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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532화 (532/740)

532화 자격

난 순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살폈다.

분명 복지 어쩌구 하면서 탑은 90층대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개인 거점을 줬다.

이게 꽤 큰 메리트인 게 등반을 하다 보면 노숙도 자주 하고, 다른 등반가나 NPC랑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아서 혼자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개인행동을 자주 하는 나라 하더라도 마찬가지. 당장 이전 시나리오에서도 샤일과 움직이지 않았던가.

모처럼 남 의식 안 하면서 커뮤니티도 하고 개인 시간 좀 가져 보려 했으나.

“여기 내 거점인 거로 아는데.”

“어, 맞아.”

이제 막 목욕을 하려 했는지 따끈한 물이 가득한 욕조.

그곳에 선 한 여인이 날 바라봤다. 심장에 보이는 파란 빛. NPC의 상징인 블루 하트다.

탑에 들어오며 심장을 담보로 맡겼다는 증거.

벌써 머리 아프네. NPC가 왜 여기에 있는데.

“쯧. 새로 들어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들어올 줄이야. 눈치 좀 챙기지.”

“아니.”

등반가도 그렇지만 NPC들도 탑에 오래 있으면 상식이라는 게 파괴되는 건가. 어이없는 건 내 몫이지 왜 네가 그러냐.

것보다 내가 이곳에 올 거라는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난 내 궁금증을 밝혔고.

“그거야 뭐. 시스템이 89층을 클리어한 등반가가 생기면 그때 거점을 알려 주거든. 흐음.”

위아래로 날 살핀 녀석이 치맛단을 잡고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이제 보니 저거 메이드복이다.

“너를 위해 봉사해 줄 니아나라고 해.”

“그래, 반갑다. 이블아이다. 이쪽은 덕춘이.”

“그에에.”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이제는 느닷없는 상황에서 하는 통성명도 어색하지 않다.

적어도 이곳은 안전지대. 숭배자들도 없는 곳인 만큼 NPC가 나를 공격할 일은 없었으니까.

“나 혼자 쓰는 거 아니었나.”

“개인 거점이랬지 혼자 있다고는 안 했다고. 난 90층까지 오른 등반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지.”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쉰 니아나가 허리춤에 손을 얹는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등반가가 별로 없다 보니 이쪽에 배치된 NPC들은 탑의 영향을 좀 받거든. 나라고 하고 싶은 줄 알아?”

새침하게 날 쏘아본 녀석이 고개를 흔들고는 손끝으로 욕조에 담긴 물 온도를 확인한다.

“이런 식으로 메이드라도 하면서 나름의 역할을 하는 거야. 여기까지 왔으면 대충 알지? 우린 코인을 내든가 무언가 역할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

알다마다.

그래서 안전지대에 있는 NPC들이 장사를 하는 거 아니던가.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자아를 잃게 되니까.

날 계승자로 삼은 알리오스도 99층까지 오른 실력자였지만 NPC가 된 이상 그 규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고, 내가 화조국에 보석 세공사로 소개해 코인을 벌 방법을 마련해 줬었다.

다른 NPC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저기 이름을 알린 NPC든, 아니면 안전지대 어딘가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는 NPC든 코인을 벌어야 했으며 그것도 마땅치 않다면…….

‘어디 필드에서 시스템이 부여한 역할을 해야 하지.’

어떻게 따져도 안전 거점에 있는 편이 백배 낫다.

필드에 있으면 제대로 된 인프라가 없는 건 둘째치고 운이 나쁘면 죽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당장 내가 처리한 녀석들도 좀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마음 편히 살기에는 그리 좋지 못한 환경이다.

반면에 안전지대는 있을 건 다 있는 편이고.

이거야 중요한 게 아니다. 시스템이 복지를 위해 도움을 줄 녀석을 놔두었다고는 하나 정말 그게 전부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 부분이 궁금하기는 하다만.

“일단 나가. 씻을 거니까.”

“도와줘?”

축객령에 문밖으로 나가던 니아나가 고개를 내민다.

“그에.”

내가 뭐라 할 필요도 없이 덕춘이가 중지를 세운다. 역시 우리 덕춘이. 말하지 않아도 찰떡같이 행동한다니까.

