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531화 (531/740)

531화 90층

90층에 진입하기 전에 들어서야 하는 혼돈의 영역.

그동안 모아 온 혼돈을 자극하고 혼돈의 파편이 되었을 때의 힘을 알아내기 위한 시스템의 사전 작업.

혼돈의 파편을 많이 모은 자일수록 100층에 올라갈 가능성이 높았고,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혼돈의 파편 후보 중 하나라는 것을 뜻했다.

그런 설계 때문인가 혼돈 수치가 높을수록 자극이 강해졌다.

“크하아아악!”

나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머리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해야 하나.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 라프테의 기억을 경험했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그야 90층에 올라가던 라프테는 나보다 혼돈 수치가 낮았으니까.

아드득. 인지할 틈도 없이 이를 악물었다. 언제 터졌는지 모를 코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린다.

[당신의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혼돈 일부가 저항을 비집고 침투합니다.]

[당신이 겪었던 것들이 떠오릅니다.]

환상처럼 흩날리는 기억의 파편.

-막아! 막으라고!

-서, 선생님?

-시발, 뭐! 너희 쟤 싫어하잖아! 왕따 시킨 새끼들이 이제 와서 뭘!

-왜 버렸어? 좋았겠다. 난 병신이 됐는데.

-짐꾼이면 적당히 깔고 들어가자, 병신아.

-숨어 있어. 눈 가리고 입 막고. 알지?

-난 살 만큼 살았어, 학생. 학생의 다른 말은 희망이란 걸 잊지 마렴.

-꼬우면 알지? 너도 각성하던가.

-그래도 머리는 남았네. 가져가.

언제인지도 알 수 없게 뒤죽박죽으로 섞인 기억.

강제로 기억을 열어 버린 공간이 생생한 과거를 내뿜어 낸다.

모두 탑에 오르기 전의 기억들. 대격변의 날. 진정한 종말이 찾아왔다고 외쳐 대던 사람들. 빌어먹게도 다 자라지 않은 몸뚱이와 날것 그대로의 감정과 본성을 보고 보여 줘야 했던 시기.

무의식적으로 망각했던 기억까지 모조리 드러난다.

나 자신이 한없이 줄어드는 기분이었으나.

-닉네임은 쁘띠공듀.

-모두들 안녕~~! 쁘띠☆공듀가 왔습니다!

-쁘띠공듀, 보고 있어? 딱 기다려. 오빠가 힘내서 트로피 가져갈게!

-쁘띠! 쁘띠!

-사랑! 평화!

-공듀 님 동상을 하나 세워 볼까 하는데요.

-아, 그리고 자네가 쁘띠공듀인 건 비밀로 해 주겠네.

“…이런 씨!”

뒤이어 펼쳐지는 탑에 들어오고 나서의 기억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혼돈도 아차 싶었는지 관련된 기억을 부랴부랴 지웠지만 이미 늦었다.

[정신 보호(SSS) Lv.MAX]

[독자무강獨者武强(S) Lv.MAX]

[강철의 의지(S) Lv.MAX]

[강체强體(S) Lv.MAX]

[물리 공격 내성(S) Lv.MAX]

[러브 앤 피스(S) Lv.MAX]

[정신 보호(SSS) Lv.MAX]

[독 내성(S) Lv.MAX]

[저주 내성(S) Lv.MAX]

[화기 내성(S) Lv.MAX]

.

.

.

메시지가 쉬지 않고 떠오른다. 그야 보호 관련된 스킬만 10개가 넘어가니까.

한쪽에서는 어떻게든 내 머리를 헤집으려 하고, 내가 가진 힘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끓어오르고.

맞부딪치는 혼돈. 시스템과 겨루는 스킬.

좋은 일이다. 분명 좋은 일인데.

‘그게 내 몸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게 문제지!’

혼돈은 정의할 수 없는 힘. 어떻게든 빈틈을 파고들기 위해 집요하게 달라붙었고, 그때마다 온갖 형태로 힘을 바꾸어 덤벼들었다.

물리적으로 찌르듯 들어오다가 한순간에 성질을 바꾸어 저주처럼 스며들더니, 전격을 주어 충격을 주다가도 불처럼 타오른다.

한마디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자극이란 자극은 죄다 욱여넣는 중이라는 것.

내가 가진 보호 스킬들 또한 그에 맞춰 날뛰었다.

여기서 끝나면 다행이건만.

[강력한 저항에 혼돈이 더욱 날뜁니다!]

[혼돈이 규칙을 어그러트립니다!]

[경고!]

[시스템의 컨트롤이 약해집니다!]

-치지지직!

