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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556화 (556/740)

556화 태양처럼

화려함도 번쩍이는 날카로움도 없었다.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는 것처럼 부드럽고도 자연스러운 검로.

사선을 이어 목과 쇄골을 그어 버리는 일격은 인지하기 힘들 정도로 한 호흡에 이어졌고.

-서걱

지금까지 닿지 않았던 녀석의 목이 검에 베였다.

질긴 피부와 근육을 뚫고 뼈를 가르는 감촉. 혼돈의 파편 또한 근본은 유기물이라는 것을 체감하게 해 주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 100층에 도전했던 이가 혼돈에 잡아 먹혀 만들어진 것이 혼돈의 파편이었으니 한때는 괴물이 아니라 종족의 정점을 찍었던 인물이다.

검이 살을 뚫고 나오는 건 한순간.

-푸슉

뒤늦게 피가 쏟아져 나왔다.

매끄럽게 잘린 단면에 기울듯이 흘러내리는 목.

경악 어린 표정이 나를 마주했고.

-사아아아아악!

한 박자 늦게 놈이 변신을 했다.

아리타 블랙. 모아이 석상을 닮은 몬스터였는데 특징이 있다면 몸과 머리가 하나인 괴물이라는 것.

과감한 선택이었다. 몸을 포기하고 머리를 챙겼으며 그로 인해 대미지는 제로.

추가적인 공격이 들어오기도 전에 재빨리 다른 모습으로 모습을 바꾸었으니.

“단순 종족이 아니라 사람도 따라 할 수 있는 거 같군.”

그것은 한창 밤의 속한 이들과 싸우고 있는 마그마 요정의 모습이었다.

저 정도 능력은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임이 시작하고 처음 보여 줬던 연금술사의 모습도 그러하고, 방금 보인 델버튼의 모습 또한 종족이 아닌 개인의 모습이었으니까.

한마디로.

‘변신이라고는 하지만 정확히는 다른 종족으로 변하는 게 아니야. 본인이 알고 있는 대상으로 모습을 바꾸는 것이지.’

지금까지 싸우며 보여 주었던 드래곤과 요정, 각종 몬스터 또한 긴 세월 동안 지켜봤던 대상이었을 것이다.

변신은 그 대상에 대한 이해도에 따라 퀄리티가 정해지고.

봐라.

“이런, 어이없는!”

마그마 요정으로 변신했음에도 본체만큼의 완전한 힘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흘러내리는 용암. 자꾸만 찌그러지려 하는 갑옷.

91층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놈과 접점도 거의 없는 마그마 요정이었기에 완전히 따라 할 수 없는 거다.

델버튼의 힘과 외형을 온전하게 가져오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일 터.

‘자신보다 약한 대상이 아니라 동급 이상의 존재였기에 모든 걸 이해하지 못했던 거겠지.’

혼돈의 영향일 수도 있고, 아니면 델버튼이 녀석보다 더 강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마도 후자가 맞겠지.

‘혼돈의 파편이라고 다 같지는 않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거인계를 오를 때 봤던 델버튼의 위용을. 혼돈의 파편이 되기 전 보여 줬던 영웅의 진모를.

100층에 다다른 것은 같았으나 그 과정과 경험은 전혀 다른 것이니까.

사람들은 말한다.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다고. 아무리 과정이 아름다워도 결과가 없다면 그저 좋은 추억일 뿐 어떠한 변화도, 성과도 없다고.

하지만 난 생각한다.

‘결과가 같다면 중요한 건 과정이야.’

똑같은 것을 이루어냈다면 결과를 이루기 위한 토대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똑같이 91층에 있는 사람이라도 능력이 천차만별인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이곳이 종착지지만 누군가에게는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기에 생겨나는 현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위로 향한다.”

탑에 들어오고 목표는 하나였다. 비록 중간에 무한 코인을 얻어 강제적인 이유도 생겼지만 내가 원하는 건 하나.

정상에 오른다.

세상이 바뀌며 겪어야 했던 온갖 부조리와 폭력. 살기 위해 추악해지는 인간의 면모와 만연하는 불신. 그 와중에도 찬란했던 희생과 멋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 죽었다. 적어도 내 주변에 믿고 따를 만한 사람들, 같은 사람으로서 존경할 만한 이들은 모두 사라졌다.

