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7화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자
고민했다. 폭발의 울림과 위치로 봤을 때 높은 확률로 마그마 요정이 있는 곳에 문제가 생겼다.
근처 다른 곳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너무 낙관적인 생각. 상위층으로 올라오면서 등반가를 깔보는 NPC는 많이 줄었지만 그들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 있다.
유대감.
어차피 한 명을 죽여야 한다면 같은 NPC가 아닌 등반가를 죽이자고 암묵적으로 합의했을 수도 있다는 것.
어떻게 보면 합리적일지 몰랐다. NPC는 죽으면 정말 죽는 거지만, 등반가는 코인이 차감되고 안전지대로 돌아가거나 최악이라 봤자 탑 밖으로 쫓겨나는 것뿐이다.
‘그건 알 바 아니지.’
놈들 입장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거지 같거든.
죽는다는 경험을 겪어야 한다는 건 똑같고, 나를 죽이려 했다면 본인도 똑같은 결말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어야 했다.
후우.
작게 숨을 내뱉었다. 잠깐이지만 흥분했다. 탑에 오래 있으면 이게 문제다. 안전과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는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
설사 내게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칼에는 눈이 없고, 언제든 내게 휘둘러질 수 있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자. 옆에는 덕춘이가 있잖아. 마그마 요정도 쉽게 당할 사람은 아니야.’
어쩌면 진짜 근처에 있는 다른 NPC를 노린 걸 수도 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이 본인이 있는 위치를 숨기는 것이다.
당장 밤이 찾아올 때 했던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지.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은신 스킬을 사용한 채 골목을 돌고 돌아 혹시 모를 추적을 따돌리고 본인의 은거지로 향한다.
나와 마그마 요정도 그랬다. 땅굴 이동을 통해 지상이 아니라 지하로도 움직일 수 있는 경로를 만들어 뒀으며, 수시로 마그마 요정이 용암을 굳혀 길을 막아 이동 경로를 바꾸었다.
이러고도 작정하고 쫓는다면 쫓아올 수도 있기는 한데.
‘그랬으면 나한테 걸렸겠지.’
탑에 들어오고 내 뒤통수를 노린 놈이 한둘이 아니라서 이쪽으로는 도가 텄거든.
대형 길드, 숭배자, NPC 등등. 내 등을 노렸던 녀석들 중 지금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놈은 없었다.
-콰르르륵
-구구구구구궁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진동음. 전투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나와 덕춘이는 연결되어 있으니 정말 문제가 심각하다면 찾아오겠지. 저쪽은 마그마 요정한테 맡기도록 하고 난 이곳에 집중하자.
테이포드가 안으로 들어간 후 추가적으로 종탑에 진입하는 이가 있는지 살폈다.
인내심을 가지고 침착하게. 프리즘 레인보우가 끝날 것을 염두에 두고 건물 사이에 모습을 숨기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다른 한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군지 모르겠군.’
저 멀리 쉴드처럼 막을 치고 하늘을 통해 종탑으로 향하는 녀석이 있었다.
권능을 사용했으나.
[SSS급 마도구, 거짓말 악마의 혓바닥이 정보를 가립니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마도구가 방해했다.
집중해서 권능을 강화했다면 어떻게든 정보를 읽어 낼 수 있었겠으나 녀석이 모습을 보인 건 찰나였고 곧장 종탑에 진입해 완전히 정체를 밝혀내지는 못했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걸로도 충분했다.
‘천계에 성물이 있다면 마계에는 마도구가 있지.’
마기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특수한 아티팩트. 악마 특유의 괴상한 힘이 깃들어 어떤 의미에서는 성물보다 짜증 나는 물건이었다.
성물보다 희귀하기도 하고 말이지. 성물과 달리 저주나 주인 파괴적인 마법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아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파괴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저건 마기가 있어야 쓸 수 있어.’
이게 중요했다. 저런 물건은 화조국에서도 구하기 힘들다. 물량 자체가 거의 없어서 일반적인 루트로는 구할 수 없다. 화조국과 거래 중이기에 알고 있는 내용이다.
달리 말하면 과거 등반을 하며 얻었거나, 본인 스스로가 고위 악마여서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안 되겠다. 잠깐이지만 내 권능을 피하는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니. 선량한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내가 압수해야겠다.