망할 혼돈은 오히려 기껍다는 듯 요동쳤으며, 그 영향력에 시스템까지 부하가 걸리며 버그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1분이 몇 시간 같을 정도로 길다. 그만큼 정신을 못 차리게 다양한 방법으로 날 괴롭혔고.

[내부에 깃든 혼돈이 반응합니다!]

[혼돈은 당신을 보호할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혼돈이 스킬, 초월(S) Lv.10에 개입합니다!]

-퍼억

머릿속 어딘가가 터지는 느낌과 함께 내 통제하에 있던 혼돈과 마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으그그그극!

제대로 된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몸을 비틀었다.

제대로 형상화되지 못한 스킬이 뒤죽박죽 뒤섞였으며, 혼돈의 영역에 대항에 발 빠르게 모습을 바꾼다.

그뿐일까.

[SSS급 권능, 스킬 합성이 내면의 혼돈을 돕습니다.]

권능까지 합세하기 시작했으니.

“빌어, 먹을.”

난 물어뜯듯이 팔을 씹으며 악착같이 정신을 부여잡는 수밖에 없었다.

* * *

[90층에 진입합니다.]

[안전지대]

“아, 드디어 끝났나.”

죽겠다. 진짜 죽을 거 같다.

혼돈의 영역을 지나 90층까지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1시간.

1시간이 맞긴 하나? 혼돈 때문에 시공간이 비틀리지 않았다면 그 정도 될 거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내가 겪은 과정을 생각해 본다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거짓말 안 하고 중간에는 그냥 기절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예상을 뛰어 넘는 방식으로 자극을 가해와서 그것도 쉽지 않았다.

하기야 기절한 사람도 뺨 때리거나 물 맞으면 정신을 차리는데, 세기도 힘들 방법들로 당했으니 할 말이 없지.

그래도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끝까지 잠깐이나마 혼돈의 파편이 되는 경험은 면했다. 어떻게든 버텨서 혼돈에 삼켜지는 것은 막아 냈으니까.

이것엔 기념비적인 부분이 있다.

‘혼돈의 파편이 가하는 능력에도 저항할 수 있다는 뜻이야.’

그 정도 수준은 됐다고 보는 게 맞겠지.

멀쩡한 사람도 일시적이지만 혼돈의 파편으로 만들어 버리는 과정이었으니까.

지금까지 마주쳤던 혼돈의 파편을 다시 만나도 이전처럼 휘둘리지는 않을 거다.

그뿐만이 아니다.

“과정만 보면 이가 갈리지만 결과는 달달하네.”

“그에에.”

스킬창을 확인한 난 입꼬리를 올렸다.

[독자무강獨者武强(SSS) Lv.3]

[강철의 의지(SS) Lv.2]

[독 내성(SSS) Lv.2]

[저주 내성(SSS) Lv.1]

[화기 내성(SSS) Lv.3]

.

.

.

“미쳤다.”

혼돈은 규칙을 부수는 힘.

언제 어떤 식으로 발현될 수는 알 수 없었고, 혼돈의 영역은 시스템까지 마비가 될 정도로 그 힘이 강한 곳이었다.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 탑에서도 기겁할 만한 성장을 할 수 있었다는 것.

보호와 관련된 능력들 모두 S급의 한계를 돌파했다. SS급인 것도 있지만 내성과 관련된 건 SSS급에 오르는 데 성공했으니.

‘말도 안 되는 스펙 업이야.’

성장 폭이 몇 단계나 폭증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전이었다면 혼돈의 힘을 빌려 스킬 합성을 통해 천천히 스펙 업을 했을 텐데.

비정상적인 성장. 이 모든 것이 혼돈 수치가 높은 덕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델버튼도 주먹 한 방에 골드 등급을 없애고 일대를 정화시켰었지.’

80층대 첫 번째 시나리오. 거인계.

그곳의 영웅이었으나 혼돈의 파편이 된 델버튼은 상식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고전을 면치 못했던 골드 등급을 아무렇지 않게 박살 낸 건 물론이고, 세상을 멸망으로 집어넣었던 검은 비를 모조리 없애 버렸으니까.

단순히 강하다의 범주가 아니었다. 진짜 이런 녀석을 어떻게 이겼나 싶었을 정도였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이후에 만났던 혼돈의 파편은 운이 좋았다. 탑 또한 그들을 완전히 통제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지만 어느 정도 제약하는 건 가능했고, 80층대 시나리오에서 등장한 녀석들은 본신의 힘을 다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단기간에 급격히 성장한 만큼 부작용이 없지는 않았다.

[비정상적인 성장을 확인]

[시스템이 개입합니다.]

[스킬 능력 일부가 약화됩니다.]

[일정 기간 동안 스킬 성장이 제한됩니다.]

