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4화 친구 덕
마을 전체를 뒤집을 것처럼 쏟아지는 용암의 쓰나미. 밤하늘을 밝게 비추는 수십 다발의 광선.
그 사이에 있던 이들은 죽음을 직관하고 무기를 내려놓았으나 모두가 예상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홀연히 등장한 존재. 이미 알고 있는 얼굴.
그 녀석이 팔을 들자 용암이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으며 오로라 빔이 궤도를 바꿔 엉뚱한 곳에 떨어진다.
단순한 스킬이나 기술이 아니다.
[혼돈의 파편, 키무아누가 규칙을 수정합니다.]
[역전의 기회!]
[반전이 없는 게임은 없는 법! 밀리고 있는 세력에게 지원이 들어갑니다.]
[지원자- 키무아누]
허공에 떠오르는 메시지.
역전의 기회라. 그래, 맞는 말이지. 판을 뒤집을 수 없는 게임은 재미가 없으니까. 역전할 수 있는 장치라도 마련해 둬야지.
이건 뭐, 그냥 지 입맛대로 바꾸는 거나 다를바 없지만.
아쉽게도 밤 소속 인원들을 쓸어버리는 건 실패했다. 뭐,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지만.
놈이 공격을 막아 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놈이 있는 주변 이야기일 뿐. 거리가 좀 있던 이들 2명은 그대로 휩쓸려 사망했다.
지붕 위에 서서 검을 돌렸다.
징글징글한 녀석. 이제야 정체를 드러냈네.
비록 이름은 달랐으나 얼굴은 알고 있었다.
“네놈이었구나?”
입가를 비틀었다.
키미우. 어떻게 보면 마을에 들어오자마자 봤던 녀석인데 설마 저 놈이 혼돈의 파편이었을 줄이야.
이걸 감쪽같다고 해야 하나. 소름 돋는다고 해야 하나.
뭐 저딴 녀석이 다 있지?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즈
권능을 발휘했다.
녀석의 정보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키미우]
-91층의 NPC.
-연금술사입니다!
이게 처음에 보였던 정보.
이상할 게 없다. 여타 다른 NPC랑 다를바 없는 내용이니까.
내용 어디에도 혼돈의 파편이라던가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마을 누구를 보더라도 혼돈의 파편이란 말은 없었지.
그래서 권능을 통해 놈을 찾아내는 것을 포기했었다.
지금은 달랐다. 놈이 어거지로 규칙을 바꾼 시점.
[키무아누가 규칙에 개입했습니다.]
[일시적으로 혼돈이 옅어집니다.]
아무리 놈이라도 본인이 정한 규칙을 함부로 바꿀 수는 없었다.
왜냐.
놈을 이루는 근간을 부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키무아누]
-혼돈의 파편.
-변신과 게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게 놈을 이루구 있는 두 가지.
변신까지는 예상했다. 지금까지 이곳에 있으면서 정체가 들통난 적이 없으니까. 내 권능을 속이기도 했고.
게임도 이상하지 않다. 이 망할 게임이 진행되는 것 모두 놈의 힘이었으니.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이 게임이라는 것도 놈이 살아왔던 경험과 개인의 성향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거야.’
델버튼이 검은 비를 맞으며 역병을 얻게 된 것처럼. 89층에서 만난 라프테가 자신의 잘못으로 동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강제적인 실수를 얻게 된 것처럼.
다르게 말하자면.
‘놈이 직접 게임의 규칙을 만든게 아니야.’
누구보다 이런 종류의 상황에 익숙하고 이해도가 높지만 구체적인 규칙을 일일이 짠 건 아니라는 뜻이다.
혼돈이란 그렇게 친절하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으니까.
놈이 혼돈의 파편인 이상 아무리 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규칙이라지만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럴 수 있었다면 진작 낮에 날 죽였겠지. 기회는 차고 넘쳤으니까.
“직접 모습을 드러내다니. 후회하지 않겠어? 키무아누?”
“…내 진명을 알고 있다라. 이전부터 느꼈지만 네놈은 자꾸만 날 어지럽히는구나.”
“그러게 잘했어야지. 사람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알아서 목을 내밀었으면 되잖아?”
앞으로 나아가며 입꼬리를 올렸다.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하지만 지금도 주변 상황을 체크하고 있다.
혼돈의 파편이 하나. 아직 살아 있는 다른 밤 소속 인원이 6명. 낮 소속은 나 포함 7명.
숫자는 맞다. 7 대 7이니까.
‘전력으로 생각하자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우리쪽 인원도 그렇고 밤 소속 NPC도 그렇고 지쳐 있는 건 같았지만 놈은 아니다.
