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화 뭘 찾았길래?
강제된 전투. 누군가는 야만적이라 비난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폭력 또한 좋은 대화 수단이라며 박수를 칠지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면 적어도 세상이 개판이 된 이후에는 원하든 원치 않든 폭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탑 안에서라면 더욱더. 아무리 순한 NPC라도 셀 수도 없이 많은 전장을 거치고 살아남은 강자들이다. 필요하다면 싸운다. 내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면 더더욱.
-콰아아아아앙!
묵직하게 휘두른 검에 테이포드가 뒤로 밀려난다.
방어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파고들었다. 평소에는 강검보다는 빠르게 치고 빠지거나 빈틈을 노리는 식으로 싸우는 것을 선호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강한 인상.
등반가라고 얕볼 수 없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 줘야 했으니까. 언제 누가 나를 노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확실히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건들면 위험한 대상이라는 것을 놈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마그마 요정은 이미 그것을 해냈다. 무려 2명의 NPC를 잡아냈으니까. 나 또한 마찬가지.
밤에 속한 이들에게 경고장을 내민 거다. 날 노리려거든 그만한 각오를 하고 오라고.
치열한 공방 속, 테이포드가 이를 악문다.
“이이이익! 이딴 식으로 하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얌전히 있으면 무사하고? 떠들 시간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 텐데?”
-서걱
무겁게 휘두르던 검에 변주를 주었다. 비교적 올곧게 나아가던 검로를 순간적으로 비틀며 녀석의 손목을 그었다.
아쉬워라. 손을 잘라 내려고 했는데 상처가 얕다. 그래도 힘이 빠지기에는 충분했지만.
손아귀 힘이 풀리며 녀석의 검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손끝으로 겨누며 오로라 빔.
-찌유우우우웅!
오색 빛깔 광선이 테이포드를 덮친다.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증발시키는 강렬한 에너지. 직선적이지만 그만큼 관통력이 뛰어난 일격이었고 등급이 올라간 만큼 정면으로 받아내기에는 부담스러울 거다.
달리 말하면.
“옆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거지.”
-콰과과과과광!
왼쪽? 오른쪽?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양쪽 모두 파이어 밤을 터트렸으니까.
거대한 폭음과 함께 치솟는 열기. 주변에 있던 이들도 뒤로 물러날 정도의 파괴력이었고.
“크하아아악!”
그대로 폭발에 휘말린 테이포드가 괴성을 질렀다.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검강]
[절삭(S) Lv.MAX]
피가 쏟아지며 녀석의 왼쪽 팔이 날아간다.
일말의 자비도 없이 내지른 일격. 너무나도 매끄럽게 검을 돌려 녀석의 목에 휘둘렀다. 당연히 그래야 된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고도 의아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부드럽게.
“헙!”
-카자자자자작!
보통이라면 그대로 목이 날아갔겠지만 녀석 또한 90층대 NPC.
살짝 늦은 감이 있었으나 대응해 왔다. 눕듯이 상체를 뒤로 꺾는 동시에 발로 내 허벅지를 밀어냈으니.
아쉬워라. 조금만 빨랐으면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살가죽 조금 베어낸 것 말고는 성과과 없다.
‘확실히 강하긴 하네.’
슬쩍 몸을 내려다봤다. 펠라인 세트를 착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공격을 막아 낸 건 아니다.
애초에 방어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기도 했고.
놈 또한 밤의 소속이라 날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팔다리를 잘라 내는 건 가능하다. 어찌 됐든 죽인 건 아니니까.
그래서 그런지 테이포드는 최대한 나를 무력화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싸워 댔는데 보다시피 그리 결과는 좋지 않았다.
-꾸드드드득
잘려나간 녀석의 팔 단면이 꿈틀거린다.
이곳은 안전지대. 단번에 죽는 게 아니라면 몸은 저절로 회복된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팔을 재생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다만 안될 말이다.
-콰광!
발밑에 폭발을 일으켜 순간 가속. 그대로 놈을 덮쳐 넘어트렸고.
콰직!
땅에 비스듬히 검을 꽂아 넣었다. 이대로 작두처럼 검날을 밀면 녀석의 목이 잘리겠지.
