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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548화 (548/740)

548화 증명의 시간

조심스럽게 상대를 따라 건물 정문으로 들어갔다. 시야를 가리기 위함인가 담벼락이 꽤 높았고, 벽을 넘을 게 아니라면 정면에 나 있는 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나름 보안에 신경을 썼다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밖에서는 내부가 안 보이지 않나?’

방금 안으로 들어간 여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구를 통과했다.

안에 뭔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는 뜻.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시체를 치우러 간 게 아니라 여기가 본인 은거지인가? 물건을 깜빡해서 되돌아왔다던가 하고 말이지.

인기척을 없애고 조심스럽게 행동하기는 했지만 그것 자체는 이상할 게 없다. 혹시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은밀히 움직인 걸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 나도 몰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고 말이지.

됐다. 뭐든 들어가 보면 알겠지. 가만히 서서 머리만 굴려 봤자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

-끼이이익

은신을 풀고 당당히 문을 열었다. 일부러 녹이 슬게 만든 경첩이 소음을 낸다. 아마 누군가가 침입할 때 소리가 들리게 하기 위함이겠지.

벽을 부수고 들어올 게 아니라면 문이나 창문을 통해 들어올 테니까. 특이하게도 이 건물은 창문이 없다.

“누구냐!”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예, 하던 거 마저 하세요.”

자고로 사람은 뻔뻔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

마치 내 집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손을 내저으며 안을 살폈다.

‘깔끔해.’

집주인이 잠시 집을 비운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정돈된 공간이었다.

저기, 바닥에 엎어져 있는 시체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눈도 감지 못한 채 바닥에 엎어져 굳은 인물이 보였다.

아무런 외상도 없다. 권능을 사용했음에도 침입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고.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

“밤 소속이 죽었나 보네. 어젯밤에 놈들은 아무도 죽이지 못했어요. 그런 거 같죠?”

-스릉

혼돈검을 뽑으며 녀석에게 물었다.

난 상대방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건 저 녀석도 마찬가지. 서로를 신뢰할 수 없는 만큼 안전장치는 만들어 두고 대화를 해야지.

상대 또한 등 뒤에 숨겨 두었던 송곳을 꺼낸다.

흐음. 꽤 특이한 무기를 쓰네. 군더더기 없이 자세를 취하는 게 오랫동안 사용한 모양인데.

팔뚝만 한 길이의 송곳. 휴대성은 좋지만 창. 아니, 검과 비교해도 리치가 짧을뿐더러 찌르기에 특화되어 있어 베기와 같은 공격은 힘들다.

여러모로 분리한 점이 있다는 건데 굳이 사용한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있던가 특수한 처리를 해 뒀다는 거겠지.’

반질거리는 송곳 끝을 흘겨봤다.

아무런 냄새도, 색도 없지만 은은하게 빛을 반사시키는 게 뭔가가 발라져 있다. 권능으로 살펴볼 필요도 없다.

무기에 바르고 쓸 만한 건 독 말고는 없으니까. 그리고 저런 특징을 가지고 있는 독은 하나같이 위험하다.

‘암기를 다루는 타입.’

난 그렇게 판단을 내리고 턱 끝으로 시체를 가리켰다.

“오해하지 마요. 나도 같은 생각으로 온 거니까.”

“같은 생각? 내 생각을 네가 어떻게 알고.”

“낮 소속이죠? 죽은 사람이 누군지 보러 온 거잖아요. 얼굴 확인하더니 곧장 쓸 만한 물건이 없는지부터 살피더만. 밤 소속이었으면 시체부터 처리했겠죠.”

내가 바로 덤비지 않고 말로 하는 이유는 하나. 상대방이 낮 소속일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그것도 두뇌 회전이 빠른 사람.

이런 종류의 게임에 있어 저런 사람이 있는 게 유리했다.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납득될 만한 뭔가가 없다면 쉽게 휘둘리지 않으니까.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저도 같은 편입니다.”

“그걸 어떻게 믿지? 방금 한 말대로라면 네가 밤 소속이라 남들이 눈치채기 전에 시체를 없애러 온 걸 수도 있잖아. 얼굴을 본 나도 처리하고 싶을 거고 말이야.”

“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자자, 잘 봐요. 딱 봐도 선량하게 생긴 사람이잖아요?”

“더더욱 수상해 보이는군.”

