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2화 반응을 보이겠지
밤이 찾아왔다.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피하고 싶은 순간이었으며, 누군가에게는 숨죽이고 있던 몸을 일깨울 시간이었다.
물론 난 후자였다.
애초에 어느 시간대에서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으니까.
“오늘따라 바람이 안 부는군.”
“그에에.”
평소에는 산들바람이라도 계속해서 불었는데 말이지. 마치 머지않아 피어오를 혈향을 감추고 싶은 것 같았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오늘 여럿 죽을 테니까.’
그게 누굴지는 모르겠다. 밤 소속도 낮 소속도 오늘을 계기로 다른 움직임을 보이게 될 거다.
한 가지 원하는 게 있다면, 나를 비롯해 마그마 요정이나 파하르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정도?
가장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 만큼,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슬슬 움직여야겠군.”
작전 개시 시간은 아침이 찾아오기 5시간 전. 난 미리 나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전면으로 나서는 건 마그마 요정과 파하르 두 명이다. 난 따로 할 일이 있다.
가장 사람이 없는 곳에 모습을 숨긴 채 때를 기다렸다. 지루한 동시에 신경을 예민하게 세워야 하는 시간.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주변에서 다가오는 자극마저도 무감각해질 지경이었으나 정신을 집중했다.
인내심은 이미 많이 길렀다. 기회를 노리며 웅크리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무작정 날뛰어 봤자 가장 먼저 죽게 되는 곳이 탑이었으니까.
“시작됐다.”
눈을 빛냈다. 저 멀리 불빛이 보인다.
평소였다면 보일 리 없는 불빛. 저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마그마 요정과 파하르가 작전을 시작했다는 뜻이었으니까.
밖으로 나가 불을 지핀 것. 촛불마저도 켜지 않고 모습을 숨긴 마을에서 캠프파이어나 다를 바 없는 불은 등대와 같았다.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선명히 보일 수밖에 없는 이정표. 밤에 속한 이들이라면 호기심으로라도 찾아올 수밖에 없는 신호.
이것만 해도 1단계는 성공이다. 캠프파이어를 피우기 위해 둘이 밖으로 나갔다는 거니까.
낮에 속한 이들은 밤에 은신처 밖으로 나가면 소속이 드러난다. 만약 둘의 소속이 달랐다면 불을 피우는 게 아니라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겠지.
즉, 둘 다 낮 소속이 확실하다는 뜻이었다.
“미끼인 건 뻔히 알아차릴 거고. 자신감 있는 녀석들이 얼마나 있는지 봐 보실까.”
여기저기서 시선이 느껴진다.
나를 향한 건 아니다. 한밤중 타오르는 불빛을 향해 몰리는 시선이지.
밖으로 나간 밤 소속 인원들은 물론이요, 긴장한 채 밖을 경계하던 낮 소속 인원들도 지금쯤이면 저쪽을 감지했을 거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적은 수도 아니다. 그만큼 무슨 일이 터질지 관심이 많은 이들이었느니까.
시작은 천천히.
간을 보듯. 혹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함인 듯 별다른 일은 없었다. 적어도 1시간가량이 흘렀을 때까지는 그러했다.
쉽사리 가지는 않겠지. 수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 함정이 있을 게 뻔했으니까. 동시에 마그마 요정을 봤을 테니까.
‘마그마 요정을 잡으려면 최소 4명은 있어야 돼.’
이게 내가 내린 객관적인 판단이다.
어디까지나 최소. 가능한 피해를 받지 않고 마그마 요정을 잡으려면 훨씬 많은 이가 덤벼야겠지.
녀석만 해도 그럴 텐데 파하르는 어떨까? 정면 대결에서는 마그마 요정보다 못할지 모르지만 암살에 특화된 실력자다.
혼전이 발생할수록 까다로운 대상이었고 그런 둘의 협력은 위험했다.
그럼에도 놈들은 가만히 있지 못했으니.
-쿠르르르르륵!
-콰아아아아악!
이건 명백한 도발이었기 때문이다.
올 거면 와라. 우리는 여기에 있다. 우리를 어쩌지 못한다면 더 이상 밤은 두렵지 않다.
낮에 속한 자들은 힘을 합칠 것이며, 밤에 모습을 드러내 서로의 정체를 확인할 것이다. 너희가 밤에 그리했던 것처럼.
섣불리 덤벼들었던 이 2명이 단박에 목숨을 잃었다. 땅에서 솟구친 용암이 전신을 녹여 내었고, 쾌속하게 움직인 파하르의 송곳에 목이 꿰뚫린 녀석이 뭔가를 뱉어 내며 땅에 엎어졌다.