녀석 또한 쉽게 당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품에서 단검을 꺼내 내밀었으나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단검이 목에 닿았음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의 손을 잡고 목으로 당겼지.
“뭐 해? 지금 안 찌르면 후회할 텐데?”
“이 정도로 하지. 서로 흥분한 거 같은데 이쯤이면 충분하잖아? 불만이 있는 거 같은데 이참에 풀지!”
어디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서로 쌓인 게 있어 치고받았고. 서로 목에 검을 겨누었으니 훈훈히 마무리 짓자. 이런 식으로 흐름을 만들려는 거 같다만.
“사람을 너무 말랑하게 보네.”
-꾸드드득
천천히 손잡이를 내렸다. 검이 점점 기울며 녀석의 목에 파고들기 시작한다.
주륵. 흘러내리는 선혈.
“이런 미친 녀석이! 그만두지 못해! 다들 보고만 있을 건가!”
녀석이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서 그를 돕는다는 건 한패라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
“3초, 이후 넌 목이 잘린다. 스스로를 증명해.”
손가락을 들었다. 마지막 기회. 녀석의 단검이 부르르 떨린다.
죽이고 싶겠지. 정말 미치도록 내 목을 꿰뚫고 싶겠지만 그럴 수 없을 거다. 놈은 낮에 살인할 수 없으니.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손가락이 접힌다.
테이포드의 눈이 흔들린다. 이제 마지막.
-콰직
손가락을 모두 접은 순간 팔꿈치로 녀석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머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는데 죽지는 않았을 거다. 조금 다쳤어도 뭐. 안전지대인데 침만 발라도 낫겠지.
설마 안 죽이고 기절시킬 줄은 몰랐는지 몰려 있던 이들이 입을 벙긋거렸으나 신경 쓰지 않고 프램버그에서 만든 포박 줄로 놈을 묶었다.
“지금 죽여서 뭐 합니까. 테이포드가 밤 소속인 건 이걸로 확정이니 잡아 두고 있다가 원할 때 처리하면 그만이죠. 오늘 낮은 다른 녀석을 잡는 데 쓰자고요. 이 녀석한테 따로 물어볼 것도 있고.”
꼼꼼히 몸을 묶고 전신에 시한폭탄을 설치했다. 상점창에서 산 아티팩트도 사용했고.
“구경만 하지 말고 도와줘요. 구속할 수 있는 스킬이든 아이템이든. 아니면 일부로 그러는 거예요? 얘 도망가게 두려고?”
“아, 아니지. 그건. 흠흠, 내 도와줌세.”
“구속구가 어디 있을 텐데. 잠깐만 기다려.”
내 눈치에 NPC 몇 명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다들 아는 거다. 나와 마그마 요정, 파하르는 한 팀이라는 걸. 그것도 발언권이 아주 큰 팀.
가장 활약하고 있는 만큼 우리에게 협조적으로 나오는 거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그럴 거다.
“그보다 자네, 방금 다른 녀석을 잡자고 하지 않았나? 그 말은 혹시?”
“아, 예. 처형대로 보내고 싶은 녀석이 한 명 있습니다.”
“오오오오! 그게 누군가!”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난 테이포드를 가리켰다.
어젯밤 테이포드는 종탑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마도구를 사용하는 녀석이 한 명 더 들어갔고.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를 확인하기는 했겠지. 누구냐고 물어볼 생각이다. 제대로 답을 할지는 모르겠다만 시간은 많고 밤이 찾아오려면 멀었으니.
“협조적으로 나오면 좋겠네요.”
서로 힘들지 않게.
* * *
결과적으로만 말하자면 테이포드는 입을 열지 않았다.
특별히 의지가 굳건하다던가 한 건 아니었고.
“살벌하기도 해라.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거야.”
대화를 몇 마디 하기도 전에 검은 피를 내뱉으며 죽었기 때문이다. 외부의 침입은 없었다. 다른 금제라던가 저주가 걸려 있지도 않았다.
아마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겠지. 정체가 들통난 시점에서 죽음은 확정적이었으니 가능한 편하게 가 버린 거다.
‘파하르가 말했었지. 시간이 지날수록 좀 더 과격해질 거라고.’
