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2화 19일에 걸친 게임
찾아온 밤.
난 안광을 뿜고 있는 고나암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짜고짜 선택지를 준다고 하더라도 뭔지를 알아야 고르지.
우선 내가 있는 91층에 특수한 규칙이 있는 건 알겠다. 9시를 기점으로 강제로 밤이 찾아왔으니까. 이런 식의 환경 변화는 정상적이지 않다.
“밤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싶으면 밖으로 나가 밤의 기수와 대화해라. 그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어딘가로 숨던가. 원하면 내 집에 있는 것도 허락해 주지.”
“하나만 묻지. 넌 어느 쪽이냐?”
내게 낮과 밤 중 한 영역에 속하라고 말한다는 건 녀석 또한 둘 중 하나에는 속해 있다는 거였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여기서는 다음 층을 해금하기 위해서인가. 아무튼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난 아직 그게 뭔지 알 수 없고.
어쩌면 그냥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면 자동으로 해금되는 걸지도 모른다.
그거야 차차 알아가도록 하고 우선은 녀석의 대답을 기다려 보자.
“밤.”
“그렇군.”
난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그러지 않을까 싶기는 했다. 9시를 기다리고 있던 모습도 그렇고, 아까 낮에 녀석의 문을 두드렸을 때도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벽을 부수고 나서야 마주할 수 있었지.
여전히 어둠 너머에서는 말의 울음소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의 인기척이 들린다.
고나암이 말한 밤의 기수라는 게 저 말의 주인을 뜻하는 거 같은데.
무슨 선택을 할까. 단순히 내 스펙을 봤을 때는 밤을 영역으로 두는 편이 좋기는 하다.
야간 시야 스킬도 있거니와 밤을 부르는 자 칭호가 있어 밤일 때 스텟이 상승하니까. 단순히 생각하면 그렇기는 한데…….
“선택했어.”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나암의 눈이 번뜩인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말의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칭호, 밤을 부르는 자가 어둠을 반깁니다.]
[야간 시야(S) Lv.MAX]
어둠이 밝혀진다. 내게 있어 어둠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친숙한 느낌까지 든다.
예전에도 달칸이랑 뒹굴면서 잘 놀았었지. 여기도 크게 다르지 않을까 싶다.
물론 여기에 있는 건 전혀 다른 녀석이지만.
어둠 속에서 천천히 말을 끌고 오는 검은 갑옷의 기사. 척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검은 기운이 갑옷 틈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타고 있는 말도 살아 숨 쉬는 말이 아니다. 해골에 몸통은 불길로 이루어진 혼령마지. 묘하게 데스나이트와 닮긴 했는데 그런 일반적인 몬스터랑은 궤를 달리하는 분위기를 띤다.
뭐라고 해야 하나.
‘강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갑옷 뒤에 단 깃발. 붉은 바탕에 손가락 2개를 교차한 형태다.
아마 저게 밤의 영역을 뜻하는 표식 같은데.
“밤의 영역에 들어오기로 결정했구나. 좋은 선택이야.”
나를 따라 밖으로 나온 고나암이 입꼬리를 올린다.
별다른 반응 없이 어둠의 기수의 앞에 섰다. 투구 너머가 안 보인다. 시커먼 소용돌이만 눈에 보일 뿐.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이 검을 뽑는다. 뼈로 만들어진 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내게 손을 내민다.
“어둠의 권속이 되겠느냐.”
“아니.”
[검강]
[러브 앤 피스(SSS) Lv.3]
[절삭(S) Lv.MAX]
-콰아아아아악!
매끄럽고도 신속하게 혼돈검을 뽑아 녀석의 목을 날렸다.
손맛이 별로네. 근육과 뼈를 베는 느낌이 아니다. 아주 튼튼한 물풍선을 베어 내면 이런 기분이려나.
저항하다가 견딜 수 없는 충격이 들어오면 한 번에 잘려나가는.
-툭
“히이이이잉!”
짤막한 감상을 하고 있는 사이, 목을 잃은 기수가 바닥에 떨어졌고 주인을 잃은 혼령마가 몸을 세워 앞다리를 휘두르더니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진다.
어둠의 기수니 뭐니 해서 좀 강하나 했더니만 딱히 그런 거 같지는 않다.