이것은 시작.
-아아아아아아!
-없애 버려!
메아리처럼 놈들의 소음이 퍼져 나갔다.
저쪽은 제대로 한 건 한 것 같고, 이제는 내가 나설 차례인가.
파앗!
빠르게 땅을 박찼다. 몇 군데 포인트로 잡아 둔 곳이 있다.
* * *
한밤중. 본래 모두가 조용히 모습을 숨기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야. 저 전략을 보는 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전략? 내 눈에는 그냥 미친 것 같은데?”
“그야 그렇겠지. 넌 91층에 배정받은 지 기껏해야 40년 정도니.”
담벼락에 올라 앉은 NPC 2명이 저마다 떠들어 댄다.
“예전에 말이야. 이 지랄 같은 게임이 시작되고 많이도 죽었을 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나왔어.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냥 시원하게 한번 맞붙고 끝내 버리자고.”
“확실히 저렇게 나오면 서로의 정체는 단박에 알 수 있겠군.”
“맞아. 머리 싸움 따위는 의미가 없어진다는 거지. 이미 서로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그냥 싸우면 그만이거든.”
“그럼 좋은 방법 아닌가? 낮 소속도 그렇겠지만 밤 소속도 힘을 합칠 기회잖아?”
“그렇긴 하지. 정확히 말하면 우리에게 유리하지.”
씨익, 꽤 오랫동안 91층에 머무른 것으로 보이는 NPC가 입꼬리를 올린다.
“그때 왜 놈들이 실패했는지 알아? 별거 없어. 저 작전은 무조건 밤에 실행해야 돼.”
당연한 말이다. 밤이 아니면 머리 위로 소속이 떠오르지 않으니까.
“우리야 마음 편히 들이박으면 그만이지만, 낮 소속은? 절대 못 하지. 소란을 듣고 나서려 해도 거리가 멀 수도 있고 막상 나서려니 몸을 사리는 놈들도 있거든.”
“오늘 밤만 지나면 그만이라는 거군. 사람들이 그렇지, 결국 자기 목숨이 가장 소중한 법이야.”
킬킬거리며 웃는 놈들.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나도 이곳에 있다 보니 인간 불신이 샘솟고는 하거든.
그렇다고 놈들 말에 동의하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와아아아아아!
처음에는 둘이었던 마그마 요정과 파하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5명이 더 합류해 싸우고 있다.
우리 근처에 있던 이들. 혹은 거리가 있음에도 뚫고 찾아온 이들.
마그마 요정과 파하르가 쓰러지지 않고 분발하는 모습에 용기를 얻은 거다. 자신을 증명하고 정면으로 맞서 싸우려는 거다.
“뭐, 그때도 놈들은 쉽게 쓰러지지 않았지. 불이라는 건 한번 타기 시작하면 몸집을 키우는 법이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담벼락에 앉아 발을 까딱거리던 녀석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왜 졌느냐. 불길은 땔감이 없으면 금방 사그라들거든.”
-푸슉.
녀석이 장난스레 던진 칼날에 거점에 합류하려던 낮 소속 NPC 한 명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상당히 먼 거리였음에도 정확히 맞힌다.
상대 또한 보통은 아니라 허벅지에 박힌 칼날을 뽑아 내며 금세 몸을 일으켰으나.
“이런 빌어먹을! 저리 꺼져, 이 새끼들아!”
“어딜 가시나? 그냥 집에 박혀 있지, 어딜 가려고!”
“혼자서 저기까지 가려던 거야? 뭐 하러 그래? 어?”
잠깐의 찰나에 달려든 이들에게 당할 뿐이었다.
“봐. 결국 뭉치는 건 밤 소속이 더 빠르다는 거야. 놈들에게는 안된 일이지.”
“오오오! 과연 그렇군. 오래 살아남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
“그니까 내 말만 딱 믿고 따라오라고. 운이 좋은 거야.”
한 명은 우쭐거리고 한 명은 알랑거리고. 저게 뭐 하는 건가 싶다.
그냥 보고 있기도 역겹고 때마침 주변에 있던 이들도 사라졌으니 움직여 보실까.
-부시럭.
“거기 누구냐!”
“손 들어. 안 그럼 그대로 칼침을 쑤실 테니까.”
일부러 인기척을 드러내며 앞으로 나섰다.
평범하게 입은 후드. 펠라인 세트는 너무 눈에 띄어서 벗었다. 완전히 은신하고 있을 거라면 모를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굳이 필요가 없어서.