상황에 따라서는 상대를 고문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다.
아예 낮 소속 인원들이 들고 일어나 무차별적으로 테러를 가한 적도 있다고 했다. 어차피 밤 소속은 낮에 누군가를 죽일 수 없으니 일단 아무나 찔러 자신의 신분을 증명했다고.
반격당해서 죽으면 그건 그것대로 상대방의 신분이 확정되는 거니 괜찮다나.
미친 짓이다. 목숨의 가치가 바닥에 떨어졌으며 서로에게 날을 세우지만, 정작 이 게임을 만든 녀석은 뒤에서 웃고 있다.
놀아나면 안 된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단서가 아예 없지는 않아.’
혼돈의 파편, 루두라도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그나마 의심할 수 있는 건 다른 혼돈의 파편과 달리 외형적으로는 우리와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것.
동시에 권능이나 스킬 등을 이용해 정보를 획득해도 녀석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거였다.
어제오늘, 여러 일이 터지면서 마을에 있는 대부분의 NPC와 접촉할 수 있었다. 당연히 권능을 통해 정보를 살폈지만 놈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91층 한정으로 권능이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시스템과 혼돈의 파편의 규칙에 의해 이름과 같은 기본적인 내용을 제외하면 대부분 블락 처리된다.
여기까지도 괜찮다.
‘적어도 이름은 보이니까 루두라도라고 뜬 녀석을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루두라도.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가명 같다. 이름으로 상대방을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
‘루두라도’라는 이름도 룰 북에 적힌 메모로 알게 되었으니 신뢰성이 떨어지기는 했다.
아직 밤이 찾아오려면 5시간 정도가 남았다. 광장에 모인 이들이 저마다 떠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처형대로 보낸 사람은 없었다.
쓸 만한 증거가 나오지 않은 것도 있지만, 밤 소속 인원이 대거 사망하면서 어느 정도 여유를 찾았기 때문일 거다.
괜히 억측을 해서 같은 편을 없앨 수도 있는 거고.
나쁘진 않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는데.
‘뭔가 부족한 느낌이란 말이지.’
막연한 불안감인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걸리는 게 있는 걸까.
나 또한 정답을 아는 건 아니라서 확답을 할 수는 없지만 그건 안다.
‘밤 소속 인원들의 행동이 거침이 없어.’
어떻게 보면 조급한 거 같았고, 다르게 보면 자신이 있어 날뛰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어젯밤 놈들이 곧장 공격해 올 줄은 몰랐으니까. 조금 더 눈치를 보다가 활동할 줄 알았는데.
어제 덤빈 놈들이 유독 성격이 급한 거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마계 출신, 혹은 마기를 다루는 사람은 대략 10명.”
단순히 마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까지 합치면 더 많긴 하다. 어찌 됐든 이들 모두 최소 80층대를 넘어선 이들.
보유하고 있는 스텟은 진작에 999점을 돌파했다는 거다. 중간에 마기를 얻었다면 당연히 999점을 넘겼겠지.
내가 찾는 건 그게 아니다. 단순한 스텟을 넘어서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인물들. 마족이라면 당연히 잘 쓸 것이고.
‘마도구는 고유 성질이 있다고 들었어. 마도구 입맛에 맞게 마기를 다루어야 한다는 거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다.
밤에 봤던 마도구를 쓰던 NPC. 녀석을 찾는 유용한 단서다.
마음 같아서는 한 명씩 소지품을 확인해 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 남에게 자신의 아이템을 보여 줄 사람도 없거니와, 보여 준다 하더라도 인벤토리에 넣어 두면 알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직접 돌아다니면서 단서를 찾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마그마 요정은 뭐 하고 있는 거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질 않는다. 밤새도록 싸워서 피곤한 건가.
가능성은 낮으나 밤에 또다시 공격해 올 수도 있다. 그때를 대비해 낮에 체력을 회복해 두는 것도 중요하다.
거점으로 삼은 곳이 날아간 만큼 오늘 밤을 보낼 장소를 따로 물색해야 하는데.
머리를 긁적이는 타이밍.
“이블아이! 내가 엄청난 걸 찾았어!”
마그마 요정이 손을 흔들며 내게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