언제든 튕겨 나갈 수 있게 몸을 웅크린 녀석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내가 나름 선하게 생긴 편인데. 밖에 있을 때는 사이비 종교인들도 종종 말을 걸어왔었다.

됐다. 나도 아무런 근거 없이 날 신뢰하라고 할 생각은 없었으니.

“낮 소속인 건 맞죠?”

“그건 싸워 보면 알겠지? 밤 소속 씨?”

“아하, 밤 소속은 낮에 사람 못 죽이니까 세게 나오시겠다. 하긴 확실히 그럴듯한 방법이기는 하네요. 그런데 그건 그만둬요. 내가 그쪽 쓱싹해 버리면 낮 소속인 거 증명해도 의미가 없으니까.”

자기 주장이 강한 건 좋은데 고집이 있으면 대화하기 껄끄러운 부분이 있다.

이런 류의 사람일수록 상대하는 방법은 간단했으니.

“먼저 전 그쪽이 낮 소속일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같은 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재밌는 선물을 하나 주죠.”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혼돈검을 집어넣었다.

상대의 눈이 반짝인다. 여차하면 바로 공격하겠다는 뜻이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혼돈에 의해 독 내성도 SSS급에 달한 상황. 애매하다 싶으면 몇 번 찔려 주지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왜냐.

“제가 밤에 속한 사람 한 명을 알고 있어요, 어때요?”

낮 소속이라며 솔깃한 정보를 알고 있으니까.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밤 소속 한번 매달아 볼래요?”

* * *

마을 광장.

낮이 되면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이곳에 모였다. 고대 아테네가 그러했듯이 각자 단상에 올라가 자신의 추리나 의혹을 외쳤고 그에 따른 사람들의 반응이 쏟아졌다.

오전 중에 이미 마그마 요정이 싸운 현장을 둘러본 이들이 저마다 썰전을 펼치고 있었으니.

“이건 기회야! 밤에 속한 이들이 둘이나 죽었지. 아니, 한 명 더 죽었을 거야. 다른 곳에서 시체가 나왔다는 말은 없었으니까. 오늘 밤 놈들을 죽여야 한다!”

“누군지 알고? 해야 되는 걸 말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어떤 녀석을 달아야 하는지가 중요한 거지.”

“저 멍청한 녀석 끌어내. 영양가 하나 없는 소리나 하고 있잖아!”

“이런 몽매한 것들이! 말을 해 줘도!”

아수라장.

그냥 말만 오가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힘이 빠지는 거 같냐.

흥분해서 소리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토론에 관심을 끈 채 자기만의 추리를 이어 나가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방금 떠들어 댄 사람의 말이 맞다. 어찌 됐든 밤 소속 사람이 여럿 죽은 건 사실이었고, 처형을 통해 한 명 더 없앨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었으니까.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대략 40명 정도.’

이중 절반이 밤 소속이라 했을 때 벌써 5분의 1이 죽었다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마그마 요정에게 당한 녀석이 둘. 마그마 요정을 처리하는 데 실패해 랜덤하게 죽은 녀석이 하나. 첫날 밤 내가 죽인 고나암까지 총 4명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러프하게 반으로 나눴을 때의 이야기. 밤 소속이 비교적 더 적다면 타격이 더 크겠지.

난 군중 사이, 팔짱을 낀 채 침묵하고 있는 마그마 요정에게 다가갔다.

“나 왔다. 없는 사이에 이상한 말 떠들고 다닌 건 아니지?”

“조용히 있었거든? 내가 애들 말 무시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냐!”

말을 아끼라고는 했지만 정말 아예 말을 안 했을 줄은 몰랐는데. 말 잘 듣네. 덕분에 고생이 덜었다. 부탁할 게 하나 있었거든.

“잠깐 귀 좀.”

녀석에게 간단한 계획을 속닥였다. 처음에는 무슨 소린가 하던 마그마 요정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관심을 보인다.

“오, 그게 되려나?”

“그건 봐야 알지.”

난 새롭게 단상에 서는 녀석을 가리켰다. 오전에 만났던 드루이드 혼혈, 파하르.

“밤 중에 죽은 자는 그들밖에 없다.”

아무런 예고 없이 날린 말. 그 말에 산만해지던 좌중들이 귀를 기울인다.

그들이 누구를 뜻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고, 지금까지 단상에 선 이들 단정적으로 말을 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우린 다르다.

“밤에 소속한 자 한 명이 규칙에 의해 죽었지. 내가 확인했다.”

