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화 아홉 시
흔히들 첫인상이 앞으로의 인상을 책임진다 말했으며, 오해는 쌓이기 쉽지만 풀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만큼 한번 선입견을 가지고 나면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해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인데.
“아, 수상한 사람 아니라고.”
“크윽! 수상한 놈이 아니라 미친놈이었군.”
그런 의미에서 난 효율적으로 해명하기를 포기했다.
자꾸 문을 걸어 잠그잖아. 난 그래도 신사적으로 행동하려 했는데 말도 안 섞고, 없는 사람 취급을 하니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평온한 언덕 위. 단아하게 꾸며져 있던 오두막의 한쪽 벽면이 통째로 날아갔다.
그래도 안에 있는 살림살이는 부수고 싶지 않아 얌전하게 벽만 뜯어냈다.
안에 있던 녀석이 노성을 내지르며 막으려 했지만, 내 손은 강하고 나무로 된 벽은 약할 따름이었으니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늦었지만 떡 받으세요. 맛이 좋다고요?”
“닥쳐, 이 자식아!”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진짜 맛있는데. 상점에도 떡은 따로 팔지 않아서 개인 거래로 힘들게 구한 시루떡이다.
한 조각 떼서 건넸더니 손을 쳐내길래 내가 조금 먹었다. 단팥이 달달한 게 제대로 만들었네.
탑에 갇혀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요리 스킬을 익혀서 그런가 요즘 들어 식탐이 좀 생긴 거 같다.
이왕 먹을 거면 맛있게 먹고 싶다고 해야 하나.
덕춘이와 함께 떡을 나눠 먹고 있는 모습을 질린 표정으로 보고 있는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뭐냐. 이제 와서 예의 차리기는 그른 거 같고 통성명이나 하자. 이블아이라고 해.”
“위로 올라오는 놈들 중에 정상인이 별로 없는 건 알았지만 넌 유독 심하군.”
“나 정도면 양반인데? 다른 애들 보면 기겁을 하겠군.”
“이번 세대가 또라이 집단이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아.”
그러면서도 내 손을 잡고 일어선 상대방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났지만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앞에 있는 녀석은 NPC였으니까.
‘90층대에는 NPC가 머물고 있군.’
별거 아닌 거 같아 보이지만 제법 유용한 정보였다.
적어도 90층대에는 NPC가 살아갈 만한 환경이 주어졌다는 거니까.
특히나 NPC는 본인의 역할을 다하거나 코인을 대가로 내놓지 않으면 자아를 유지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이 녀석도 나름 역할이 있다는 거겠지.’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아마 등반가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는 게 아닐까.
뜯겨 나간 벽 너머로 보이는 집 안 풍경은 그리 특별할 게 없었으니, 이곳에 머물며 뭔가를 만들거나 파는 일은 안 할 거 같아서.
“후우. 내 팔자가 이런 걸 따져 봐야 의미 없지. 고나암이라고 한다.”
체념했는지 길게 한숨을 내뱉은 녀석이 자기소개를 한다.
뭐가 됐든 90층대에 있는 NPC. 보통 녀석은 아닐 거다. 숭배자도 아닌 거 같고. 만약 그런 거였다면 내 모습을 보자마자 공격했거나 수작을 벌였을 거다.
적어도 숭배자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는 반드시 처단해야 할 적이었으니.
그래도 확실한 게 좋으니까.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즉!
순간적으로 눈이 따끔하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많이 없다. 상대방이 강력한 존재이거나, 내 권능에 저항할 만큼 수준 높은 권능이나 칭호 등을 가지고 있을 경우.
아니나 다를까.
[SSS급 권능, 내면의 통찰자가 번뜩입니다!]
[내면의 통찰자가 별을 주시하는 눈에 저항합니다.]
고나암이 가지고 있는 권능이 내 권능을 막아 내고 있다.
현자인 존 트레일러 이후에 내 권능을 막아 낸 이가 있었던가. 물론 같은 등급이라도 상성이 존재하고 자잘한 보조값이 다른 만큼 억지로 밀어붙이면 정보를 긁어낼 수도 있을 거 같기는 하다.
영 아니면 혼돈을 섞는 방법도 있고.
“알고는 있었지만 만나자마자 하는 짓이라는 게 염탐인가. 무례하기 짝이 없군.”
