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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544화 (544/740)

544화 미끼에 반응할까

나와 마그마 요정, 두 NPC가 움직였다.

테이포드와 누구더라. 마그마 요정을 데리고 온 녀석.

아, 기억났다. 제라프. 두 녀석에게 밤 중에 나온 희생자로 보러 가자는 건 둘의 반응을 보기 위함뿐만은 아니었다.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시체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어제 죽었는지, 무엇에 당했는지, 상처에 장난질을 쳐 놨더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사인이나 사용된 무기 등을 추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현장을 보면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더 늘어나고 말이야.’

몸싸움이 있었는지, 아니면 독살 같은 암살을 당했는지, 기습을 당했는지 등등.

가끔은 상대방의 성격이 드러나기도 한다.

탑을 오르다 보면 온갖 또라이를 만나기 마련이었고, 원치 않더라도 이런 쪽에 지식이 쌓이기 마련이었다.

그냥 오르기만 했는데도 이 정도인데.

‘상위층에 오르고 나서는 좀 더 세련되어졌지.’

그곳은 단순한 다툼이 아니라 정치적인 보복과 살해가 판을 쳤으니까. 보다 정교했고 누가 저지른 범행인지 숨기기 위한 기술도 상당했다.

내가 직접 겪지 않았어도 상관없다. 다음 챕터로 넘어가면서 생겨난 기억으로 얻은 정보도 결코 적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반쯤은 전문가나 다를 바 없어.’

단순히 눈썰미나 정보, 경험으로 판단하는 것뿐만이 아니니까.

“이곳이군.”

“이미 많이 모였네.”

마그마 요정이 고개를 빼 든다.

91층에 올라온 나도 희생자의 가치를 아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이미 시체 주변은 막아 뒀고, 최초 발견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혹시나 증거를 조작하거나 현장을 훼손할 것을 염두에 두었는지 NPC 몇 명이 다가오는 이들을 제지하며 차례를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들이 그러고 있느냐.

“저들은 낮 소속이 확실하군.”

“맞아. 믿을 수 있지.”

그들의 어깨에는 하얀 완장이 있었다.

91층에는 수많은 규칙이 있고, 다양한 변수를 주기 위한 특수한 역할도 더러 존재했다.

내가 첩자라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처럼 낮에 속한 이들 중에도 특이 케이스가 있었으니…….

“저게 경찰.”

흔히 마피아 게임을 할 때 나오는 직업과는 좀 달랐다. 여기서는 밤에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내거나 그런 능력은 없었으니까.

룰 북에 의하면 경찰 역할을 받은 이들의 효과는 분명했다.

‘밤이든 낮이든 본인의 소속이 드러나. 대신 밤에 버프를 받지.’

스스로의 정체가 강제적으로 드러나는 만큼 밤에 속한 이들에게 당하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한 가지 어드벤티지를 받았으니 밤에 보다 강한 힘을 가지게 되는 것.

밤에 적들이 쳐들어와도 버틸 수 있도록 해 주는 거다. 운이 좋으면 침입자를 없앨 수도 있겠지.

그렇다 한들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쪽수 앞에 장사 없다고 작정하고 몰려들면 답이 없으니까.

저들에게 있어 가장 생존 확률을 높이는 방법은 가능한 빨리 게임을 끝내는 것.

그래야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 소속이 분명히 드러난다는 건 기본적으로 낮 소속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담담히 차례를 기다리는 내가 흥미로운지 테이포드가 흥미를 가진다.

“자네, 이곳 규칙에 대해 잘 알고 있나 보군?”

“대충은 다 알지.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말해 주지 않아서?”

뼈가 담긴 말에 그가 허허 웃었다.

그렇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녀석은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규칙이라던가 아니면 이곳만의 분위기라던가. 나 또한 고나암을 처리하고 얻은 룰 북이 없었다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찰이라는 역할에 대해 알고 있을 리도 없었고 말이지. 달리 말하면.

-툭

“음?”

“이따 따로 이야기 좀 하자.”

“오, 뭐야? 징그럽게.”

“기껏 도와주려 했더니만 싫으면 말고.”

“싫은 건 아니고! 나 시간 많아.”

여기 순진하게 용암을 흘리고 있는 녀석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게임이 시작된 타이밍도 지랄 맞다.

다른 시간도 아니고 밤이 다가오는 시점에 이곳으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여차했으면 밤의 소속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컸다.

‘불리한 조건이지.’

낮 소속이든 밤 소속이든 어느 쪽이 정의롭다고 할 건 없었으나, 등반가 입장에서는 낮 소속이 좀 더 안정적인 느낌이 있었다.

