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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545화 (545/740)

545화 넌 어디?

시신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은 10분. 나와 테이포드는 그 전에 현장에서 나왔다.

대부분 최대한 조사를 하기 위해 시간을 꽉 채우거나 조금씩 넘기는 거에 비하면 빠른 속도.

몇몇 NPC들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테이포드가 입을 열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연금술사, 혹은 화조국이나 다른 상단을 통해 특수한 시액을 얻을 수 있는 자를 찾아야 하네. 안에 흔적이 남았어.”

“연금술? 그 말이 사실인가.”

“빈약한 근거라면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테이포드. 수사에 혼란만 가중시키는 꼴이니까.”

테이포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낮 소속 사람들은 최대 밤에 살해당한 사람 수만큼 범인으로 의심되는 대상을 처형대로 보낼 수 있다.

무사히 밤 소속을 잡아내면 다행이지만 실수로라도 같은 소속 NPC를 처형시킨다면?

스스로 힘을 깎아 내는 거나 다를 바 없다. 특히나 이런 게임은 머릿수가 중요하다. 사람은 자기 줏대가 있더라도 분위기가 한번 형성되면 휩쓸리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이건 목숨을 건 게임이야.’

친구들끼리 모여 하던 마피아 게임이 아니라 진짜 죽는 게임이다. 처형된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여기에 한 가지 더 규칙이 있었으니.

‘처형된 사람은 죽고 나서 소속이 밝혀져.’

본인이 죽음으로 내몬 대상이 같은 소속일 경우 불어올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는가. 이곳에 모인 NPC들은 그렇게 묻고 있는 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생자가 늘어나는 만큼 신속하게 움직인다. 단,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전부터 이곳에 있던 이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규칙이었다.

기껏해야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어설픈 추리는 독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나야, 반응을 보고 싶었던 거라 가만히 뒤에서 그들을 살폈다.

테이포드의 말에 경계부터 하는 이들의 얼굴을 기억했다. 이들은 낮 소속일 가능성이 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은.

‘밤 소속이 연기할 수도 있는 거니 맹신은 금물이야.’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고, 그중에는 본인의 소속이 아닌 다른 소속에 몰입하여 행동하는 것도 있었다.

간단하지만 동시에 꽤 효과 좋은 방법. 아직 이 정도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슬슬 내가 나서자.

“경화액이라고 있습니다. 저도 가지고 있죠. 왜냐 전 화조국과 거래를 하는 포션 제작자이기도 하거든요.”

보물 주머니에서 시약을 꺼내 흔들었다.

투명한 병 속에서 찰랑이는 액체를 향해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도옹

코르크 마개를 뽑고 바닥에 시약을 부었다. 동시에 마력을 운용해 진동을 가했으니.

-투웅

순간적으로 굳은 경화액이 땅에 튕겨 올랐다.

“현장에 경화액이 있더군요. 떨어진 컵에서 쏟아진 것도 있었고요. 보시다시피 평소에는 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만 특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굳어 버리죠. 이걸 마셨을 때 굳혔다면 기도가 막혔을 겁니다.”

내 발언에 NPC들이 웅성거린다.

“저게 맞는 말인가?”

“연금술 쪽에는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모르겠는데.”

“애초에 저런 물건이 있었다면 진작에 썼겠지.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 저런 방식으로 살해한 적은 없었어.”

“수상하군.”

서로 눈치를 보던 이들이 나를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본다.

그렇겠지. 반응을 봤을 때 지금까지 경화액을 사용한 살인은 없었다. 내가 오기 전까지. 이런 타이밍에 맞춰 내가 경화액을 가지고 있고 말이지.

가능성을 봤을 때 내가 범행을 저지른 후 나섰다고 의심하는 건 합당했다. 한 가지만 제외한다면 말이지.

“저를 의심하는 건 당연합니다만 범인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고 싶군요.”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이곳에 온 건 오늘 아침. 그전까지는 이곳에 없었습니다.”

“증명할 수 있는가?”

“말로는 뭐든 할 수 있는 법이지.”

틀린 말은 아니지. 나였어도 저런 식으로 나왔을 테니까.

앞으로 나선 건 위험 부담이 크다. 나의 결백을 증명할 수 없었다면 계속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겠지만.