“알아서 씻을 거니까 쉬고 있으라고.”

“나야 좋지!”

가볍게 녀석을 떠밀어 방해꾼을 없앤 뒤 옷을 벗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발끝부터 전해 오는 따뜻한 물.

크으. 감탄이 절로 난다. 이게 힐링이지. 간만에 물에 들어온 덕춘이도 마음에 드는지 헤엄을 쳐 댄다.

오랜만의 휴식. 제대로 즐길 생각이다.

* * *

뭔가 이상하다.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니라면 니아나 이 녀석은 분명 내가 쾌적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일 텐데.

“청소는 안 하냐?”

“에이, 귀찮게. 클린.”

-싸아아아

90층에 있다는 건 다른 의미로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소파에 드러누워 과자를 까먹고, 손가락 까딱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쓰레기를 치운다.

참고로 저 쓰레기 모두 내가 아니라 저 녀석이 놀고먹느라 생긴 거다.

분명 치우기는 하는데 아니꼽네. 내가 심성이 뒤틀린 건가.

“후우. 됐다.”

나 역시 적당히 바닥에 드러누웠다.

안전지대로 올라오고 이틀 동안 회복에 집중했다. 육체적인 상처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건 진작에 다 회복되었으니까.

그저 쉬지 않고 등반을 이어 오며 쌓인 정신적인 피로감을 해소하려 했을 뿐.

삼켰으면 소화를 하는 게 이치였고, 그동안의 난 객관적으로 봐도 무리해 온 게 맞았다.

커뮤니티도 최소한으로 줄여 간간이 멤버들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눈 게 전부.

초인의 강력한 회복력 덕분일까, 아니면 언제 덤빌지 모르는 공간에 있는 게 익숙해진 탓일까 생각보다 힐링은 짧았으며.

‘심심해.’

조금은 지루하기까지 했다. 조금은 배부른 소리지만 그런 걸 어쩌겠는가.

사실 밖으로 나가 90층도 구경하고 멤버나 다른 녀석들을 봐 볼까도 했지만.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즈

권능을 통해 본 니아나의 정보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다.

[니아나]

-90층 NPC.

-담당 등반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마련된 메이드!

-전투 전문입니다!

메이드고 나발이고 전투 전문인 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고.

-당신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담당 등반가의 자질이 충분할 시 특별 이벤트를 진행합니다.

-평가 중 (78퍼센트)

나를 평가하고 있다.

이틀 동안 꽤 마주쳤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80퍼센트도 안 된다.

특별 이벤트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90층에서 이루어지는 이벤트인 건 분명하다.

모든 안전지대가 그런 건 아니지만 그곳만의 이벤트가 있는 경우는 제법 많았으니까.

종류는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안전지대 이벤트 보상은 중요해.’

앞으로의 등반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10층 투기장이 그러했고, 20층 디펜스가 그러했으며, 권능 등급을 올릴 수 있었던 40층 이면의 성소나, 초월석 조각을 얻을 수 있었던 60층 결투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안전지대나 다를 바 없는 90층이라면 더 중요하겠지.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90층대의 난이도는 기존보다 월등히 높아. 그에 반해 등반가들의 스펙은 우려스러운 부분이 많고.’

상위층을 돌파하며 모든 스텟이 999점을 넘었고, 혼돈 수치도 가지게 되었으며, 스킬 초월로 MAX레벨을 달성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부족해.”

그러함에도 부족하다.

난이도를 생각하면 지금보다 확실히 강한 뭔가를 가져야 한다. 그게 스킬이든 권능이든 장비이든.

등반가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나나 멤버들로 따지면 스킬 쪽이겠지. 권능이야 이미 SSS급을 찍었고 장비도 다들 최종 장비로 맞춘 상황이다.

탈모맨은 여전히 쫄쫄이를 입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예외로 치자.

다른 상위 헌터들은 모르겠다. 자세한 스펙을 확인한 건 아니라서. 장비도 급하게 맞추기는 했지만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 챙겨야 할 게 많을 거다.

탑이라고 이 사실을 모를 거 같지는 않고.

‘스펙을 올릴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뒀을 거야.’

그 이벤트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게 니아나고 말이지.

