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0화 지나가던 사람인데요
91층. 많은 의미가 있었으나 뺨을 때리며 정신을 차렸다.
괜히 감정적으로 휘둘려 봤자 좋을 게 없다. 안전지대를 벗어난 시점에서 어떤 위협이 다가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얼빠지게 있다가는 곧장 안전지대로 돌아가 머쓱하게 머리나 긁을 게 뻔했다.
“우선 근처에 적은 없고.”
습관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권능까지 사용해 살펴봤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공기 중에 유독가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지 위에 혈흔이 남아 있거나 전투의 흔적도 없었다.
은신 스킬을 쓴 채 매복한 녀석은 당연히 없고, 뭐랄까.
“생각보다는 평범하군.”
“그에에.”
덕춘이도 공감인지 화답한다. 첫인상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방심할 생각은 없다.
처음에는 무난했던 필드도 겪어 보면 개판인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라서.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하는 말인데…….
“환경이 중요하기는 한데 정말 중요한 건 어떤 놈들이 있느냐야.”
풀이 돋아난 초원이라도 그 위에 완전 무장 한 병력들이 싸우면 난장판이 되는 거고, 온갖 날짐승이 돌아다니는 숲도 늑대 따윈 맨손으로 찢어 버리는 이들이 모여 있으면 그냥 소풍 나온 거다.
과연 여기는 어떤 일이 벌어지려나.
난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가며 시스템 메시지를 기다렸다. 각 층대마다 첫 번째 층에 들어서면 간단한 설명을 해 주니까.
[91-99층은 혼돈 구간입니다.]
[해당 구간은 해금解禁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오호.”
눈썹을 까딱였다.
테마 자체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전에는 층대마다 고유의 테마가 있었고, 상위층에 오르고 나서는 시나리오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90층대 역시 시나리오 아니면 고유 테마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마지막 구간인 만큼 혼돈이 중심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혼돈이 메인인 만큼 뭔가가 비틀려 있지는 않을까 싶기는 하다만 그건 겪어 보면 되는 거고 신경 쓰이는 건 저거.
“해금 형식이라.”
해금이란 무엇인가. 금지되었거나 봉인되었던 것이 풀리는 걸 뜻하지 않는가.
무엇이 해금된다는 걸까. 일단 스킬창과 인벤토리, 스테이터스, 권능과 칭호 효과에 아공간까지 전부 열었다.
다행히 제한된 기능은 없다. 가볍게 몸을 움직여 봤을 때 신체적으로 변화가 있지도 않다.
혹시 기억이나 정신적인 뭔가가 바뀌었나 의심도 해 보았지만.
‘그건 아니야. 그런 거였으면 나한테는 의미가 없어. 만약 그랬다면 정신 보호나 혼돈에 의해 반응이 왔을 거고.’
이것들만큼은 시스템에 저항할 정도로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다.
종합적으로 보고 판단했을 때 알 수 있는 건…….
“내가 아니라 필드와 관련이 있는 거로군.”
“그엑. 그엑.”
그게 뭔지는 지금부터 알아봐야겠다.
상황으로 봐서는 91층으로 올라온 사람들 모두 흩어진 거 같은데.
설마 나 혼자만 따로 떨어진 건가?
몇 번 그런 적이 있어서 혹시나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냥냥펀치]: 내 주변에 아무도 없냥!
[니머리 탈모]: 거긴 어디야? 내가 있는 쪽이랑 좀 다른 느낌인데.
[정수리 핥짝]: 당연히 다르겠지 등시나. 니가 찍은 사진은 강가고 냥펀은 건물 보이는데.
[니머리 탈모]: 아하!
[정수리 핥짝]: 아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얘 진짜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지?
[냥냥펀치]: 몸이 좋으면 머리는 쉬어도 된댔엉.
[니머리 탈모]: 하하하하! 내가 몸이 좋긴 해!
[정수리 핥짝]: 아… 그래서 모근 활동이 멈췄구나. 오케이. 납득 완료.
[니머리 탈모]: 어?
멤버들이 떠들고 있는 거로 봐서는 그건 아닌 거 같다.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사진도 올려놨는데 내가 봐도 접점이 없다.
완전히 흩어졌다는 이야기. 우리뿐만이 아니겠지. 10명 중 4명이 흩어진 상황이니 다른 이들도 비슷하다고 보는 게 맞았다.
