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3화 안 보러 갈 거예요?
이제 좀 감이 잡힌다.
폐가나 다를 바 없는 건물. 그나마 멀쩡한 의자에 앉아 룰 북을 다시 살핀 난 책을 덮었다.
“다음 층을 해금할 수 있는 조건은 이걸 거야.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
그것 말고는 다른 조건이 떠오르지 않는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91층에 들어온 이상 어느 정도 어울려 줄 필요가 있었다. 이미 게임에 참가해 버리기도 했고.
규칙은 간단했다.
“밤의 존재들은 매일 밤 누군가를 죽일 수 있어.”
최소 한 명은 죽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밤에 속한 자 중 한 명은 무조건 죽는다.
강제되는 살인. 희생자가 나온 시점에서 양쪽 영역 사이에는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다. 오늘 밤에 누가 죽을지 알 수 없게 되니까.
그럼 낮의 존재들은 당하기만 하느냐? 그건 아니다.
밤의 존재가 덤비면 맞서 싸울 수 있다. 그냥 곱게 죽는 게 아니라는 뜻. 집 안에 온갖 부비트랩을 설치하고 무장한 채 적이 오길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낮이 되면 밤의 존재로 의심되는 존재를 골라, 최대 밤 동안 죽은 사람 수만큼 매달 수 있다.
여기서 드는 의문점이 있었으니.
“여기까지만 보면 각 영역에 있는 사람들을 구분하는 건 너무 쉬워.”
고나암이 말하지 않았던가. 밤의 존재는 낮에 활동하지 못하고, 낮의 존재는 밤에 활동하지 못한다고.
그럼 당연히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 해치우면 되는 거 아닌가. 며칠씩 기다릴 필요 없다. 밤에 모여서 집 전부를 불태우면 그만이니까.
낮이 돼도 마찬가지.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밤에 속한 자구나 하고 해치우면 됐다.
그렇다.
“고나암 이 자식, 제대로 설명을 안 했어.”
룰 북을 읽고 나서야 이해가 됐다. 녀석이 한 말은 거짓말이다.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한 감이 있기는 하지만 소속에 따라 완전히 활동이 제약되는 건 아니었다.
영악한 녀석, 하기야 내가 어느 소속으로 갈지도 모르는데 모든 정보를 오픈하면 그게 순진한 거지.
“밤에 속한 자도 낮에 돌아다닐 수 있다. 단, 상대방을 죽일 수 없다. 낮에 속한 사람도 밤에 돌아다닐 수 있지만 그럴 경우 본인의 소속이 표시된다.”
간단히 말해 밤에 속한 이도 낮에 돌아다니며 수작을 벌일 수는 있지만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싸워 봤자 상대를 죽이는 건 불가능하니까.
낮에 속한 자도 밤에 돌아다닐 수는 있지만 본인의 소속이 드러나는 페널티가 있는 만큼 표적이 되기 쉬웠다.
대략적인 구성은 알겠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게임에는 빈틈이 너무 많다고.
예로 들어 모두가 한쪽 진영만 선택하면 문제 될 게 없다는 거지. 아예 독한 마음을 먹고 한 번에 몰려가 상대 진영을 몰살시키는 것도 방법이고.
나도 이런 점들이 이상하기는 한데.
“직접 해 봐야 알겠지.”
아쉽게도 룰 북은 말 그대로 기본적인 규칙에 대한 것만 적혀 있다. 그것도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구성으로 만들어져 있지.
규칙을 응용하는 방법이나, 91층의 분위기, 이곳에 있는 자들이 공유하는 암묵적인 룰에 대한 건 적혀 있지 않았다.
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내게 주어진 역할을 첩자.
“밤과 낮에도 활동할 수 있으며 낮에도 상대를 없앨 수 있다. 밤에 돌아다니더라도 표식이 뜨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었다. 낮 소속이 아니니 표식이 뜰 일이 없지. 밤 소속이 아니니 전투에 페널티를 가질 이유도 없고.
즉, 난 양쪽 소속인 척 움직일 수 있다는 거였다. 원한다면 한쪽 편에 붙어서 승리를 유도하는 것도 가능하다.
밤 소속인 척 돌아다니며 놈들이 누군지 알아내는 것도 방법이고, 낮 소속인 척 계략을 짜는 것도 가능하다.