양쪽 모두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게임을 이어 나가는 건 같았으나, 밤의 소속은 직접 상대방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건 어떤 식으로든 본인의 흔적을 남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외부자다. 의심하고자 하면 가장 먼저 의심받는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런데 말이지.

‘이 녀석 낮 소속이기는 한 걸까?’

혼돈의 파편인 루두라도의 규칙과 탑의 시스템이 합쳐져 권능을 사용해도 소속을 알아낼 수 없다. 상대가 같은 등반가인 마그마 요정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

밤 소속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경계해야 마땅한 상황이었으나.

‘첩자라서 다행이군.’

나와는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녀석이 어디 소속이든 맞춰 줄 수 있으니까. 더 나아가 뭐가 됐든 루두라도만 잡으면 게임은 끝이다.

쉽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쉬웠으면 이렇게 난리 피울 게 아니라 진작에 잡기 위해 움직였겠지.

이런저런 전략을 짜 봤자 희생자가 가장 적게 나오는 방법은 그거니까.

“다음 차례.”

“흐음, 못 보던 얼굴이군. 등반가겠지?”

“보다시피.”

“혼자 들어가는 건 안 된다. 2명씩 짝을 지어 가라. 시간은 10분이다.”

경찰이 나와 테이포드를 가리킨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야 상관없다. 오히려 좋다.

‘녀석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볼 수 있으니까.’

난 테이포드와 제라프가 밤 소속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그들이 밤 소속이라고 여기저기 퍼트릴 생각은 없다. 난 낮 소속이 아니니까. 다만 각자의 소속이 어디인지 파악해 두는 건 중요했다.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한쪽 편을 끌어들이는 게 중요해.’

밤과 낮. 어느 쪽에 사람이 몰려 있으려나.

뭐가 됐든 지지받는 게 유리하다. 커다란 흐름을 만들 수 있다면 원하는 방향으로 게임을 끌고 나갈 수 있으니까.

인원수가 비슷하다면 모르겠지만 한쪽에 치우쳐져 있을 경우 그쪽을 편을 끌어들여 선동할 수도 있었다.

저 녀석이 혼돈의 파편이라고. 그러면 잡기 좀 더 수월하겠지.

만약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괜찮다.

‘그때는 뭐, 한쪽이 이길 수 있도록 빠르게 게임을 끝내 버리면 되니까.’

그리고 다음 게임을 노린다.

이건 어디까지나 플랜 B에 불과하지만 말이지.

조금은 느긋하게 가기로 했다. 급해 봤자 할 수 있는 건 없고, 여러 단서가 모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라서.

만약 이번 게임에서 녀석을 처리하지 못하더라도 정체만 밝혀 놓으면 다음 게임은 무조건 이긴다.

게임 시작과 동시에 없애 버리면 되니까.

물론 그럴 일은 거의 없을 것 같다만.

‘그런 편법을 시도하지 않았을 리가 없어.’

달리 말하면 녀석에게는 몇 가지 능력이 있을 거다.

모습을 잘 숨긴다던가 아니면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던가. 본인의 정체를 감추는 데 특출난 능력이 있겠지.

뭐, 이거야 참고 사항일 뿐이고.

“생각보다 얌전하게 당했군요.”

“저항한 흔적이 없다라, 흔치 않은데.”

난 현장에 집중하기로 했다.

게임이 시작됐다. 이미 여러 번 겪었던 만큼 다들 긴장하고 있었겠지. 달리 말하면 밤을 새우더라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다.

다들 90층대에 있는 NPC 아니던가. 며칠 자지 않더라도 충분히 버틸 만한 체력을 보유하고 있다.

신경을 곤두세우는 만큼 피로도가 있고, 19일 동안 지속되니 중간중간 잠을 자기는 해야겠지만.

‘다들 본인이 유리한 시간대에 잠들 테니 사실상 본격적으로 활동할 때는 지장이 없을 거야.’

그래서 이상하다. 분명 깨어 있었을 텐데 어째서 싸운 흔적이 없는 걸까.

봐라. 이 자리에 그나마 어질러진 거라고는 본인이 마시려 했던 것으로 보이는 물밖에 없다.

떨어져 깨진 컵과 젖어 있는 러그. 그 외에는 이상할 게 없다.

“독살은 아닙니다. 피부색이 바뀐 것도 없고 혀가 붓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렇다고 암습이라 하기에는…….”

“몸에 상처가 없네.”

테이포드의 말대로다. 어질러진 흔적도 없지만 몸에 난 상처도 없다.

그렇다면 가능성 있는 건 몇 없는데.