“진심인가?”

“그걸 어떻게 믿지?”

파하르의 말에 반발이 좀 있었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하든 안 믿을 사람은 믿지 않았으니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내 말을 믿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야. 내게 정답을 바라지 말고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해라 머저리 같은 녀석아. 위치는 말해 줄 테니까.”

“이런 씨!”

“닥쳐 이 자식아!”

필터링 없는 말에 욱하는 녀석이 한 명 있었으나 파하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살벌한 기세에 상대가 순간 주눅 든다. 대놓고 살기를 담고 노려보면 놀랄 만하지. 이렇게 강하게 반응을 할지는 몰랐는지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이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지켜보기 시작한다. 좌중의 시선을 끈 것을 좋았지만 방법이 과격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성격이 보통이 아닌 건 알았지만 이렇게 나갈 줄이야.’

나야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건 파하르가 전담하기로 했으니까.

“내가 이 자리에 선 이유는 하나. 밤이 찾아오기 전에 밤에 속한 사람 한 명을 더 없애기 위함이지. 마그마 요정.”

“어? 어엉.”

“난 그들 중 하나가 테이포드라고 생각한다. 넌 어떻게 생각하지?”

다짜고짜 이름부터 밝힌다. 이 부분은 의도한 바다. 왜냐.

“나도 동의해. 내가 싸웠던 녀석들이 떠드는 걸 들었거든. 테이포드가 나부터 노리라고, 이제 막 올라온 등반가라 별거 없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했었어.”

이미 녀석이 나서기 전에 마그마 요정과 합을 맞췄기 때문이다.

물론 마그마 요정과 싸운 놈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그게 뭐?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지금 시점에서 마그마 요정은 경찰들과 동급으로 확실하게 신분을 증명한 자였다.

그뿐일까. 힘을 보여 줬기에 다른 밤 소속 사람들이 함부로 건들기 껄끄러운 존재. 달리 말하면 발언권이 가장 센 사람이었다.

그것만으로 힘이 쏠린다. 이곳에 있는 누구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없으니까.

“내가 할 말은 이게 전부. 난 테이포드를 처형대로 올릴 생각이다. 동의하는 자는 나와 함께해라. 시간 끌 필요 없잖아?”

“잠깐! 그딴 근거도 없는 말을 멋대로 지껄이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적당히 마무리하고 단상에서 내려오려는 파하르를 향해 테이포드가 소리를 높였다.

가만히 있다가 느닷없이 지목을 당했으니 당황할 법도 하지. 억울하기는 할 거다. 아침이 찾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밤 내내 놈을 지켜보고 있었던 만큼 그건 확실하다. 그런데 어쩌나. 우리에게 필요한 건 놈의 결백이 아니라 놈이 밤에 속한 자라는 걸 보여 주는 것뿐인데.

암만 떠들어 봤자 처형시키고 정체를 알아내면 끝이다.

놈 또한 그것을 아니 필사적으로 나서는 것이고.

“다들 들어 봐라. 저자를 신뢰하는가? 어디에도 근거는 없다는 걸 알 터인데. 등반가가 대단한 위업을 떨친 것은 분명하나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아. 누가 자신을 사주한 사람을 밝힐까!”

그가 열정적으로 사람들에게 팔을 펼친다.

“이 자리 누가! 어떤 누가! 내가 명령을 내린다고 맹목적으로 따를 정도로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냐는 말이야! 자네라면 그러겠나? 당신이라면 누가 시킨다고 그대로 따르겠나? 이게 말이 되는지 제대로 생각해 보란 말이네!”

NPC들이 웅성인다. 그들의 자존심을 제대로 짚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 90층대에 머물고 있다.

그만큼 실력 있고 강한 자들이라는 거겠지. 남이 하라는 대로 무작정 하는 이들이 아니라는 거다. 그 부분을 잘 파고들었으나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

“그럼 증명해 보이시죠, 테이포드?”

-차캉

혼돈검을 뽑으며 놈에게 다가갔다.

“낮 소속이면 날 죽일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목을 내어드리지. 칠 수 있으면 치라고.”

“그, 그게 무슨!”

“걱정하지 마요.”

파하르와 마그마 요정이 협조해 줬으니 지금부터는 내 차례.

“지금부터 어디 한 곳은 날아갈 거야. 죽기 싫다면 내 목을 쳐. 방어 따윈 안 할 테니까.”

스스로를 증명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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