“아, 미안. 습관이라. 초면이라 그랬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라서 말이지. 나도 용기 내서 말 건 거라고?”
“말이나 못 하면 차라리 낫겠군그래.”
조금 더 골려 주고 싶지만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이미 들킨 상황, 구태여 무리해서 녀석의 정보를 읽을 필요는 없어서.
만약 내게 악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어떻게든 반응을 보였을 거고, 그랬으면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면 그만이었다.
이제 처음 만난 NPC와 벌써부터 척질 필요는 없으니 적당히 하는 편이 좋겠지.
‘이미 척을 진 것도 같고.’
살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털어냈다. 사람이 쿨할 줄도 알아야지.
집 한쪽을 없애 놓고 할 말은 아니었지만 뜨뜻미지근하게 시간을 끄는 것보다는 이편이 낫다 싶었다.
“그래서 할 말은?”
“이곳에 대한 정보. 뭐 하나 제대로 된 정보가 있어야지.”
“이런 말을 하는 걸 보아하니 등반가는 등반가인 모양이군.”
쯧. 짧게 혀를 찬 고나암이 턱 끝으로 집안을 가리키더니 소파 위에 흩어진 잔해를 털어 내고 자리에 앉는다.
그럼 나도.
-똑똑
매너 있게 노크를 했고.
“누구 놀리냐! 지랄 말고 그냥 앉아!”
“문은 남아 있길래. 그, 성격이 좀 불같네.”
“이런 씨!”
울컥한 녀석이 소리를 질렀다.
* * *
대화는 길지 않았다. 애초에 성질낼 줄이나 알지 그리 말재주가 좋은 녀석은 아니었다.
고나암이 들었다면 한소리 했겠지만 속마음을 듣지는 못할 테니까.
“내가 감이 정말 좋은 편이라서 말인데, 네놈이 지금 실례될 만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군.”
“어허. 무슨 소리. 난 추호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
눈치 빠른 녀석. 이것도 권능의 힘이겠지?
호록. 고나암이 내오지 않아 직접 탄 차를 마시며 말을 마쳤다.
짧은 대화였지만 몇 가지 유용한 정보를 알아냈다.
‘90층대 필드는 상당히 넓고 다양한 구역으로 나뉘어 있어.’
이번 구간은 해금을 통해 진행된다고 했던가. 그게 뭔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있는 구역이 91층. 다음 구역은 92층. 내가 나아가는 만큼 층이 올라가는 것이라 보면 편했다.
그동안 등반이 수직구조였던 것과 달리 수평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새롭기는 하다만.
“이해가 안 되는군. 이런 식이면 굳이 위로 올라갈 필요가 없지 않나?”
“이전에는 좀 달랐고?”
심드렁하게 답하는 녀석의 말에 머리를 굴렸다.
생각해 보면 그건 또 아닌 거 같기도 하다. 위로 올라갈수록 온갖 위험이 다가와서 반강제적으로 움직이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하위층은 좀 달랐다.
냉기나 열기와 같이 버티고 앉아 있기에는 환경이 혹독해서 벗어나고 싶었던 곳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등반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거나 위로 올라가 얻을 보상이 탐나서 움직인 경향도 있었다.
상위층은 어떠했던가.
그곳 또한 멸망에 다가가는 세계인 만큼 다양한 위험이 쏟아졌으나 어떻게 구석에만 박혀 있어도 어찌 저찌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성장 한계에 막힌 이들이 상위 헌터들이고.
90층? 거긴 말할 것도 없다. 당장 절반이 넘는 이들이 그곳에 머물며 위로 올라가기를 거부했으니까.
대충 종합해 보자면.
“애초에 위로 올라갈 이들만 왔다는 거군.”
“하는 짓과 달리 머리는 좀 돌아가네. 너 같은 녀석이 제일 위험해. 뭔 짓을 할지 모르는데 그렇다고 멍청한 것도 아니거든. 종잡을 수가 없어.”
“칭찬으로 듣지.”
“빌어먹게 긍정적이기도 해라.”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주무른 녀석이 날 바라본다.
“말은 이렇게 해도 여기가 안전한 곳이라는 뜻은 아니야.”
