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화 익숙해지려나
브레스는 강력했으나 나름 버틸 만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칭호, 드래곤의 친구가 부정한 따라쟁이를 보며 격노합니다!]
[혼돈이 상대의 공격 일부를 상쇄시킵니다!]
내게는 칭호와 혼돈이 있다.
혼돈의 파편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일부 대미지는 혼돈으로 흘려보낼 수 있다는 것.
단순히 피해 내는 것이 아니다. 공격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것이지.
게다가.
[화기 내성(SSS) Lv.3]
[빛 내성(SSS) Lv.3]
[마법 무효화(S) Lv.MAX]
강력한 보호 스킬도 함께 발휘됐다.
탑에서, 더 나아가 탑을 오른 대부분의 존재들은 방어력보다 공격력이 더 강하다.
왜냐.
‘공격이나 다른 스킬들은 SS급 이상도 있지만 내성 스킬들은 S급이 보통 한계거든.’
내성 스킬들은 공들여 쌓는 탑과 같다. 스타트 등급이 그리 높지 않을뿐더러 높은 등급까지 올리기 위해서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S급이 최대치이고.
소수의 특수한 경우나 권능, 칭호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면 동급 이상의 공격에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나 또한 그런 차이점 때문에 나보다 강한 이들에게 한 방 먹여 줄 수 있었던 거고.
‘이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
하지만 혼돈을 가지게 되면서 내 상황은 달라졌다. 특히 90층에 오르면서 겪은 혼돈 구간 덕에 대부분의 내성 스킬이 초월해 버렸으니까.
특히나 정신 보호는 최대치를 찍었다.
“이 정도로 끝은 아니겠지?”
지글지글 끓는 대지 위에서도 여유를 내비칠 수 있었다.
놈의 얼굴이 굳어진다. 이번 공격은 놈에게 있어서도 강력한 것이었을 터.
“설마 그 자존심 높은 녀석도 네게 꼬리를 흔들었을 줄이야.”
“드래곤이 성질이 제멋대로라 그렇지 인정할 건 인정하는 놈이더라고.”
사실은 놈과 친해졌다기보다는 인정을 받은 것에 가까웠겠지만 자존심 높은 드래곤에게 있어 자신이 인정한 대상은 본인과 동격,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더 보여 줄 게 없다면 내가 가지.”
자세를 가다듬고 짧게 숨을 내뱉었다.
허벅지 근육이 팽창하며 놈이 있는 위로 솟구쳤다.
키무아누는 드래곤으로 변신한 만큼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헌터들이 가장 질색하는 대상이 뭐였던가.
‘하늘을 나는 녀석과 물속에서 헤엄치는 녀석.’
땅에서 자라서 땅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평생을 땅에 발붙이고 사는 게 사람인 만큼 내디딜 바닥이 없으면 즉각적으로 전력이 깎이기 마련이었다.
지구에 나타난 레비아탄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도 비슷한 이유겠지.
‘아닌가, 그냥 잡을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적어도 예전에는 그랬을 거다. 재앙이 나타나도 해결할 방법이 없었으니.
지금은 다르다. 오징혁과 김소담이 밖으로 나갔고 그 외, 쁘찡 연합 소속 인원들과 미국의 빅스타 길드, 로얄 나이트 일부도 밖으로 나갔으니까.
재앙 한둘은 쉽게 잡을 거다. 애초에 현재 인류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나간 거니까.
이거야 알아서 잘하라 그러고.
‘노리는 건 날개.’
난 검강을 둘러 길게 베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날이 한순간이 길어지며 놈을 가르려 했으나.
“하등한 종족의 검이 닿을 성싶더냐!”
키무아누가 더 높이 떠오르며 검격을 피해 냈다.
드래곤이 저래서 사기다. 덩치는 산만 한 것이 둔하지도 않다. 마법적인 영향이 있는 것도 있지만 피지컬도 말이 안 돼서.
거인족을 몸싸움으로 이길 수 있는 종족이 있다면 드래곤이 아닐까.
녀석 또한 그것을 아는지 허공에서 몸을 비틀고는 그대로 하강했다. 거대한 몸집과 무게에서 나오는 물리력은 가히 대단했고.
-휘이이이이익!
순간 몸을 회전해 길게 자란 꼬리를 채찍처럼 휘두르기까지.
저걸 정면으로 받는 건 무식한 방법. 괜한 오기로 맞았다가는 뼈도 못 추린다.
그래서 놈이 하던 것처럼 해 줄 생각이다.
-사아아아악
허공에서 빠르게 옆으로 빠져나왔다.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 파이어 밤을 사용해 밀려 나온 것도 아니다.
그저.