“저주, 아니면 마법. 혹은 내가 알지 못하는 특수한 방법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저주 쪽은 가능성이 낮다. 어찌 됐든 음습한 기술이라 어둠 속성을 띄기 마련이고 그랬다면 마기가 반응했을 거다.

아무래도 마법적인 뭔가를 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권능을 발휘했다.

방에 있는 물건이나 발자국, 머리카락이나 손톱 같은 건 없다. 지나치리만큼.

범인의 것이 아니더라도 사람 사는 곳이면 집 주인의 흔적이라도 있어야 정상 아닌가.

“너무 깔끔해. 클린 마법이라도 쓴 건가.”

당장 90층의 담당 NPC인 니아나도 클린 스킬로 청소를 대신했었다.

확실히 까다로운 건 사실이지만.

-츠즈즈즈즛

모든 것을 지울 수는 없는 법이었다. 시선이 벽을 따라갔다.

벽면을 타고 찍힌 작은 자국. 도마뱀과 같은 동물의 것이 아니다. 손톱 사이즈만큼 작기는 했지만 명백히 사람 손바닥과 발자국이다.

몸을 축소 시킬 수 있는 자가 이곳에 왔었다. 오케이. 이걸로 누군가 침입했었다는 건 알겠다. 남은 건 어떻게 이자를 죽였는지 알아내는 것.

그것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왔다.

“하, 이것 봐라?”

난 자세를 낮춰 바닥을 적신 물에 손을 댔다.

저항감 없이 손끝에 묻어나오는 액체. 이거 물이 아니다. 무색무취. 무심결에 먹어도 별다른 이상이 없어 말하지 않는다면 알아차리기도 힘들었으나 나는 안다.

“데이포드, 이곳에 연금술이나 포션 제작에 능한 사람이 있습니까?”

“연금술?”

포션 제작을 해 왔던 나다. 그것도 화조국에 납품할 정도니 실력도 어느 정도 있는 편.

독자적으로 연구한 것도 있었고, 히든 가든의 레시피를 얻으면서 지금에 이르러서는 수준급에 다다랐다고 봐도 무방했다.

액체의 정체는 충격 완화 물약에 쓰이는 시약. 경화액이다.

평소에는 물이나 다를 바 없지만.

-우우우우우웅

일정 수준 이상의 진동이 가해지면.

-꾸드드득

그대로 굳어 버린다. 딱딱한 것도 아니다. 묘하게 점성 있고 묵직하게 변하지. 압축시킨 찹쌀떡 같다고나 할까.

이걸 마시는 중간에 굳혀 버렸다면?

‘그대로 기도가 막혀 버리는 거지.’

질식사. 내가 판단한 사인은 그거다.

쉬운 방법은 아니다. 먼저 경화액을 구하거나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상대방이 눈치채기 전에 굳힐 만한 스킬이 필요하다.

특히나 몸부림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봤을 때.

“이곳에 남은 액체는 이게 다가 아닙니다. 그저 치우고 남은 것에 불과하죠. 물컵이 떨어졌는데 물방울 하나 없으면 어색하니까요. 실제로는 몸 전체에 액체를 붓고 굳혀 버렸겠죠.”

움직일 수 없도록.

그렇다 한들 NPC의 힘이라면 벗어나는 건 문제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방해만 없다면 말이지.

경화액으로 온몸을 굳힌 채 제압까지 한다면? 그때는 뭐 비명도 못 지르고 죽는 거지.

“과연 그런 건가! 오호라. 의심 가는 자가 있다네. 당장 나가지!”

“하하. 별거 아닙니다. 가시죠.”

테이포드가 감탄하며 서두른다.

난 고개를 까딱이며 거만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면서.

‘미끼는 뿌렸다.’

방금 한 추리?

따지고 보면 추리가 아니다.

‘몸 전체를 묶을 만큼의 경화액을 뿌리고 치운 사람이야. 떨어진 물컵이 어색하다고 흔적을 남겨 뒀을까? 그럴 리가. 나라면 그냥 다 치우고 워터 스킬로 물 조금 뿌리고 말았어. 아니, 그럴 필요도 없지.’

빈 컵만 있더라도 사람들은 물을 다 마신 다음 쓰러졌구나 하고 생각했을 테니까.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건 범죄자가 일부러 남긴 단서. 자신이 아닌 연금술이나 포션 제작과 관련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얕은 수작이다.

난 반응을 보려는 거다. 이 빈틈 많은 추리를 진짜라며 선동하려는 이들을.

만약 그런 이들이 있다면.

‘높은 확률로 밤에 속한 이들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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