지금까지 관전만 하다 이제야 전투에 참가한 거니까.
마그마 요정이 좀 더 여유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것도 힘들 거 같단 말이지.’
마지막에 사용했던 용암 덮기 스킬을 쓰면서 탈진한 거 같다.
더 바라기도 양심이 없다. 이미 제 몫을 해내 주었으니까. 생각보다도 더 잘해줬지.
옆에 있는 파하르도 여기저기 상처가 한 가득이다. 피를 많이 흘렸는지 안색이 좋지 않다. 중간에 합류한 이들도 멀쩡한 이는 없었다.
밤 소속도 상황은 비슷하다. 총공격을 하면서 체력과 마력을 많이 소모했으니까.
한마디로.
“그쪽은 부탁할게! 이놈은 내가 맡는다.”
저놈은 내가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
충분히 승산이 있다. 어차피 놈 또한 규칙에 지배되어 있는 녀석.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으며 아침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30분.’
등장할 거면 진작에 등장했어야지. 왜 지금 나타났을까.
“살아서 보자고.”
-콰아아아앙!
이유는 모른다. 가능한 오랫동안 게임을 즐기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다른 작업을 하고 있어 이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던 걸까.
내가 보기에는 둘다 아니다, 아마.
“네놈은 밤에 속하면 페널티를 받는 규칙이 있을 거야. 안 그래?”
“닥쳐라!”
빙고.
내 발언에 놈이 분개한다.
그렇겠지. 그런 제약마저 없었다면 놈이 밤에 전부 몰살시키는 것도 문제는 아니니까.
아이러니 하단 말이지. 어떤 존재보다 강한 게 혼돈의 파편이다. 그럼에도 자기 마음대로 날뛰지 못한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스스로의 존재 의미에 발목 잡혀 문제인 거지.
“그하압!”
곧장 내게 달려든 녀석이 그대로 주먹을 내지른다.
무투파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이런 뭐!”
놈의 덩치가 일순간 커지더니 그대로 나를 후려갈긴다.
온몸이 부서질 거 같은 충격과 함께 그대로 땅에 날아가 박혔다.
지금 놈은…….
‘거인이 됐어.’
비유적인 말이 아니다. 정말 놈이 거인이 되어 날 내리쳤다.
아마 놈을 이루고 있는 변신 특성 때문이겠지. 신체는 물론이고 종족까지 따라할 수 있나 보다. 어쩌면 그 이상도 가능할지 모르지. 권능으로 보이는 이름도 바꾸는 놈인데.
그럼에도 녀석이 하나 잘못 생각한 게 있다면.
“거인이랑은 질리게 싸워 봤지.”
거인이라는 종족은 강하다. 마법에 강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고 피지컬도 말이 안 된다.
우리 세계에서는 재앙이나 다를바 없는 몬스터를 맨손으로 찢어 버리는 이들. 그렇다고 약점이 없느냐. 그건 아니었다.
‘발목.’
그 강한 거인들도 유독 발목만은 약했다. 거대한 몸을 지탱하기 위해 부담이 많이 가서인지, 아니면 아킬레스건이라는 것이 단련으로는 강화할 수 없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만.
[칭호, 발목 수확자가 빛납니다!]
난 발목 자르는 데 있어서는 자신 있다.
콰아아아앙!
등 뒤로 파이어 밤을 터트려 몸을 일으키는 동시에 가속했다.
[검강]
[절삭(S) Lv.MAX]
검이 번뜩인다.
스쳐 지나가듯 놈의 두 다리 사이를 지나며 빠르게 횡 베기 두 번.
“크하아아아악!”
칭호의 효과까지 더해져 놈의 왼쪽 발목이 반쯤 날아갔다.
그대로 잘렸으면 좋았으련만.
‘혼돈의 파편이다 이거지.’
[혼돈이 칭호 효과 일부를 무시합니다!]
키무아누는 일반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 자체로 강대했으며 혼돈의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
일정 수준 이상의 혼돈 수치를 보유하고 있지 않으면 타격조차 줄 수 없는 괴물이 혼돈의 파편이다.
-끼기기긱!
급하게 발을 틀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그걸로도 모자르면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잘라 내면 그만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녀석의 회복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것.
상처가 빠르게 아물고는 있었지만 초재생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영혼 찢기(S) Lv.MAX]
검강에 절삭. 발목 수확자 칭호에 더해 영혼 찢기까지 함께 담았다.
S급 스킬이라도 중첩되면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내는 법.
놈 또한 다시 공격 받는 것은 위험하다 생각했는지 다른 모습으로 변신했다.
이번에는 요정.