[날개 없는 천사의 왼쪽 날개(SSS)]
[마왕의 오른쪽 날개(SSS)]
“하늘을 날 수 있는 게 너뿐이라고 생각했냐?”
내가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를 사용했을 뿐이다.
펠라인 세트와 혼돈검. 라그나로크의 왕관에 이어 최종 장비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두 날개다.
-구구구구구구구구!
강렬한 신성력과 마기가 충돌하며 공기를 압박한다.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무장을 하지 않는다. 어지간한 선은 펠라인 세트만 입어도 해결할 수 있고, 이 모습은 솔직히 말해…….
‘너무 관종 같거든.’
누군가는 도긴개긴이라며 혀를 찰지도 몰랐지만 나도 최소한의 변명거리는 있어야지.
물론 부끄럽다는 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상충되는 힘을 동시에 써야 돼. 아티팩트가 빨아먹는 마기와 신성력도 보통은 아니고.’
극과 극의 성질을 가진 아티팩트를 몸에 연결해 쓰면 내상을 입기 십상.
그나마 나야 두 힘 모두 고루 다루었고 혼돈의 힘으로 중화가 가능하니 조절할 수 있었지만
빠져나가는 힘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만큼 강력한 힘을 내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촤아아아아악!
-카드드득!
검고 흰 날개를 한 번 퍼덕이는 것만으로도 놈과의 거리가 좁혀진다.
놈 또한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대항하려 했으나 내가 더 빨랐고.
“이노오오옴!”
단번에 날개 한 짝이 너덜너덜해진 녀석이 고함을 질렀다.
신성하고도 지독한 불길은 키무아누의 날개를 집요하게 갉아 먹었으며.
“목은 괜찮은 거 같네. 마음 같아서는 눈이 아니라 목을 날리고 싶었는데 말이야.”
날개와 함께 베어 낸 왼쪽 눈 안으로 마기가 탐욕스럽게 상처를 벌리며 파고들고 있었다.
짧은 찰나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격.
놈의 기동성을 없애기 위해 날개를 먼저 베어 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목을 날릴 거란 기대는 없었다. 놈이 바보도 아니고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곧장 작은 사이즈의 종족으로 모습을 바꾸었을 테니까.
‘장기전은 곤란해.’
단순 화력으로는 내가 앞지른다.
상성이 좋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놈은 온갖 변수를 보이며 각 종족의 특수하면서도 강력한 힘을 부리지만 넘을 수 없을 정도의 격차는 보이지 못하고 있으니까.
물론 이게 쉬운 상대라는 건 아니었다.
변신할 때마다 상처가 완전히 사라졌고, 하는 짓을 봤을 때 드래곤이 아니라 훨씬 작은 벌레 같은 거로도 모습을 바꿀 수 있을 거 같았으니.
즉,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은 채 어딘가로 날아갈 수 있다는 거다.
우연치 않게 날아온 파리 한 마리가 드래곤이 되어 도시를 불태우는 것도 과장이 아닐 테니까.
그야말로 멸망을 부르는 존재가 따로 없다.
내 눈에만 띄지 않았다면 말이지.
“더 변해 봐.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라고.”
허공을 가로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검강이 마기와 신성력, 마력과 혼돈을 품은 채 성질을 변화하며 칼날을 뿜어 댔다.
사방으로 터트리는 파이어 밤. 회피로를 차단하는 오로라 빔.
접근했다 싶으면 퍼져 나가는 일렉트릭 쇼크와 프로즌 브레이크.
그냥 하는 것도 아니었다.
[버프 다이스(S) Lv.MAX]
[5]
[명중! 명중!]
빗나갈 공격도 타격하게 만드는 버프와 함께 나를 수호하는 칭호와 스킬이 있었으니.
[칭호, 밤을 부르는 자가 번뜩입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칭호, 악마 노역소의 대항자가 날뜁니다!]
-거대한 악에 대항한 자.
-강대한 적을 상대로 버프를 받습니다.
-억압받는 자들의 지지를 받습니다.
[독자무강獨者武强(SSS) Lv.3]
영물 달칸을 잡고 얻은 밤을 부르는 자가 밤을 맞이해 힘을 발휘하고 있었고, 노역소의 악마들을 해방시키며 얻은 악마 노역소의 대항자가 강대한 적을 상대로 타오르고 있다.
홀로 키무아누를 상대하기에 발휘되는 독자무강은 말할 것도 없다.
이뿐일까.
“이제 그만 죽어라!”
내가 알지도 못하는 새로운 괴물이 된 녀석이 아가리를 벌린다.
어떤 종류일까. 종족이 맞기는 한 걸까 싶은 괴물이 쏘아 내는 광선은 실로 강력했으나.
“무지개 반사!”
[행우 스텟이 발동합니다!]
[무지개 반사(S)가 발휘됩니다!]