성물은 좀 있는데 마도구는 따로 없어서. 흠흠.
저 둘은 저기서 뭘 하려나. 마음 같아서는 안에 들어가서 무슨 대화를 하는지 알아내고 싶었으나 그건 힘들 거 같다. 아무리 나라도 2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부담스럽다.
말이 2명이지 날뛰다 보면 추가적으로 더 몰려들 거다. 가뜩이나 마그마 요정이 있는 쪽에서 소란이 일고 있는 타이밍이라 어그로가 끌린 시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조용히 저들이 어디로 움직일지 살폈으나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고, 머지않아 동이 틀 시간임을 확인한 난 자리에서 벗어났다.
* * *
“미쳤군.”
내가 마그마 요정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건 아침이 되고 시간이 좀 지난 후였다.
처음에는 곧장 가려고도 했지만 인근에 느껴지는 인기척이 한둘이 아니라서 잠시 사리기로 했다.
갖가지 방법을 통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알아내려는 거겠지. 특수한 스킬은 기본이고, 무슨 인형이나 동물을 보내 상황을 살피는 이들도 있었다.
동이 트고 나서면 모를까, 아직 밤일 때 움직이다 걸리면 괜한 오해만 살 게 뻔했다.
의외로 걱정은 없었다. 언제까지나 이어질 거 같았던 굉음이 멎고 오래지 않아 마그마 요정이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으니까.
무사하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이건 정말이지.
“어? 이블아이!”
“그에에에.”
사방이 용암 천지. 대부분 식어서 굳었지만 여전히 붉은빛을 띤 채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는 것도 있었다.
천장은 무너지고 벽을 녹아내렸으며 주변에 있던 건물들 또한 여파에 휩쓸려 박살 났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친다. 90층대에 올라온 괴물들이 날뛴 거 치고 건물 몇 개로 끝난 거면 얌전한 거지.
내 눈을, 아니. 이곳에 모인 이들의 시선을 끄는 건 저것들.
“설마 둘이나 잡을 줄이야.”
밤에 마그마 요정을 노린 밤 소속 NPC는 한 명이 아니었다. 두 명이었지.
큰 사고 없이 밤이 지나갈 거라는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보통은 둘에게 기습당하면 죽어야 정상이었지만 마그마 요정은 보통이 아니었다.
“으아아.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 어디 갔다 이제 오냐고!”
“고생했다. 나도 이런 상황일 줄은 몰랐지.”
“얘들 아주 작정하고 덤볐다니까? 창문 부수고 달려들더니 한 놈은 밑에서 올라오고. 와, 진짜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둘이서 짜고 들어왔다고?”
“어. 타이밍으로 봤을 때 중간에 지원 온 건 아니야.”
이건 심각한 문제다. 이제 고작 이틀 밤이 지났을 뿐이다. 서로 합심을 하려면 그 전에 합의가 있어야 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번에 당한 녀석 두 명이 인연이 있어서 같이 밤의 소속이 된 거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밤 소속 NPC들을 규합한 인물이 있다는 거였다.
확률상 전자일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 목숨이 걸린 만큼 최악의 상황도 염두에 두는 게 맞았다.
밤 소속 사람들은 대부분 서로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야 하나.
‘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 잘한 선택이야.’
이런 상황이었다면 중간에 밤의 소속이라며 놈들에게 접근해 봤자 의심만 받으니까.
물론 나야 낮 소속이 아니니까 정체를 알 수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곱게 보내 줄 일은 없겠지.’
규칙 어디에도 같은 소속 인원을 죽이면 안 된다는 말은 없다.
의심스럽다는 이유 하나로 칼부림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라는 것.
좀 더 내가 움직일 방향성이 잡히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잘했다.”
난 마그마 요정에게 순수하게 칭찬을 했다.
무려 90층대에 있는 NPC를 2명이나 잡았다. 결코 쉽게 이룰 수 있는 업적이 아니다. 아무리 덕춘이가 옆에 있었다지만 마그마 요정 본인의 무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
속으로 마그마 요정의 전투력을 더 높게 올렸다.
밤중에 지속된 전투. 이른 아침이었지만 이곳으로 오는 이들이 많았다. 경찰들도 부리나케 달려와 현장을 챙긴다.