여기저기 골목을 기고 다녔기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으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네놈은?”
“이블아이?”
이미 여기서 내 얼굴은 꽤나 유명했으니까.
경계 대상 1순위, 가장 많은 밤의 소속을 죽인 자, 낮 동안 수차례의 전투를 벌인 미치광이.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나에게 붙은 별명이 이렇다.
워낙 할 게 없는 곳이다 보니 남 이야기 하는 게 일상인 만큼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만, 그만큼 나를 주의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어 좋았다.
“저 자식은 지금 죽여야 돼!”
“자, 잠깐! 잘 봐라, 소속이 뜨지 않았어.”
흥분한 녀석이 곧장 내게 덤벼들려 했지만 나름 고참인 녀석이 그를 말렸다.
그의 말마따나 난 소속이 떠오르지 않는다. 놈들도 마찬가지. 밤에 속한 이들은 따로 뜨는 표식이 없다.
순간 흔들리는 동공.
“설마. 설마 네놈, 밤에 속했던 거냐!”
“진짜 미친 놈이었구나! 본인 손으로 같은 편을 죽여?”
“오해다. 이건 다 큰 그림을 위한 연기였지.”
진중한 표정으로 양손을 들며 놈들에게 다가갔다.
“낮에 속한 이들의 믿음을 사기 위해서였어. 그 과정에 있어 희생이 있었다는 건 인정한다. 그래서 지금의 난 그 누구보다 낮에 속한 이들의 신뢰를 받고 있지.”
“그딴 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백 보 양보해 그럴듯한 작전이었다고 치자. 그래도 이건 너무 갔다고. 그러지 않아도 우리는 계획대로 잘했을 텐데, 이거야 원. 하필 등반가여서 뭘 알지도 못하고.”
녀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계획대로 잘해? 역시 놈들은 집단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개인이 아닌 우리라고 말하는 것만 봐도 그렇고.
“알다시피 이쪽 사람들이 등반가에게 호의적이지는 않더군. 규칙이니 뭐니 그런 것도 제대로 알려 주지 않고 말이야.”
좀 더 편하게 놈들에게 다가갔다.
“좋은 게 있었으면 미리 말해 줬으면 좋았잖아? 자꾸 덤비려 드니까 나도 마음 편히 밖으로 나갈 수가 있어야지. 안 그래?”
태연하게 거짓말을 내뱉으며 한 발 앞으로.
이제 거리는 짧다.
“후우, 그래. 그렇긴 하지. 쉽게 다른 사람을 믿기는 힘드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저 용암 쏟는 녀석이 날뛸 때도 넌 없었군.”
“오? 그렇군. 우리랑 같은 밤 소속이라서 자리를 피해 있던 거구나? 이제야 이해가 되네.”
알아서 오해를 해 주는 녀석들.
“까짓것 기분이다. 네 녀석 정도면 도움이 되겠지. 우리가 도움을 주마. 운 좋은 줄 알라고. 알았어?”
“맞는 말이야. 운이 좋아.”
-서걱.
난 내게 손을 내미는 녀석의 목을 베어 냈다.
찰나의 순간, 살기마저도 지운 채 그어 버린 검격에 미끄러지듯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고.
“이, 이런 개자식이!”
“너희처럼 멍청한 놈들만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꽈드드드드득!
뒤늦게 반응해 내게 손을 뻗는 녀석의 손목을 잡아 비틀며 놈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대로 파이어 밤.
-쿠구구구구궁!
최대한 손바닥을 압착해서 폭발이 다른 곳으로 새지 않게 했다.
뭔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른다.
화끈한 심장 마사지라고나 할까. 제대로 경계하고 방어구를 착용했다면 모를까, 기습이나 다를 바 없는 공격에 노출되면 놈들이라 한들 별 수 없다.
그러게 평소에도 조심하고 살았어야지. 아니면 맷집이라도 좋든가.
그나저나 정말 행운이다.
“이런 놈들만 있으면 참 편했을 텐데.”
깔끔하고 편하고 쉽게 당해 주고 말이야. 이전에 만난 놈들은 안 이랬는데.
가볍게 손을 털었다.
“이걸로 5명.”
해가 뜨기 3시간 전.
내가 해치운 밤 소속 인원의 숫자였다.
-쿠구구구구구궁.
저 멀리서 마그마 요정을 비롯한 낮 소속 인원들이 날뛰는 소리도 들린다.
낮 소속 인원도 적지 않게 당한 것 같지만 놈들 피해도 보통은 아니다.
이 정도 난리라면.
“혼돈의 파편도 반응을 보이겠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