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화 91층
90층 이벤트가 끝나고 거점에 남겨진 난 거실에 드러누웠다.
원래라면 니아나가 옆에 있어야 했지만.
“탑이란 놈들은 암만 생각해도 인정머리가 없어.”
“그에에.”
밖에 나가 강화석을 돌리고 집에 돌아왔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더 웃긴 건 니아나의 정체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 이미 경험이 있던 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새로운 기회. 말하지 않았던가. 90층에 있는 NPC에게도 탑은 기회를 준다고. 본인 입으로도 말했었다.
이벤트에서 충분한 성과를 달성한 이에게 기회가 생긴다. 나는 그 기준을 초과해서 달성했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여기까지는 OK인데.
“이야아아앗!”
“으억!”
갑작스레 소파에서 뛰어내리며 내게 드롭킥을 날리는 릴카. 그대로 복부를 얻어맞고 바닥을 뒹굴었다.
-따악!
“아파!”
“내가 더 아프거든?”
딱밤으로 릴카를 응징해 줬다.
그렇다. 90층 안전지대에 있는 등반가에게는 담당 NPC가 붙는다. 니아나가 사라지면서 나를 담당하던 이가 사라졌고, 그로 인해 임시로 배정된 녀석이 있었으니 놀랍지도 않게 릴카였다.
“퀘스트도 못 깼으면서 말이 많앙!”
“아니, 애초에 그런 걸 가져오라 한 거 자체가 너무한 거 아니냐.”
릴카가 준 강제 퀘스트.
그동안은 녀석이 준 퀘스트를 전부 클리어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라프테의 마지막 양심.
혼돈의 파편의 기억과 인격 일부가 남아 있는 아티팩트였고, 사실상 저주 걸린 물건이나 다를 바 없었다.
덕분에 90층으로 올라가기 전, 혼돈의 영역에 대비할 수는 있었지만 라프테의 기억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퀘스트 아이템인 목걸이가 망가지고 말았다.
애초에 사용하면 클리어가 안 되는 퀘스트. 릴카 또한 내게 정보를 주고 싶었던 거라 클리어 자체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미 친화도도 최대치고 계승자까지 된 마당에 퀘스트 하나 못 했다고 사이가 틀어지거나 페널티가 생길 일도 없고.
뭐, 불만은 살짝 있는 거 같았지만.
“망가진 거라도 가져왔어야징! 혼돈이 깃든 물건은 귀하다공!”
“에라이, 그런 저주받은 걸 가져와서 뭐 해. 됐고 이거나 고쳐 줘.”
난 팔찌를 벗어 릴카에게 던졌다.
뭐가 됐든 물건이면 냉큼 받아버리는 게 릴카. 저것도 직업병이다.
“와, 진짜 막 썼넹.”
“험하게 굴리기는 했지.”
내가 건넨 물건은 중량 팔찌. 등반 초기에 얻은 아티팩트지만 지금까지 꾸준히 사용하고 있다.
다른 장비나 무기는 등반을 하면서 바뀌었지만 저건 유용하게 써 댔지.
참 마음에 드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등급이 낮다는 것.
초반에는 문제없었지만 내 스펙이 늘어나고 상대하는 적이 강해지면서 C등급 아티팩트가 감당하기 버거워졌다.
나름 아낀다고 아끼기는 했는데 니아나와 대련하면서 균열이 갔다. 안 그래도 등급의 한계 때문에 불어 넣을 수 있는 마력이 한정되어 있는데 무리하게 쓴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마음 같아서는 비슷한 능력을 지닌 더 높은 등급의 아티팩트로 바꾸고 싶은데 매물이 마땅치 않아서.
상점창에도 안 팔고, 개인 거래로 올라오는 것도 딱히 없고, 화조국에도 없단다.
혹시나 해서 릴카한테 물어 봤으나.
“나도 가지고 있는 거 없엉. 마력을 중량으로 치환하는 거 자체가 어렵거든.”
“그러냐? 몇 개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인기가 없는 것도 한몫하징. 비슷한 수준의 기술이 들어간다면 더 강력하거나 편의성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으니깡. 그쪽이 더 잘 팔리기도 하고.”
아무래도 수요가 많지 않다 보니 외면받아서 생긴 문제 같다.
나야 잘 사용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저거 살 바에 좋은 방어구나 무기를 하나 더 맞추는 편이 스펙업에 도움이 될 거라.