그마저도 펠라인 스킬과 행운 스텟에 막혀 튕겨 나갔다.
되려 공격한 본인이 당할 판이었으나.
“그럴 줄 알았지.”
영악하게도 작은 도마뱀 형태의 몬스터로 모습을 바꾸어 반사된 공격을 피해 냈다.
도약 도마뱀이었던가. 일정 거리를 텔레포트하는 괴상한 몬스터였으나 덩치가 작고 본신의 힘은 보잘 것 없는 놈이다.
이런 순간을 원했다.
‘놈은 변신한 대상의 힘 이상을 사용할 수 있어.’
강력한 종족으로 변하며 그들조차도 경악할 만한 힘을 보이지만 약한 종족, 벌레나 곤충 같은 것으로 바뀌면 그냥 강한 벌레가 될 뿐이다.
녀석이 여러 번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체급이 되는 종족으로 변신한 것도 이 때문이겠지.
난 그것을 눈치챘고 그래서 무리하면서까지 광범위하면서도 파괴적인 공세를 이어 나갔다.
‘한 번에 끝내야 해.’
그러지 않으면 곧장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상처를 회복할 테니.
물론 이것마저도 플랜 B에 해당한다.
“네놈,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일방적이리만치 공격을 당하던 녀석이 일순간 기세를 바꾼다.
위험하다.
본능적인 경고가 머리를 울린다.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위험 신호가 느껴졌고.
[혼돈의 파편, 키무아누가 다른 혼돈의 파편으로 변모합니다!]
[존재의 격이 엇비슷합니다!]
[완전한 모습을 따라 할 수 없습니다!]
혼탁하기 그지없는 검은 기류가 사방을 휘저었다.
연기인가 아니면 안개인가. 공기가 일순간 무거워졌으며 그 범위 안에서 싸우던 마그마 요정과 NPC들마저도 안색을 굳혔다.
“크헥! 켁!”
“우우욱! 이게 뭔!”
찰나의 방심이 죽음을 부르는 전장이었음에도 전투를 멈추며 토사물과 피를 게워 내는 이들.
목숨을 불 싸지르듯 날뛰던 파하르 또한 창백한 얼굴로 뒤로 물러났으며.
“으으. 이블아이, 속이 안 좋아.”
식은땀을 흘리듯 마그마 요정이 온몸에서 용암을 뿜어 댔다.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마치 진이 빠지듯 흘러나오는 것이지.
벽 틈에서 자라나던 끈질긴 생명의 잡초들도 빠르게 시들었으며 바닥에 고인 피마저 검게 오염되었으니.
[혼돈의 파편, 키무아누가 혼돈의 파편, 델버튼을 흉내 냅니다.]
온몸이 비틀린 채 완전한 변신을 이루지 못한 키무아누가 코와 입으로 피를 흘리며 입가를 비틀었다.
“녹아 없어져라, 건방진 등반가여.”
흉한 몰골을 한 녀석이 양팔을 벌린다.
가슴에서 흘러나온 검은 안개가 사방으로 퍼진다. 모든 생명을 증오하듯 썩히고 문드러지게 만드는 힘.
“역병의 안개.”
놈의 힘과 더불어 더욱 괴악한 힘을 내는 안개가 나를 덮친다.
펠라인 세트로도 막을 수 없는 강력한 저주와 질병이 피부를 녹이고 호흡기를 파괴하기 시작한다.
누구라도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칠 일격이었으나.
“이것 참 우연이네. 어쩜 나랑 인연이 있는 것들로만 골라잡는지. 크흥!”
난 코에 고이는 피를 뱉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내게 가장 많은 죽음을 선사해 준 이가 누군인가. 그 어떤 몬스터도 NPC도 아니다.
프램버그에서 만났던 델버튼. 거인족의 영웅.
그리고.
“그거 아나? 녀석도 나한테 한 방 먹은걸?”
유일하게 내가 잡은 대상이기도 했다.
그때야 뭐, 무한 코인을 이용해 내기에서 이긴 거긴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거인계를 등반할 때 검은 비를 정화한 경험이 있다. 역병의 안개가 태어난 시초와도 같은 재앙. 난 그것을 막아 냈었다.
-스스스스스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역병이 혼돈과 함께 정화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근육이 녹고 뼈가 삭으면서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으니. 오히려 깊게 숨을 들이켰다 내뱉었다.
아, 폐까지 타 버리는 이 맛. 아주 오랜만이야.
“어째서, 어째서 쓰러지지 않는 것이냐!”
“글세, 왜 그럴까. 이미 겪어 봐서 그런가.”
경악하는 녀석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뭐든 겪다 보면 익숙해지더라고.”
목이 날아가는 것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망설임 없이 놈을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