관련한 정보는 짧게나마 전달해 뒀다.

“이블아이.”

“왜.”

“넌 밖으로 안 나가?”

그동안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기는 했지만 밖에 안 나가냐고 묻는 건 처음이다.

누구 때문에 못 나가고 있는데.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NPC는 활동 범위가 정해져 있는 게 대부분이다.

이 녀석은 등반가를 위해 일을 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는 만큼 거점 밖으로 못 나갈 가능성이…….

“안 나가면 나 나갔다 올게. 으으으읏! 가서 마실 거 사 와야지.”

기지개를 켜더니 소파에서 일어서는 녀석.

“밖에 나갈 수 있었어?”

“밖에 왜 못 나가?”

“보통 NPC들은 활동 범위라는 게 있잖아.”

“아하, 여긴 없어. 90층에 있는 녀석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거든. 계승자도 못 구하는데 돌아다니기라도 해야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젓는 녀석.

내 주목을 끈 내용은 이거였다.

‘계승자를 구할 수 없다?’

분명 탑은 모든 NPC한테 기회를 줄 텐데. 이건 지금까지 바뀌지 않은 사실이다.

설마 계승자를 구했다가 실패한 이들로 이루어진 걸까. 그렇다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런 편의를 탑이 봐줄 리가 없다.

당장 다른 안전지대나 필드만 보더라도 계승자를 구했다가 실패한 이들이 한둘이 아닐 거다. 이들만 특별대우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이러면 곤란한데.

‘계승할 녀석이 있나 살펴보려 했는데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이야.’

계승자가 되면 여러 이점이 있다. 페널티랄 것도 없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계승한 NPC의 권능과 혼돈 수치 일부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

그뿐일까. 계승한 NPC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물질적인 거든 정보든. 알리오스에게 수면 전투 복기 스킬과 기억을 받고, 릴카에게 잡다한 정보를 받은 것처럼.

당연한 이야기다. 계승자가 탑을 정복해야 기회가 생기는데 챙겨 주면 챙겨 줬지 나쁜 걸 줄 리가 없다.

미간을 좁혔다.

다른 등반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최대 3명의 계승자가 될 수 있다. 즉, 이제 하나 남았다는 건데.

‘90층에서는 안 된다라. 그럼 위로 올라가서 구해야 되잖아.’

위험 부담이 있다. NPC가 강한 등반가를 찾는 것처럼 등반가도 이왕 계승할 거면 도움이 될 만한 녀석을 계승하고 싶어 하니까.

90층대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모르는 만큼 필드에 NPC가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으며 필드에는…….

‘숭배자가 있어. 놈들이 정체를 속이고 접근할 수도 있다는 거야.’

지금까지는 권능을 통해 놈들을 분별해 냈지만 권능은 만능이 아니다. 권능을 속이거나 감추는, 혹은 나와 동급의 능력을 지닌 권능이 있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처음 현자를 만났을 때도 정보를 읽어 내지 못하지 않았던가. 그런 게 아니더라도.

‘상대방이 나보다 강하면 정보 자체를 읽기가 힘들지.’

지금이야 나도 강해져서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만에 하나, 실수로라도 숭배자를 계승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떤 식으로 엿을 먹을지 알 수가 없다. 이래저래 고민에 빠져 있는 타이밍.

“표정이 왜 그래. 동정할 거 없어. 여기 있는 녀석들은 자발적으로 계승자를 구할 권리를 포기하고 다른 보상을 받은 거니까.”

니아나가 살며시 몸을 숙여 날 바라봤다.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아니. 지금의 힘을 가지고 멸망하기 전으로 돌아가도 세계를 구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잠깐이지만 니아나의 입꼬리가 내려간다.

“자신의 세계를 포기한 사람이 자신의 세계를 구하려는 사람을 계승자로 삼을 수는 없는 거잖아, 그치?”

니아나가 내 눈을 빤히 쳐다봤고 권능을 통해 보이는 녀석의 정보에 변화가 생겼다.

[니아나]

-담당 등반가의 자질이 충분할 시 특별 이벤트를 진행합니다.

-평가 중 (85퍼센트)

평가율이 올라갔으며.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보가 얼핏 나타났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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