“마을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집이 하나가 있을 겁니다. 음, 정확히는 집이었다고 해야겠죠. 그곳에 있는 고나암을 처리한 게 저니까요.”

“고나암!”

“그 녀석 알지. 마을 밖으로 나갔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죽었다는 건가.”

“아니, 그래도 이제 막 90층대에 올라온 등반가한테 당했다고?”

고나암이라는 말에 혼란스러워하는 이들.

“못 믿겠으면 가서 확인해 보시죠. 아, 이건 거기서 가져온 룰 북입니다. 여러분이 말한 대로 등반가가 가지고 있을 만한 물건은 아닐 겁니다.”

품에서 룰 북을 꺼내 펼쳤다.

91층에 올라온 후 시스템적으로 룰 북을 받은 적이 없다. 즉, 이건 NPC에게만 주어지는 물건이라는 것.

영악하기도 하지. 이런 중요한 걸 지들끼리만 알고 있고.

‘규칙을 알아내는 것도 능력이라는 거야.’

착각하지 말자. NPC는 무조건적으로 등반가 편을 들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적이 될 수도 있다는 말.

그들과 동급으로 서기 위해서는 NPC의 호의를 바라지 않고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그게 실력이든 힘이든 인격이든 뭐든 간에 말이다.

얕보이는 순간 잡아먹힌다. 전략에 따라서는 스스로를 낮추며 적들의 경계를 낮추는 것도 방법이기는 하겠지만 나랑은 맞지 않았고.

“그리고 뭐, 까놓고 말해서 별로 상관없지 않나요? 전 그저 유용한 정보를 알려 주는 것뿐입니다. 낮 소속이면 땡큐고, 제가 밤 소속이라도 그들을 배신한 거나 다를 바 없잖아요?”

어느 쪽이든 당장 범인을 잡는 데 도움을 준다. 내 정체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의심을 할 테니 깔끔하게 이용해 먹을 수 있으면 이용할 수 있는 관계로 가자 이거다.

오히려 이편이 신경 쓸 일 없이 편하니까.

내 말뜻을 이해한 이들이 헛웃음을 짓는다.

“허허. 이거 자신감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난 그리 싫지는 않아. 결국 여기서 믿을 수 있는 건 스스로뿐이지 않은가.”

“판단은 알아서 하라 이거군. 맞는 말이기는 하지.”

내가 여기서 하고 싶은 일은 크게 두 가지.

첫 번째 경화액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어떤 놈인지 보고 싶었으며, 두 번째는…….

‘적극적으로 범인 찾기에 나서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 돼.’

잘못된 추리를 할 경우 감당해야 할 부담감에 집어 삼켜져 가만히 있어 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앞으로 나서는 이들 뒤에 숨어서 몸을 사려 봤자 진전되는 건 없다.

이렇게 계속 찔러 줘야 반응이 나온다. 밤에 속한 이들은 더욱더 치밀하게 움직이게 될 것이고, 낮 소속 사람들은 어떻게든 단서를 찾으려 할 거다.

서로 얽히고설키는 과정 속 반드시 실수가 나오겠지. 그걸 노려야 한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누그러들고.

“그래. 몇몇 사람을 추려 고나암이 있던 곳을 살피도록 하지. 나머지는 이번에 찾은 단서를 중심으로 움직여 보는 게 좋겠어.”

테이포드가 나서서 행동을 종용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 시간은 아침. 밤이 찾아올 때까지 시간은 충분했다.

‘봐 보자고. 수상한 사람이 누가 있는지.’

난 한 발 물러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이들을 바라봤다.

* * *

[밤이 찾아옵니다.]

2번째 밤이 찾아왔다.

모두가 각자의 집으로 들어간 시각.

“흐음. 대충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다만 조금 아쉽군.”

나 역시 적당한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게임이 진행될 때마다 여러 희생자가 나오는 만큼 마을에 빈집은 많았다.

오늘 낮에 처형대에 간 사람은 없다. 벌써 누군가를 매달기에는 증거가 너무 빈약해서 말이지.

섣불리 행동할 만큼 멍청한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유독 행동이 빨랐던 사람은 3명 정도.”