순식간에 덩치가 작아지면서 내 공격을 피해낸다.
이건 뭐 묘기 부리는 것도 아니고.
“짜증 나네.”
작게 혀를 찼다. 공격을 피해서 그런 건 아니다.
재생력이 약한가 했더니만 변신을 하자 상처가 아물어 있다. 아무래도 변신하면 이전에 있던 상처는 사라지는 메커니즘 같은데.
‘저래서야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의미가 없어.’
다 죽어가는 상황이라도 변신 한번 하면 끝이니까.
확실히 놈을 죽이기 위해서는 변신할 틈도 없이 사망에 이를 만한 대미지를 주어야 한다.
“나와라, 망구!”
“끼아아아아악!”
망구를 소환했다. 거인과 마찬가지로 요정에 대한 것도 잘 안다. 종족 특성상 정신체에 가까워 부정한 영향을 받으면 치명타를 입는다는 것도.
상성이 이렇다면 망구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겠지.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정신계 스킬이 있으면 좋겠지만 난 딱히 없으니까.
…불현듯 치명적인 포즈와 구애의 춤이 떠올랐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에에.”
“쉿, 나도 인권이 있어.”
정말 절체절명의 순간이라면 쓰겠지만 지금 쓰고 싶지는 않다.
목격자가 많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어차피 시간을 끌면 우리가 이겨.’
놈도 결국에는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규칙에 지배당하고 있다.
급한 건 키무아누지 내가 아니라는 것. 공격에 회피할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빠르게 날 처리해야 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아는지 다시 변신을 한다. 기세 좋게 덤벼들던 망구가 한순간에 비명을 지른다.
“끼아아아아악!”
이번에는 천사.
장렬하게 신성력에 불타 바스라지는 망구가 원망 어린 눈으로 날 바라본다.
미안, 나도 바로 천사로 바뀔 줄은 몰랐지.
그나저나.
“뭐로 변신할지는 모르겠는데, 있으면 다 보여 주는 게 좋을걸?”
투웅.
몸을 날렸다. 녀석 또한 거대한 빛의 검을 만들어 응전했으나.
-치이이이이이익!
나 역시 검강에 마기를 담아 휘둘렀다.
상극인 힘이 맞부딪치며 스파크가 튄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강렬한 빛이 이는 것도 잠깐. 키무아누가 뿔이 돋아난 악마가 되어 내게 손톱을 겨누었으니.
[러브 앤 피스(SSS) Lv.3]
“이 무슨!”
“뭘 놀라고 그래.”
곧바로 신성력을 담아 반격했다.
녀석의 눈이 부릅 떠진다. 거인. 요정. 천사. 악마.
“내가 그 녀석들을 잘 알거든.”
그것도 아주 많이 잘 안다.
놈의 자랑은 변신. 그에 따라 다양한 종족의 힘을 쓸 수 있는 것. 더 나아가 혼돈의 파편 특유의 강점들을 모아 자신의 힘으로 쓴다는 것이었지만.
“나라고 그냥 탑을 오른 건 아니거든.”
키무아누의 장점은 내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사방으로 터트리는 파이어 밤. 달라붙기로 붙잡은 다음 되갚기.
드루이드로 변신하며 내 옆구리를 찌를 때는 안개질주를 사용해 피해 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과 권능 덕일까. 생각보다 쉽게 넘기는 거 같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녀석이 변신해 공격할 때마다 떠오르는 나의 칭호들.
[칭호, 거인의 친구가 당신을 지킵니다!]
[칭호, 엘프의 친구가 당신을 지킵니다!]
[칭호, 드워프의 친구가 당신을 지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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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종족을 흉내만 낼 뿐인 키무아누에게 당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그동안 쌓아 왔던 칭호들이 점멸했다.
놈의 손끝이 부러지고 검이 휜다. 혼돈으로 강화된 힘조차도 종족 전체의 의지 앞에서는 무딜 뿐이었고.
“뭐 이런 인간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녀석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입가가 비틀린다.
“그래. 어디 그 잘난 능력으로 이것도 받아 보아라.”
-쿠구구구구궁
놈의 몸집이 폭발적으로 거대해진다. 거인보다도 크게. 동시에 강렬한 기운이 폭사되었으니.
“드래곤의 힘도 견뎌 내는지 확인해 보겠다!”
그대로 브레스를 내뿜었다.
파괴력만 따지면 견줄 게 거의 없다는 것이 브레스.
당연히 그냥 받아낸다면 나도 위험한 공격이기는 했으나.
“그것도 있는데.”
[칭호, 드래곤의 친구가 번뜩입니다!]
내게는 드래곤의 친구 칭호 또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