툭. 떨어진 녀석의 갑옷을 발로 밀었다. 내부가 텅텅 비어 있다. 고스트 계열인가. 그런 느낌이라서 처음부터 신성력을 담아 공격한 거기는 하다. 설마 한 번에 쓰러질 줄은 몰랐지만.
“네, 네놈!”
“말했잖아. 선택했다고. 내 대답은 둘 다 꺼져야.”
“그러고도 이곳에서 무사할 거라 생각하는 거냐!”
고함을 지르는 고나암에게 시선을 던졌다.
“밤과 낮 중 한 곳을 선택하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애초에 선택지가 2개뿐인 거부터가 함정 같다고.”
선택지라는 게 참 웃긴 게 주어지면 내가 결정하는 거 같지만, 다르게 보면 할 수 있는 행동을 선택지의 수만큼으로만 좁혀 버리는 행위기도 하다.
밤의 영역에 들어서면 낮에 활동할 수 없고, 낮의 영역에 속하면 밤에 활동할 수 없다?
뭐 하러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지? 그냥 활동하고 싶은 시간대에 활동하면 되면 되는데 말이야.
게다가…….
“여긴 정상이 아니야. 환경을 바꿀 정도의 특수한 규칙이 있지. 이런 걸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지.”
몇 가지 예외 사항이 있을 수 있겠지만 크게는 2종류.
“재앙, 아니면 혼돈의 파편.”
여긴 말할 것도 없이 혼돈의 파편이겠지. 애초에 친절하게 말해 주지 않았던가. 90층대의 테마는 혼돈이라고.
그렇다는 건 뭘까? 결국 여기서 싸워야 하는 대상은 놈들이 맞다는 거 아닌가.
굳이 녀석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에서 놀아날 필요가 있나. 당장은 좀 편할지 모른다. 혼돈에 의해 만들어진 강력한 규칙에 저항하는 건 그것 자체로 힘든 일이었으니까.
다만 이후에는 썩 좋지 못할 거다. 결국에 놈들이 만들어 둔 규칙 내에서 놀아나게 될 테니까.
굳이 내가 불리한 조건에서 싸워야 할 이유는 없었다.
“후회할 거다. 네 선택은 이미 다른 이들에게 알려졌을 테니까.”
“방금 달려간 말이 그런 역할이었나 보군. 어쩐지 주인이 죽었는데도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가더라.”
혼령마가 미친 듯이 뛰어가길래 왜 저러나 했더니만 본인의 주인이 죽었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나.
하기야, 주인을 태우고 갔던 녀석이 홀로 돌아오면 눈치 없는 멍청이도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있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혼령마도 바로 베어 버릴 거 그랬네.
[밤의 기수를 살해했습니다.]
[어둠의 영역에 들어선 이들은 당신을 죽이기 위해 찾아올 것입니다.]
기수 하나 죽였다고 바로 적으로 돌리는 것 봐라.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혼돈의 파편은 혼란을 불러들이는 존재. 어떻게든 갈등을 만들어 내고 서로를 적대시하게 만든다.
[당신의 소속이 낮으로 지정됩니다.]
[낮의 존재는 밤에 활동할 수 없습니다.]
[통금령이 내려집니다!]
-치지지지직!
알 수 없는 법칙이 나를 구속하려 든다.
중력이 한 번에 올라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공간 자체가 나를 거부하는 것만 같다.
너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고. 멋대로 돌아다닐 수 없다고.
혼돈이 비틀려 만들어진 규칙. 델버튼의 역병의 안개가 그러했고, 라프테의 강제되는 실수가 그러했다.
91층에 있는 녀석은 이게 능력인 거 같은데.
보통은 저항하지 못하고 당하고 말았겠지만.
[혼돈이 규칙을 일그러트립니다!]
[당신의 유형은 정의할 수 없는 혼돈입니다!]
그동안 나도 폼으로 위로 올라온 게 아니다. 스펙이 올라갔으며 특히 90층을 넘어서며 겪은 혼돈의 구간, 그곳에서 상당한 혼돈 수치를 얻을 수 있었으니.
“난 내 마음대로 돌아다닐 거야.”
-파지지지지직!
-카아아앙!
경고음을 내며 떠오르던 메시지가 깨져 버린다.
[통금령에 저항합니다!]
[자유로운 자!]
[당신은 밤의 존재가 아님에도 밤에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새로운 역할이 주어집니다.]
뭐야 이건.