사실 무게만 늘리고 싶은 거면 아티팩트가 아니라 스킬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고.
중량 증가 스킬을 익히고 있는 사람도 있기는 할 거다. 난 없으니 패스.
“흐음?”
이리저리 팔찌를 살피던 릴카가 꼬리를 흔든다. 뭔가 흥미로운 거라도 찾았나?
“이거 오래 썼징?”
“그치?”
“과연, 그래서 혼돈이 섞여 있었구낭! 잘 쓸게 고마, 으갸갸갸걍!”
자연스럽게 팔찌를 들고 퇴장하려는 녀석의 머리를 잡았다.
머리가 작아서인지 그립감이 훌륭하다니까. 어딜 자연스럽게 가지고 가려고.
“목걸이 대신 이거 쓰면 딱 좋단 말양!”
“아니, 뭘 만들려고. 내 아티팩트는 어떻게 하고.”
“좋았어. 그럼 이렇게 하장. 내가 많이 양보하는 거얏!”
뭘 양보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나 보기로 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녀석도 혼돈이 깃든 물건이 필요한 거 같고.
“혼돈이 깃든 물건은 찾기 힘들다는 건 알징?”
“알지.”
나도 그렇고 릴카도 그렇고 혼돈 수치가 있기는 하지만 어딘가에 영구적으로 혼돈을 집어넣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른 마기나 신성력과 달리 혼돈은 그 자체만으로는 별다른 형상을 띄지 않는다. 규칙에 저항하거나 다른 힘과 섞어 쓰면 또 모를까.
달리 말하면 혼돈을 집어넣더라도 순수한 혼돈을 넣기는 어렵다는 거다. 억지로 집어넣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 오랫동안 유지되기 어렵다.
그렇기에 혼돈이 담긴 물체는 귀하다. 내가 사용하는 혼돈검처럼 물질 자체가 혼돈과 연관이 되어 있던지, 중량 팔찌처럼 지속적으로 혼돈에 노출되어 자연스레 기운이 스며들던지 해야 한다.
릴카가 라프테의 목걸이를 원한 것도 이 때문일 거고.
“의뢰가 하나 있엉.”
이제야 좀 알겠군. 릴카는 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상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장인이기도 하다.
한곳에 머물러야 하는 NPC들에게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 파는 일도 한다는 것.
그동안 받아 왔던 퀘스트 대부분이 제작 재료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혼돈이 섞인 물건을 원하는 곳이라면.
“90층대에 있는 NPC겠군.”
“정답! 이건 중요하다고. 다음 퀘스트와도 연관이 있징.”
“설마 배달이냐.”
“에헤헤. 눈치챘구낭?”
당연히 채지. 못 채겠냐.
릴카가 비교적 자유롭게 여기저기 돌아다닌다고는 하나 완전히 제약 없이 다니는 건 아니다.
그럴 수 있었으면 같이 등반하면서 도움도 받고 했겠지. 대부분의 NPC와 친한 편인 거 같기는 하지만 모든 NPC와 우호적인 관계인 것도 아니고.
이전, 알리오스 때만 하더라도 그렇다. 둘이 안면은 있었지만 알리오스는 누군가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했고 릴카도 굳이 녀석의 영역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으니까.
나도 안으로 들어가는 데만 몇 번이나 죽었다.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리네.
아무튼.
“필요하면 줄 수 있지. 퀘스트도 받을 거고. 어차피 안 받겠다 하더라도 줄 거니까. 대신 중량 팔찌 대신할 건 주라.”
“때마침 의뢰인이 잡다한 걸 많이 가지고 있징. 팔찌는 아니지만 비슷한 뭔가가 있었던 거 같앙.”
“같다?”
릴카는 상인. 그것도 평범한 상인이 아니라 차원 상인으로도 일한 적 있는 베테랑이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물건에 대한 정보를 쉽게 잊지 않는다는 것. 그런 걸 기억하지 못한다면 애초에 혼자 상인으로 활동할 수 없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가능성은 2개 정도.
“상품 가치가 떨어지거나 지금은 없을 수도 있다는 거로군.”
“아마 후자는 아닐 거얌. 수집 욕구가 있는 편이라 어지간한 쓰레기가 아니면 안 버리거든.”
살포시 입가에 손가락을 대고 고개를 기울이던 녀석이 입을 연다.