[쁘띠공듀]: 요긴 오디죠옹? 날씨가 쾌☆청하네용!
나도 일단 사진을 찍어 올렸고.
[냥냥펀치]: 공듀는 공듀야… 우리끼리 있어도 콘셉트는 지켱…….
[정수리 핥짝]: 저것도 병이라니까, 지랄병.
[니머리 탈모]: 내가 항상 응원하는 거 알지? 자고로 사람이 뚝심이 있어야 하는 법. 보기 좋아!
“이 자식들이.”
녀석들은 저마다 뭐라 했지만 사뿐히 무시해 줬다. 이 정도는 이제 아무렇지 않다.
“그에에.”
딱한 눈으로 어깨를 두들겨 주는 덕춘이.
비록 말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마음은 통했다.
이런 걸 이제는 익숙해 하면서 넘어갈 수 있는 나 자신, 정말 괜찮은 건가.
괜스레 울적해졌지만 정신 차리자. 이제 막 위로 올라왔는데 벌써부터 기운 빠지면 안 되지.
자, 그럼 어떻게 할까.
“합류부터 해 버려?”
아니다. 이건 리스크가 크다. 냥펀이라면 몰라도 핥짝이나 탈모맨은 한곳에 머무는 스타일이 아니다. 분명 뭔가를 하려고 하겠지.
냥펀도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힌 상태면 모를까 필드 진입 초기에는 정보를 모으기 위해 움직일 가능성이 크고.
계속해서 바뀌는 위치. 얼마나 큰지 알 수 없는 필드. 지금은 각자 이동하는 게 나았다.
그럼 어디로 가는 게 좋으려나. 눈에 띄는 곳이 하나 있기는 한데.
시선을 멀리 던졌다. 내가 있는 곳은 완만한 언덕이 있는 초원.
언덕이라 하기에는 높고 산맥이라 하기에는 낮은 동산이 하나 있다. 그 위에 보이는 건 높이 자란 나무 하나와 오두막.
굴뚝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니 누군가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여기도 NPC가 있는 건가, 아니면 다른 등반가? 설마 혼돈의 파편은 아니겠지. 부디 그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지만. 만약 진짜 저곳에 혼돈의 파편이 있다면…….
‘그때는 확인해 보는 거지.’
혼돈을 통해 강해진 내가 녀석들을 잡을 수 있는지.
80층대를 벗어난 만큼 놈들에게 걸린 제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전력으로 맞부딪칠 수 있다는 말.
이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난.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가능성이 있다.
* * *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눈으로 봤을 때는 그리 멀지 않아 보였는데 막상 가 보면 멀리 떨어져 있는.
특히나 초원처럼 시야가 트인 공간이라면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가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는 거였다. 이동을 방해하는 몬스터들도 좀 있고.
-콰아아아앙!
“크르르륵!”
“캬하아아악!”
폭발에 휘말려 날아가는 몬스터 두 마리가 으르렁거린다.
놈들이 끝이 아니다. 영악하게 거리를 벌려 폭발 범위에서 벗어나 있던 놈들 몇 마리가 뒤를 노리고 도약했다.
생긴 건 늑대같이 생겼는데 덩치는 소만 하다. 아니 소인데 늑대같이 생긴 건가? 늑대 몸통에 소머리를 달고 있으니 잘 모르겠네.
나름 몬스터 공부 좀 했다고 자부하는데 어째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처음 보는 놈들이 많아지는 기분이다.
어쨌든.
-퍼엉!
회전하는 동시에 달려드는 놈들의 복부를 걷어찼다. 처음 맞은 녀석은 그대로 즉사. 옆에 있는 두 마리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륵! 그르륵!”
“크라락!”
몸통 절반이 터졌는데도 흉악하게 이빨을 딱딱거리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콰직!
머리통을 밟아 부수어 확실하게 마무리 지었다.
“몬스터의 생명력은 언제 봐도 징그럽다니까.”
나를 비롯해 위로 올라온 등반가들한테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이런 놈들이 밖으로 나가면 어떨지.
방금 잡은 놈들 끽해야 5성급이다. 이제는 맨손으로도 찢어 버릴 수 있지만 내가 탑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등장하면 국가적으로 경계심을 올리고는 했다.