뭐, 정체를 들키게 된다면 암살 1순위가 되겠지만.
그런데 말이야.
“이거 완전 개똥 같은 역할이잖아.”
“그에에.”
덕춘이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말이 좋아서 어느 편에 서도 된다는 거지 엄밀히 따지고 보면 난 소속이 없다.
즉, 어느 한쪽이 승리해도 내가 승리하는 일은 없다는 것.
그래서 생각했다. 아니, 애초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혼돈의 파편을 잡는다.”
내가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루두라도를 찾아내 잡는 것.
방향성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 * *
91층, 낮.
필드는 넓었지만 무한정으로 넓은 건 아니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게임이 진행되어야 하는데 공간이 너무 넓어지면 그러기가 쉽지 않지 않은가.
고나암이 특이한 경우다. 객관적으로 보면 도망자라고 봐야지.
사람들이 있는 곳과 멀리 떨어져, 자신 대신 누군가가 살인을 저지르기를 기다리고 본인은 숨죽여 지내는 것.
비겁하다고 말할 사람도 있었지만 전략 중 하나였다.
완전한 전략은 아니었지만. 공격을 받았을 때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날이 좋네.”
거리를 거닐었다.
난 그렇게 행동할 생각이 없었다. 길을 걷고 걸어 사람들이 모여 있는 마을로 향했다.
서로를 불신하기 때문인지 건물 간의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다. 이웃인 척하는 이가 사실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상상 이상으로 스트레스가 될 테니까.
내가 굳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하나.
‘루두라도는 이곳에 있어.’
가만히 생각해 봤다. 룰 북에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고나암이 적은 메모가 있었다.
NPC들도 멍청이가 아닌 만큼 놈을 잡으려고도 했었고, 모두가 한쪽 진영으로 모여 희생자가 없게 만들려고도 했었다.
그럼에도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으니.
‘루두라도는 사람들이 한쪽 진영에 모이면 반드시 반대 진영으로 들어가.’
한마음 한뜻으로 모두가 낮의 진영을 선택했더라도 루두라도가 남는다.
밤이 되면 누군가 죽는다. 그걸로 모두의 신뢰가 깨진다. 배신자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모두가 힘을 합치기 힘든 것이 이미 이 망할 게임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을 뿐, 이미 누군가는 상대방의 원수나 다를 바 없다는 것.
NPC는 기계가 아니다. 인격체다. 오랜 시간 동안 탑에서 지내는 만큼 인연이 생긴 사람도 있기 마련. 그런 자가 어느 날 죽어 있다?
눈이 돌아 버려도 할 말이 없다. 그저 감정에 휩쓸려 모두를 의심하고 사형대에 매달아 봤자 의미 없는 죽음이 늘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혼돈의 파편에게 놀아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참는 것일 뿐.
“좋은 아침입니다.”
난 길거리에 나와 가만히 책을 읽고 있는 NPC에게 손을 흔들었다.
멈칫거리던 이가 안경을 고쳐 쓴다.
“등반가.”
“예, 이번에 새로 온 등반가죠. 저 말고도 여럿 있을걸요? 열 명이 한 번에 올라와서요.”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며 옆에 다가섰다.
처음에는 경계심. 뒤이어 호기심. 멜빵 바지를 입고 머리를 뒤로 넘긴 NPC가 책을 덮어 테이블 위에 올린다.
“그런가. 많이도 올라왔군. 다시 피바람이 불 때가 됐다는 건 알고 있었지. 등반가가 들어온 시점에서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으니까.”
“제가 들어온 게 마음에 들지 않겠군요.”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겠네. 여기까지 왔으면 알 건 다 알고 있을 테니까.”
알다마다.
NPC는 탑이 준비한 과제를 위해 배치된 이들. 당연하게도 등반가가 들어오지 않으면 게임은 시작되지 않는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평화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이들에게 있어 등반가는 재앙의 시작이 되는 존재나 다를 바 없겠지.
나 또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그가 불만을 내보여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다. 상대방 또한 그 이상 말하지 않았고.
“테이포드 로져다.”
“이블아이라고 합니다.”
가볍게 마주 잡은 손. 악수를 하며 권능을 발휘했다.
[테이포드 로져]
-91층의 NPC.
-밤과 낮 어느 소속일까요?