연금술, 혹은 특수한 시약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범인일 거라는 말에 움직임을 보였던 인물이 몇 있다.

가장 먼저 테이포드. 그다음 엘프로 보이던 여인과 붕대로 얼굴을 가린 남자 한 명.

내가 보기에 가장 밤 소속일 가능성이 높은 이들이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의심 단계. 자세한 건 지켜보도록 하고.

“키미우라…….”

NPC들에게 가장 많은 지목을 받은 NPC가 있다. 이 마을에서 연금술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자라고 했으니까.

자신은 아니라고 열변을 하기는 했지만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우르르 그의 공방에 몰려가 확인해 본 결과 경화액이 나왔으니까. 당장 처형대로 보내자는 말도 있었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이유는 하나.

‘키미우가 연금술사인 건 알려진 사실이야. 다른 누군가가 경화액을 훔쳐 사용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난 이쪽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그의 한쪽 팔은 의수. 프램버그에서 만든 마법공학 팔을 달고 있었다. 내가 살해 현장에서 본 손바닥 자국과 일치하지 않는다.

적어도 본인이 직접 움직이지는 않았다는 뜻. 공범일 경우도 생각해 보기는 했으나.

“그랬다면 굳이 경화액을 바닥에 뿌려 둘 이유가 없지.”

의도적으로 경화액이 뿌려져 있던 것으로 봤을 때, 진짜 범인은 키미우를 범인으로 몰고 가려고 했을 거다.

키미우가 멍청한 게 아니라면 아무나 쉽게 믿지는 않았겠지. 언제 배신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목숨을 걸고 함께 움직일 필요가 없으니까.

여기까지만 보면 별다른 소득이 없는 거 같았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단서가 몇 개 모였어.”

“그에에.”

첫 번째.

범인은 연금술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만약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본인이 나서서 선동질을 했겠지.

자신이 연금술에 조예가 있는데 바닥에 떨어진 액체가 경화액이라면서 말이다.

즉, 범인은 나보다 현장 조사 순서가 뒤였단 것이다.

동시에 아직 다른 NPC에게 실력을 드러낸 적 없는 이다. 어쩌면 비교적 최근에 91층에 들어온 인물일지도 모르지.

다른 NPC들에게 연금술 실력이 알려졌다면 키미우와 같이 가장 먼저 범인으로 몰렸을 테니까.

이어서 두 번째.

‘키미우와 가까운 자야.’

경화액이라는 건 생각보다 만들기 까다로운 시약에 해당된다.

무엇보다 사용되는 약재가 귀했고, 그것을 가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제법 필요하다. 작업 중에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건 덤.

마을 내부와 외부를 돌아다녀 봤지만 야생에서 자라고 있는 약초는 보이지 않았으며, 키미우의 공방 외에 고약한 냄새를 맡았다는 사람도 없었다.

범죄에 사용된 경화액은 키미우가 만들어 둔 물건이라는 거지.

당연하게도 물건을 훔치기 위해서는 그 물건이 키미우의 공방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했다.

‘적어도 키미우의 공방에 들어와 본 적이 있던가, 녀석에게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만한 사이어야 돼.’

그리고 이 모든 조건에 부합되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키미우에겐은 미안하지만 녀석의 인간관계는 빈말로도 넓다고 말하기 힘든 수준이었으니까.

그나마 교류하고 있던 NPC는 고작해야 4명. 그중 비교적 최근에 합류한 이는 단 한 명.

“제라프.”

마그마 요정을 데리고 온 NPC였다.

차갑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야, 안 자?”

그런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으니.

“아직 안 잤냐?”

“너 같으면 잠이 오겠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마그마 요정이었다.

그래도 인연이 있고, 다른 NPC보다는 신뢰할 수 있기에 같은 건물을 사용하기로 했다.

내 실력에 대해 알고 있으니 밤 소속이라도 나를 노리지는 않을 거고. 위험 부담이 워낙 크니까.

특히 내게는 덕춘이도 있다. 내가 경계를 늦추더라도 덕춘이의 눈까지 속이지 않으면 기습은 불가능.

좋다. 제라프에 다한 건 내일 마저 파헤쳐 보도록 하고 지금은.

‘마그마 요정이 어디 쪽일지 확인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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