그만큼 잡기 힘들고 잡을 사람도 별로 없었으니까.
피해는 말할 것도 없이 컸으며, 5성급 이상을 잡을 수 있는 헌터의 몸값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언론의 욕을 처먹더라도 하기 싫다고 해외로 이적하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바로 조용해졌지.
모든 헌터가 그런 건 아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인간들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도 탑에 들어올 때 그런 놈들이랑 엮였었지.”
짐꾼으로 들어갔더니만 몬스터랑 싸워 보라고 조롱했었으니까.
그놈들 등급도 끽해 봐야 E급이었는데. 이렇게 생각하니 바닥부터 썩어 있었네. 이쯤 되면 여태까지 안 망하고 일상을 유지했던 게 기적 같았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더 심해졌을까, 아니면 정신 차리고 나아졌을까.
분명 게이트도 늘어나고 등장하는 몬스터 등급도 높아졌을 텐데. 재앙들도 활동하기 시작했을 거고.
아니, 이미 활동 중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들어오기 전에도 3마리 정도는 있었던 거 같았고, 저번에 들어온 이들이 증언했을 때 추가적으로 등장한 놈들이 있다고도 들었다.
여기에 에이션트 몬스터나 퍼스트 몬스터까지 나타나면?
생각하기도 싫다.
-투둑
혼돈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 냈다.
“오지혁이 잘하고 있을지 모르겠군.”
녀석이 김소담과 밖으로 나간 지도 며칠이 흘렀다. 바깥은 탑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니 끽해야 일주일 좀 넘게 흐르지 않았을까 싶지만.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동시에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다음 초대가 언제일지 모르겠네.’
오지혁이 밖으로 나가면서 약속한 게 있다. 정확히 말하면 쁘찡 연합 전체에 했던 것.
예전에는 대형길드에서 탑의 초대를 받을 확률을 높이는 방법을 공유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다 까발렸으니까.
달리 말하면 쁘찡 연합이 자리를 잡고 활동하게 된다면 우리가 원하는 소식을 가지고 새로운 등반가가 탑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는 것.
폐쇄적인 탑에 조금이지만 소식통이 생기는 거다.
잡다한 생각을 하는 사이 동산에 도착했다. 클린으로 갑옷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클린을 쓰면 냄새도 같이 날아가서 좋단 말이지.
“계세요?”
공손하게 동산 위 오두막에 노크를 했다. 상대방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만큼 첫인상은 좋은 게 좋을 터.
보물 주머니에서 떡을 꺼내 들었다. 자고로 선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 꽃 같은 걸 가져갈까도 했지만 그건 좀 오버 하는 거 같아서 이걸로 골랐다.
노크 소리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여전히 굴뚝으로 연기는 피어오르고, 마당으로 보이는 곳에는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는 도끼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장작들이 널브러져 있다.
분명 사람이 사는 곳이긴 한데. 잠시 자리를 비웠나.
문을 열어 봐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누구요?”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으나 초인의 영역에 들어선 만큼 충분히 들렸다.
“이번에 위로 올라온 사람인데요. 떡 좀 돌리러 왔습니다. 하하하.”
이어지는 침묵.
“수상한 사람이군.”
“아니, 아니. 안 수상한데요. 진짜로요.”
억울한 노릇이다. 내가 뭘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말 좀 건 것뿐인데.
“그저 길 가던 사람일 뿐입니다. 그냥 혼자 돌아다니다 보니 적적하기도 하고, 이쪽에 아는 게 없어서 대화나 좀 하려는 거뿐이에요. 혹시 알아요? 그쪽도 흥미가 동할 만한 이야깃거리를 알고 있을지? 나였으면 얼굴이라도 봤다! 아! 서러워서 못 살겠다!”
내가 계속 앞에서 서성거리며 대화 좀 할 수 있냐고 중얼거리자 그냥 갈 놈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깊은 한 숨과 함께 문이 살짝 열렸다.
두 눈에 경계심이 가득 담긴 남자가 얼굴을 내민다.
“미리 말하지만 별 시답잖은 말이면…….”
순간적으로 마주치는 시선. 상대의 눈이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였고.
-쾅!
상대방은 가차 없이 문을 걸어 잠궜다.
빌어먹을. 펠라인 세트 벗고 있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