-시스템과 혼돈에 의해 해당 정보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가볍게 눈썹을 까딱였다.
혹시나 했지만 소속은 알 수 없는 것인가. 아쉬워라.
하기야 권능으로 전부 확인할 수 있으면 너무 쉽지. 그래도 크게 걱정은 안 된다. 이들이 어느 소속인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내가 노리는 건 하나다.
“자네도 소속을 정했겠군. 어디로 정했지?”
“너무 쉽게 떠보는군요.”
자연스럽게 소속을 물어보네. 정작 본인의 소속은 말하지 않고 말이지. 사람을 너무 말랑하게 본다.
“저한테도 그렇지만 다른 이들에게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다들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올라온 건 아니라서요. 그러다 오히려 의심받습니다?”
내 말에 테이포드가 씨익, 입꼬리를 올린다.
“무지렁이는 아닌 모양이야. 사람을 의심할 줄 알아. 이곳에서는 필수 소양이지. 그래. 소속은 말하지 말게나. 나 또한 말할 생각이 없으니.”
자리에서 일어선 녀석이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린다.
“어차피 자네도 내가 한 말을 믿지 않을 거 아닌가?”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생각보다 쿨 하게 나온다. 말이 좀 통한다고 해야 하나.
대충 통성명은 나누었으니.
“저 말고도 등반가가 있습니까?”
“글세. 밤사이에 누군가 왔을지도 모르겠군. 이제 막 밖으로 나온 터라.”
은연중에 자신은 낮 소속임을 어필한다. 일단은 기억해 두자.
“없을 수도 있네. 90층대의 구조는 좀 특이하거든. 이곳 말고도 다른 91층이 있을 수도 있어.”
아까 저지른 실례에 대한 보답인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 준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등반가가 떨어지는 곳은 랜덤. 그냥 각자 스타트 지점이 91층이야.’
해금 하나를 풀었다? 그럼 92층인 거고. 달리 말하면 같은 공간에 있어도 누군가에게는 91층, 누군가에게는 92층일 수도 있다는 것.
이곳에서의 층의 개념은 해금한 영역의 숫자나 다를 바 없으니까.
구체적인 건 차차 알아가도록 하고 지금은 이곳에 멤버들이 없음에 안도하기로 했다.
커뮤니티로 올라오는 멤버들의 메시지. 암만 봐도 나와 같은 공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게 이곳에 등반가가 나 혼자라는 뜻은 아니었지만. 봐라.
“어이, 테이포드! 여기 등반가가 왔, 어? 그쪽도 처음 보는 얼굴인데?”
길 건너편, 골목을 돌아 이곳으로 오는 NPC의 옆에는 아는 얼굴이 있었다.
“이블아이?”
“누군가 했더니만 너였군, 마그마 요정.”
“그 반응은 뭐야? 엉?”
팔짱을 낀 채 용암을 뚝뚝 떨구는 녀석.
얘도 운이 없지. 능력 특성상 여기저기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쉬운 녀석인데 하필 이곳에 떨어지고.
‘좋게 생각하자. 협력할 사람이 한 명 생겼다는 거니까.’
혼자 하는 것도 좋지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받을 사람이 있으면 좋은 법이었다.
특히나 이들에게 있어 우리는 철저한 외부인. 상황에 따라서는 우리를 방패막이로 사용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미 어느 정도 유대감이 있는 이들에게 있어 우리는 별다른 의미가 없으니까. 더불어 등반가가 사라지면 이들은 다시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권능으로 봤을 때 숭배자는 아니었지만 그들과 비슷한 판단과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것.
어색하지 않게 마그마 요정 옆에 섰다.
“이후에 또 누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우리 둘이 이곳에 온 등반가인 거 같네요.”
대충 인원도 모였겠다.
“이미 밤이 지났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희생자가 나왔다는 말이기도 하죠.”
희생자라는 말에 테이포드와 마그마 요정을 데리고 온 NPC의 얼굴이 굳는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게 있다.
“설마 아직 안 보셨나요? 나였으면 누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아침부터 찾아다녔을 거 같은데.”
묻고 있는 거다.
너희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가시죠, 범인 찾으러.”
테이포드를 빤히 쳐다봤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때는 본인이 낮의 존재라고 어필했는데 말이지. 진짜인지 좀 봐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