용감한 사람이 가장 먼저 죽는다는 말처럼 다른 이를 위해 희생할 줄 알고 나설 줄 알았던 사람들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게 거지 같았다.

시간이 흘러 일상을 되찾은 척 살아가는 사람들이 상황이 바뀌면 어떤 모습을 취할까. 미끼로 학생을 던진 선생이나 민간인을 털어먹었던 군인.

자기만의 카르텔을 만들어 상식 밖의 기행을 펼쳤던 미친놈들.

지금도 밖에 있는 이들 중에는 그런 놈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섞여서 돌아다니고 있다.

선량한 척, 사회에 충실한 사람인 것처럼.

종말의 변곡점을 맞이한 세상에서 그들은 지금과 같은 모습을 유지할까.

아무도 모르는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변신이 아닐까.

그런 거에 비하면.

“넌 아무것도 아니야.”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런 힘을 가지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다른 모습으로 스스로를 바꾸고 싶을 만큼 힘든 삶을 산 건지, 스스로가 추악해서 바꾸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관심도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콰아아아아앙!

폭발을 일으켰다. 연달아 놈에게 다가가기 위해.

수차례 놈이 모습을 바꾸며 나를 저지한다.

맹독을 품은 전갈의 꼬리가 찔러 들어오고 거대한 골렘의 주먹이 내려친다. 벼락이 내려치는 듯하더니 그림자가 비틀리며 칼날을 휘두른다.

일일이 반응하기도 힘들 정도로 광범위하면서도 다양한 공격.

-콰지지직!

-뿌득!

쳐 낼 수 있는 건 쳐 냈고, 받아 낼 수 있는 건 받아 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검을 휘둘러 놈의 팔과 다리를. 가끔은 가슴과 목을 쑤셨지만 그때마다 변신해서 상처를 회복하고 다시금 달려든다.

전투력이 아니라 끈질김과 집요함으로 세상을 멸망시킨 놈인가.

인정한다. 잡기 힘들다. 그동안 만났던 혼돈의 파편과는 다른 의미로 상대하기 껄끄럽고 완전히 잡을 방법도 거의 없다.

-콰르르르르릉!

피할 곳 없이 사방에 폭발을 일으키고 뇌전과 냉결을 시켰지만 작은 틈만 있어도 빠져나가 살아남는다.

나의 체력과 마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갈되는 데 반해 놈은 지치지도 않는지 눈 깜짝할 시간이면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찾아온다.

맹렬하게 몰아붙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궁지로 몰리고 있는 건 나였을까.

‘아니, 놈도 지쳤어.’

드루이드로 변한 녀석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처들. 아무리 놈이라도 제한 없이 모든 대미지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마 내게 혼돈이 부족했다면 말이 달랐겠지. 충분한 타격을 입히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난 혼돈의 파편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은 혼돈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검, 네놈이 가지고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어찌하여 혼돈을 품은 것이냐!”

“그야 이미 한 번 잡았으니까.”

내 이름이 박힌 장비.

탑조차 인정해 버린 나의 검은 델버튼을 이기고 얻은 부산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도 탑 최고의 장인이자 프램버그의 대표가 직접 만든 물건.

평소에는 단단한 것 말고는 아무런 기능이 없었지만.

-카아아아아앙!

말도 안 되는 강도를 자랑하는 혼돈의 파편을 수십, 수백 번을 베어내고도 이 하나 나가지 않는다는 건 엄청난 장점이었으며 동시에.

-우우우우우웅!

이질적이기 짝이 없는 혼돈을 담아내는 것에도 탁월했다.

일반적인 장비로는 불가능한 일. 혼돈을 받아들이는 걸 넘어서 증폭시킨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혼돈 수치가 높아질수록 체감되는 능력. 애매한 등급의 스킬보다 혼돈검으로 한 번 쑤시는 게 더 효과가 좋다.

‘저 상처들도 스킬이 아니라 혼돈검에 의해 생긴 거야.’

몇 번이나 확인했다.

자신 있는 파이어 밤도, 애용하는 오로라 빔도.

초월해 버린 일렉트릭 쇼크와 프로즌 브레이크도 강하다. 충분히 놈에게 타격을 줬다. 많지는 않지만 짧은 순간 놈을 그로기 상태로 보내 버린 것도 있었다.

