 말이기는 하다. 91층을 클리어하면서 함께하며 나름 친해지기는 했지만 대뜸 대표 자리라는 짐을 떠맡길 정도는 아니다.
그녀의 말마따나 대표 자리를 소화하는 건 힘들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신뢰는 있지 않은가.
“대표는 다른 사람이 될 거야. 그 사람을 도와줘. 음, 이렇게 말하기는 좀 뭐하지만 그놈 사회성이 좀 부족하거든.”
“이미 점찍어 둔 사람이 있나 보군. 네가 말할 정도라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겠지.”
내 말에 파하르가 가볍게 입꼬리를 올린다.
믿을 수 있다라. 믿을 수 있지. 성격이 좀 더러워서 문제지.
대표를 선출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생각했다. 이곳은 탑. 혼돈의 파편이 지배자였던 것만큼 지배자는 굳이 등반가가 아니어도 된다. 재앙이든 혼돈의 파편이든 NPC든 할 사람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
물론 상대방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킬더레스나 릴카는 안 된다. 둘은 따로 하는 일이 있으니까. 마찬가지의 이유로 프램버그의 지배자도 안 된다.
대표의 권한으로 함께 일할 인원을 몇 명 데리고 올 수 있다고 설명에 나와 있기는 한데 프램버그에 사는 드워프들은 수천 명이라서 말이지.
충분히 강하면서도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는 녀석.
때마침 적당한 녀석이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의 답을 기다리는지 여전히 메시지 창이 떠올라 있다.
“대표자를 추천한다.”
[대상을 지목하시오.]
[단, 상대방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탑에 올라오고 그리 오래지 않아 인연이 생긴 녀석.
델버튼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내 목숨을 가져간 녀석.
사회 부적응자에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밖에 없는 녀석.
“알리오스. 녀석을 대표자로 지목하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NPC 주제에 24층 설산을 자신의 영역으로 만든 괴물이자 99층에 오른 강자.
검 하나로 제국을 궁지로 몰고 사랑에 눈이 멀어 등반가도 아닌 여인을 탑으로 데리고 온 또라이.
동시에.
[추천 대상자, 알리오스가 갑작스러운 제안에 미간을 좁힙니다.]
“알리오스, 설산에서 나와서 내 부탁 좀 들어주라. 보석 세공도 좋은데 다른 일도 할 때 됐잖아?”
내게 빚이 있는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