그냥 밤의 존재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나?
단순히 활동 시간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거 같다.
내가 혼돈 수치가 높은 것은 맞지만 놈들의 모든 것을 무시할 정도의 그건 아닐 텐데. 완전히는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는 했다.
산들바람이 분다고 몸이 날아가지는 않지만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반대도 마찬가지. 놈들에게 있어 나는 변수. 그것도 언제 어떤 순간에 찔러 들어올지 모르는 송곳 같은 존재였다.
새로운 역할이라. 난 다음 메시지가 생기길 기다렸고.
[역할 지정 완료]
곧 귓가에 속삭이듯 은밀하게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은 첩자입니다.]
첩자?
뜬금없는 단어에 의문이 들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움직일 수 있는 거지? 네 녀석, 특수 역할을 얻었구나!”
“워워, 잠깐.”
고나암, 저 녀석이 수작을 부리기 전에 제압해야 한다는 것.
피리 같은 것을 꺼내 세차게 불려는 녀석의 손목을 붙잡았다. 즉각 반응한 녀석이 손을 뻗자 튀어나오는 칼날.
평소에는 옷소매에 숨기고 다니는 건가. 암살하기 딱 좋은 무기인 거 같기는 한데 기습에 실패하면 그냥 짧은 단검일 뿐이다.
오히려 불편하기 짝이 없지. 팔뚝에 고정되어 있어서 자유롭게 휘두르기도 힘들 테니까.
-꽈드득
팔을 교차하며 녀석의 팔꿈치를 움켜잡았다.
단련된 몸이라 한들 관절은 비교적 약할 수밖에 없다. 엄지를 쑤셔 넣다시피 집어넣었다.
녀석이 내 손을 떨쳐 내려 했으나 달라붙기를 사용한 만큼 그럴 수는 없었고.
-콰직!
“크아아아악!”
“너랑은 대화할 게 남은 거 같아서 말이야.”
다행히 밤은 길었고, 대화할 주제는 많았다.
소리를 지르려는 녀석의 입을 틀어막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 *
날이 밝았다. 햇빛 쨍쨍하고 좋네. 청명한 하늘이 잘 보인다.
왜냐, 이제 이 집에는 지붕도 없거든.
“그냥 쉽게 쉽게 가면 될 것을 왜 그리 날뛰는지.”
고나암과 대화를 하는 건 쉽지 않았다. 몇 차례 더 전투를 벌이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으니까.
그것마저도 길지 않았지만. 대화를 하며 기회를 엿보더니 찰나의 순간에 자폭해 버렸다.
동귀어진을 노린 거 같았지만 나도 자폭에는 일가견이 있어서 별다른 피해 없이 피할 수 있었다.
“지독하네. 나도 굳이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자폭이라니.”
“그에에.”
딱히 녀석과 사이가 좋아서 살려 두려던 건 아니고, 밤의 존재인 녀석을 이용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랬었다.
지금이야 죽어 버렸으니 아무 의미 없지만.
도대체 내게 무슨 악감정이 있다고 이렇게까지 할까.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좀 알겠군.”
짧은 대화를 통해 알아낸 정보도 있었고, 무엇보다 이거…….
“룰 북이라.”
혹시나 도움이 되는 게 없을까 싶어 집을 뒤진 결과 낡은 공책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고나암이 쓴 것으로 보이는 메모도 꽤 적혀 있는 물건. 해가 떠오르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내려갔고, 지금은 대략적인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91층에는 혼돈의 파편이 있다. 녀석의 이름은 루두라도.
“이름 말고는 별다른 정보가 없어.”
외형이라든가, 녀석을 이루고 있는 개념들이라든가 그런 것도 같이 적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래도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그건 마주치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니까. 보기만 한다면 권능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중요한 건 이거.
“19일에 거친 게임.”
밤과 낮.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진행되는 91층의 생존 게임이 있다.
자잘한 규칙이 있었지만 간단하게 생각하면 마피아 게임.
고나암이 자폭을 해서까지 나를 죽이려 했던 이유가 있었다. 내가 낮의 영역에 있는 이들에게 고나암이 밤의 존재라는 것을 알리면 목이 매달릴 테니까.
게임을 끝낼 방법은 총 3개.
상대 진영을 전멸시키거나, 19일이 지나거나, 게임을 진행하는 주체.
“루두라도를 잡아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