“혼돈이 섞여 있는 물건이라 정보가 제대로 안 보였엉. 잠깐 보고 지나간 거라 살필 시간이 적기도 했지만 말이얌.”
“흐으음.”
명확하지는 않다 이거지.
어떻게 할까. 살짝 고민했지만 결론은 금방 나왔다.
이미 균열이 가서 더 쓸 수도 없거니와 수리할 수 있을지도 의문. 고치더라도 다시 망가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럴 바에는 다른 걸 찾아보는 게 낫지.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러자.”
“예에에에에! 믿고 있었징!”
신나서 등에 달라붙는 녀석. 목마를 탔다가 머리 위에 올라갔다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따악!
“아파앗!”
가차 없이 릴카의 정수리에 꿀밤을 먹여 줬다.
* * *
90층대에 올라온 지 2주일가량이 흘렀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지만 이래저래 일이 많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다.
이벤트를 겪는 데만 며칠이 걸렸고, 이후에 오지혁과 김소담이 나간 후 쁘찡 연합 내에서 이야기할 것들을 정리했다.
대부분 이준석이 처리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연합의 중심은 나라서 조금은 거들어야 했다.
이것 말고도 릴카가 중량 팔찌를 이용해 의뢰품을 만들 시간도 필요했고, 강화석을 얻은 멤버들과 김선혜가 강화된 스킬에 적응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사실상 탑의 마지막 안전지대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쉴 만큼 쉬고 준비할 수 있는 만큼 준비해야 했다.
나 역시 여러 준비를 마쳤다.
“포션은 되는 대로 챙겼고, 잡다한 용품도 있고, 식량도 이 정도면 뭐 어디 갇혀도 한 달은 버티겠지. 적당히 굶으면서 지내면 3개월도 가능할 거 같은데.”
그동안 탑에 당한 게 하도 많아서 식량이면 식량, 장비면 장비, 포션이면 포션.
소비적으로 사용할 것뿐만 아니라 생활용품, 스킬이나 권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됐을 때 사용할 아이템도 챙겼으니 마음이 다 든든해지는 기분이다.
이제 위로 오를 때가 됐다.
안전지대 포탈. 그 앞에 모여 있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나와 멤버들. 루키 그룹과 요정 클럽. 김선혜를 비롯한 상위 헌터들. 릴카.
릴카는 배웅해 주러 온 거니 사실상 등반가는 10명이 고작. 나머지는 안전지대에 머물기를 선택했다.
입맛이 쓴 건 어쩔 수 없지만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으니까. 혹시 아는가 여기 있다가도 마음이 바뀌어 위로 올라갈 마음이 생길지.
남을 사람은 남고 나아갈 사람은 나아가야 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올라온 거 아닌가? 우리 오기 전에는 90층대에 있는 사람 거의 없었잖아.”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네.”
탈모맨 녀석의 긍정적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객관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다. 우리는 선발대. 뒤를 이어 올라올 사람들도 있으니까.
쁘찡 연합 사람들은 물론이요, 세계 각지의 대형 길드원 중에도 있을 거고, 로얄 나이트도 80층대 후반까지 올라왔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녀석도 조만간 90층에 진입할 거 같고.
“가자.”
“으아아아앙. 편하고 좋았는뎅.”
“안 그래도 머물면서 몸이 찌뿌둥했는데 가서 좀 풀어야지.”
냥펀은 우는소리를 하고 핥짝이는 미련 없는지 팔을 뻗으며 스트레칭을 한다.
각자 마지막으로 몸을 풀었고.
“조심히 가궁, 내가 부탁 들어주는 거 잊지 망!”
“이걸 놔야 가지 않을까? 놔라, 말했다.”
가라면서 끈질기게 등짝을 잡고 있는 릴카를 떼어 냈다.
두 눈에 미련이 뚝뚝 떨어지만 별수 있나.
“다음에 보자.”
쓱,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고 포탈로 향했다.
익숙한 부유감. 이동 마법진이 발동되며 빛이 눈을 가렸다.
* * *
-우우우우우웅
[91층에 진입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단단한 지면이 발에 닿았다.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90층대.
알려진 정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공간이자, 수많은 영웅과 강자들이 올라섰다 쓰러지고 포기한 곳.
누군가는 넘을 수 없는 영역이라 말했으며 내가 계승한 이들도 99층 너머는 보지 못했다.
남들이 실패했다고 꺾이지 말자.
“이제는 내 차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