“그렇겠지. 안전지대인 것도 아닌데. 오면서 몬스터도 좀 잡았고.”
“몬스터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지. 그런 건 네게 장애물도 안 되는 잡것들이니까.”
그렇기는 하지. 알짱거리는 게 좀 귀찮기는 한데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정도는 아니다.
품에서 시가를 꺼낸 고나암이 불을 붙인다. 후우. 길게 연기를 내뿜고는 벽걸이 시계를 살핀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 벽에는 괘종시계, 테이블에는 탁상 시계.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마당에도 해시계가 하나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좀 특이한 취향인가 싶기도 했으나.
‘시간에 신경 쓰는 NPC는 처음이군.’
탑의 특성을 생각하면 이상한 점이 있었다.
당장 나도 처음 탑에 들어왔을 때는 시계를 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작전을 세우고 계획에 맞춰 행동하기 위해서는 시간 측정이 필요했으니까.
지금은 안 쓴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 보면 시계가 망가지기도 쉬웠고 막상 탑에 들어와 보니 시간 개념이 흐릿해져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이곳은 밤낮 개념이 많이 없다. 내가 있던 곳이 밤이었더라도 위로 올라가면 낮일 수 있고, 층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르기도 했으며 상위층은 아예 며칠, 몇 달씩 시간이 흐르기도 했으니까.
안 그래도 시간 개념이 혼잡하기 짝이 없는데, 등반가마다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시점이 다르니 시간이 의미를 잃을 수밖에.
지금은 탑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는지도 정확히 모르겠다. 그저 지레짐작하고 있을 뿐이지.
NPC라고 다를 거 같지는 않다. 오히려 더 무감각하지 싶다. 이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 하니까.
단순 취향? 그럴 리가. 그런 거라면 사방에 시계를 놔두지는 않았겠지.
뭔가가 있는 거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내게 말하지 않은 게 더 있군.”
“역시 눈치가 빨라. 아, 이번에는 진짜 칭찬이 맞아.”
손끝으로 담뱃재를 털어 낸 고나암이 내게 손가락 2개를 펼친다.
“선택지를 2개 주도록 하지. 빠르게 고르는 게 좋을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선택지는 줄어들 테니까. 먼저 하나.”
-우우우우웅
하늘이 어두워진다.
방금까지만 해도 날이 꽤 밝았던 거 같은데 먹구름이 밀려오기라도 한 건지 빠르게 햇빛이 밀려나고 있었다.
“가능한 빠르게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찾아. 멀쩡한 집이면 가장 좋겠지만 놀랍게도 자네가 이 근방에 있는 유일한 집을 이 꼴로 만들었지.”
“실수였다니까 그러네.”
“닥치고, 두 번째.”
스읍. 담배를 머금은 녀석이 느긋하게 연기를 내뱉는다.
“밤에 속하도록 하게.”
“질문.”
녀석의 말에 손을 들었다.
말해 보라며 손을 내젓는 녀석.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뜬금포로 밤에 속하라는 게 뭔 소리야. 은유적인 표현인가. 이 미친 탑은 가끔 은유적인 표현 같은 게 실제로 일어나는 곳이라 멋대로 생각했다가는 손해 보기 딱 좋았다.
무슨 소린지 알았는지 녀석도 고개를 끄덕인다.
“간단해. 밤에 속하면 밤에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 대신 낮에는 못 움직여. 반대도 마찬가지. 밤에 속하지 못한 자는 9시가 지나면 나갈 수 없지.”
흐음. 살짝 눈살을 찌푸린 녀석이 말을 잇는다.
“안 나가는 편이 맞다고 해야 하나. 나가 봤자 좋은 꼴 보기는 힘들거든. 아무튼.”
녀석의 반쯤 탄 시가로 시계를 가리켰다.
째깍거리며 움직이는 초침.
-대애애앵
종소리와 함께 시계를 9시를 가리켰다.
“선택할 시간이야, 이블아이.”
어둠이 몰려온다.
새까만 하늘.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몬스터의 괴성조차 들리지 않는 공간. 달도 별도 뜨지 않은 공간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붉게 타오르는 담뱃불과 푸르게 빛나는 녀석의 눈동자뿐이었다.
-히이이이잉!
거리를 알 수 없는 저 어딘가에서부터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