그만큼 중대 사항이라는 거겠지. 경찰 2명이 전부 왔다는 건 이번 밤에는 희생자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알짱거리는 이들을 뒤로 물려 세우는 경찰들을 향해 물었다.
“이번 밤에는 따로 죽은 이가 없는 모양이네요?”
“아, 그렇지. 밤 소속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거야.”
91층 게임의 룰. 그곳에서 주어지는 특수한 역할 중 하나는 경찰이었으며, 이들은 밤 동안 낮 소속 사람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다른 곳에 희생자가 나왔으면 한 명은 그곳을 지키고 있었을 거다.
달리 말하면.
“밤 소속 사람이 한 명 죽었겠군요.”
“그치. 우리에게는 좋은 소식이지.”
경찰이 입꼬리를 올린다. 밤 소속은 밤 동안 낮에 속한 이들을 죽이지 못하면 랜덤으로 누군가가 죽으니까.
마그마 요정의 어깨를 잡았다.
“엉?”
“아무 말 없이 잠시만 있어. 난 잠시 다녀올 때가 있으니까.”
괜히 입을 열었다가 얼빵한 면모를 보이느니 침묵을 지키는 게 나았다.
마그마 요정을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사방에서 질문을 해 올 텐데 전투에 지친 녀석이 괜히 필요 이상의 정보를 쉽게 말할까 걱정되는 거지.
“어디 가게!”
“이따 말해 줄게. 아, 여기 있는 사람들 얼굴 기억해 둬라?”
“야!”
내게 뭐라 하는 녀석을 뒤로하고 발을 박찼다.
적어도 낮에는 마그마 요정은 안전하다. 밤 소속 사람들은 낮에는 누군가를 죽일 수 없으니까. 이미 밤 소속을 잡아냈으니 마그마 요정을 처형대로 보낼 일도 없고.
신경 쓰이는 건 하나.
‘밤 소속 NPC 중 한 명이 죽었어. 어떤 놈인지 확인해야 해.’
마그마 요정이 신나게 날뛰면서 이곳에 주목이 쏠렸다. 궁금하지 않더라도 상황 파악을 하려면 이곳으로 오는 게 정상이다.
만약 이곳에 오지 않고 이상한 곳에 얼쩡거린다?
“그건 여기보다 궁금한 게 있다는 거거든.”
자기와 같은 밤 소속 중 누가 죽었는지 보고 그 시신을 없애기 위해 움직이려 할 거다.
만약 자신과 안면이 있거나 가깝게 지낸 이가 죽은 거라면 가장 먼저 의심받는 건 본인이 될 테니까.
나도 나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NPC들 얼굴을 많이 익히기는 했지만 모든 이의 얼굴을 외운 건 아니다.
애초부터 밖으로 나오지 않고 집에 숨어 있던 이들도 있었고, 암기 천재면 모를까 한 번 본 얼굴을 그 자리에서 전부 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서.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뭘 어떻게 해. 발로 뛰면서 확인해 보는 거지.
대로변을 내달렸다. 거점으로 삼은 곳이 멀어서일까, 조금 늦었지만 마그마 요정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저기.
“찾았다.”
은신 스킬을 사용한 채 다른 방향으로 달리는 이가 보였다.
다른 사람은 속여도 권능을 사용하는 내 눈을 피할 수는 없다.
-쿠웅
발을 박차며 속도를 높였다. 상대가 눈치챌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는 프리즘 레인보우.
인기척을 완전히 지우며 91층 마을 외곽으로 들어섰고.
‘오호라.’
이제 막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녀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 드루이드의 피가 흐르는 것으로 보이는 혼혈의 여인.
내 기억에는 없는 인물이다. 아마 그동안 몸을 사리고 있던 거겠지.
가 보자.
타이밍만 좋다면.
‘밤에 소속된 이들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으니.’
밤을 꼴딱 새웠으나 피곤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볼 거다. 만약 시체를 없애려 한다면 밤 소속일 게 뻔했고 그게 아니라면.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야.’
나와 똑같은 판단을 해서 저곳으로 향했다는 거니까.
과연 어느 쪽이려나.
꾸욱.
혼돈검 손잡이를 붙잡으며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