그럼에도 변신하면 그로 인해 입은 상처는 모조리 사라졌다. 유일하게 남은 부상의 흔적은 혼돈검에 베인 곳뿐.

-촤아아아아악!

날개를 펼쳤다.

풍압이 일며 놈을 붙잡는 동시에 앞으로 쏘아져 나가 검을 찔러 넣었다.

신성력을 내보내 녀석의 혼돈 일부를 흐트러트리고 마기를 통해 길을 열었다.

마기는 혼돈과 가장 닮은 힘. 뚫린 길을 따라 혼돈이 질주했고.

-구구구구궁!

마력이 폭발하듯 추진력을 더했다.

무려 4개의 에너지를 운용한 기법. 감각이 없다면 따라 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기예가 놈에게 펼쳐졌다.

여기에 권능과 스킬까지 힘을 보탰으니.

[S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찬란히 빛납니다!]

[검강]

[절삭(S) Lv.,MAX]

[영혼찢기(S) Lv.MAX]

[도축(S) Lv.MAX]

.

.

.

“키햐아아아악!”

놈의 몸이 수갈래로 나뉜다.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

수십 개의 파편 중 놈이 변신할 곳을 찾아라.

머리? 아니면 팔? 어디든 상관없다. 녀석이 사용하려는 신체의 일부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오감을 집중했으며.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번뜩입니다!]

빛이 반짝였다.

저 멀리 날아가는 귀 한 조각.

권능이 저곳이라고 답을 내준다.

아니나 다를까.

“죽어!”

마구 흔든 탄산음료 뚜껑을 열 듯 폭발적으로 몸을 재생성한 녀석이 내게 날카로운 손톱을 날렸지만 피하지 않았다.

내가 노린 건 바로 이 순간.

펠라인 세트가 일곱 빛깔 광채를 내뿜는다.

[아스트랄 레인보우(S)]

[안개 질주(S) Lv.MAX]

[망자귀환亡者歸還(SSS) Lv.2]

[독자무강獨者武强(SSS) Lv.3]

버프에 버프.

밤을 부르는 자, 악마 노역소의 대항자와 같은 칭호의 효과까지 겹쳐진다.

혼돈검이 있다 하더라도 이대로 가면 내 체력이 먼저 바닥날 것이다.

그렇기에 생각한 방법.

‘한 번에 몰아친다.’

[홍예참(SS)]

검이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놈에게 나아간다.

무지개가 이어지며 검로를 뒤쫓았으며 동시에 놈을 갈랐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니, 팔이 움직이지 않는 그 순간까지.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와 파워로 검을 휘둘렀다. 방금 전 일격은 우스워 보일 정도로 경쾌하면서도 파괴적으로!

“────!”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키무아누의 감정이 느껴졌다.

지금껏 없었던 일. 당연히 있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수많은 이를 무너트렸던 존재가 짓눌리는 광경.

무호흡으로 휘두른 검격에 팔다리가 뜨겁고 머리가 핑핑 돈다.

손바닥과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으며, 꽉 깨문 어금니에 턱이 부러질 것 같았으나.

-퍼석

-푸화아아아악!

찰나의 순간 수없이 많이 휘두른 검격을 이기지 못한 녀석이 한 줌의 핏물이 되어 흩어진다.

믹서기로 갈아 버린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의 모습. 하지만 방심하지 않는다.

이미 한계까지 몰아붙인 팔과 그것을 지탱해 준 코어 근육과 다리 근육까지 완전히 방전되었다.

근육이 파열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격동적이었으니.

그렇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모두 떨어진 건 아니다.

[파이어 밤(SSS) Lv.6]

[파이어 밤(SSS) Lv.6]

[파이어 밤(SSS) Lv.6]

.

.

.

남아 있는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다.

아스트랄 레인보우로 단 10초지만 10배로 강화된 위력.

절대 수치가 아닌 퍼센티지로 상승해 버린 파괴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으며.

-두두두두두

-콰아아아아아앙!

이내 모든 것이 뒤엎는 폭음과 진동이 일대를 쓸어버렸다.

작은 육편 하나까지 완전히 태우고 바스라뜨릴 홍염이 태양처럼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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