[SSS급 권능, 스킬 합성이 휴면기에 접어듭니다.]

90층에 올라오며 혼돈에 맛이 갔던 시스템이 개입해 비정상적인 루트로 등급이 올라간 스킬에 제약을 걸었다.

내 몸속에 깃든 혼돈이 꿈틀거리기는 했지만 혼돈의 영역에서 힘을 다했는지 별다른 저항은 하지 못했고, 폭주하다시피 발동되었던 스킬 합성은 비활성화되었다.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S급은 확실히 아니야.’

못해도 SS급 이상의 힘은 낼 거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영구적으로 봉인되는 것도 아니고 기간만 지나면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은 잠잠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혼돈이 회복되면 그 기간은 더 짧아질 거고.

원하던 바는 아니지만 강제로 혼돈을 다루는 데 더 익숙해져 버려서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 같다.

마지막으로.

“어떻게든 버텼다. 으아아아아!”

난 주먹을 위로 뻗었다.

혼돈에 집어 삼켜져 혼돈의 파편이 되는 경험은 겪지 않아도 됐으니.

[비공식]

[당신은 혼돈의 파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전례 없는 업적!]

[당신의 유형, ‘정의할 수 없는 혼돈’이 강화됩니다.]

[당신의 유형, ‘새로운 길의 선구자’가 강화됩니다.]

그에 감탄이라도 한 듯 시스템이 비공식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무슨 칭호나 아이템이라도 주려는 건가 싶었더니만 알 수 없는 소리만 한다.

유형이 강화된다라.

내가 가지고 있는 유형은 2개. 유형이란 달리 말하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시스템이 정의해 준 것과 같다.

덕분에 상위층에서 진영 선택할 때도 보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는데.

‘이미 시나리오 구간은 지나지 않았나?’

90층대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는 모르겠지만 100층에 오르기 전 마지막 구간인 만큼 시나리오 형식의 구조를 유지할 거 같지는 않다.

탑은 언제나 새롭고 다양한 방법으로 등반가에게 엿을 먹이니까.

70층대, 80층대를 겪어 시나리오 진행에 익숙해졌으니 필시 어떤 식으로든 변주를 줬을 거다.

지나친 불신일까. 어쩌면 이전과 같이 이곳도 챕터 별로 진행될 수도 있는 거고 지금은 신경 쓰지 말자.

“읏차.”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전지대에 온 만큼 상처는 다 나았으나 온몸이 축 처졌다. 휴식이 간절하다.

보통은 안전지대에 올라오면 광장에 처음 발을 붙이게 되는데 뭐랄까 여기는…….

“집 안인데?”

그런 내 의문을 풀어 주기 위함인가.

[90층에 올라온 등반가를 위한 작은 선물!]

-매번 여관을 구하느라 고생이었나요?

-걱정 마세요. 90층은 등반가 여러분의 복지를 위해 개인 거점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복지는 개뿔. 집 하나 주고 생색 부리네.”

“그에에.”

대충 메시지 내용은 안전지대에서 사용할 수 있는 집을 하나 준다는 거 같다.

물론 밖에 있을 때야 내 집 마련이 꿈이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여기는 탑.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밖으로 나가게 된다.

내 집이라고는 하나 진짜 평생 쓸 수 있는 공간은 아니라는 것.

숭배자면 또 모르겠군.

‘숭배자치고 안전지대에 있는 녀석은 못 본 거 같지만.’

분명 숭배자들은 등반가뿐만이 아니라 같은 NPC를 상대로도 영입을 한다고 들었다.

계승자를 고를 권리를 써 버렸거나 탑에 익숙해져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운 이들, 당장 사정이 급해 그들의 도움이라도 없으면 자아를 빼앗겨 탑에 완전히 종속되는 이들이 가입한다던가.

전에는 그럼 안전지대에도 숭배자들이 설쳐야 하는 게 아닌 싶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숭배자가 된 놈들은 다른 층으로 배정됐을 거야. 시스템은 안전지대의 역할을 정해 놨으니까.”

NPC라고 항상 같은 곳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건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릴카야 특수한 경우니까 빼 버려도, 도움을 줬던 모빌리딕이나 치히린도 40층대에 있다가 80층 안전지대로 자리를 옮겨졌다.

시스템의 판단하에 목표에 따라 적절한 위치에 적당한 NPC를 놔둔다는 것.

숭배자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 놈들의 역할은 등반가를 방해하는 거고, 안전지대는 그 역할과는 정반대에 있는 곳이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발 뻗고 쉴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간만에 진짜 목욕이나 해 볼까!”

“그에에!”

그동안 클린이나 샤워 스킬로 씻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진짜 뜨신 물에 몸을 담그는 건 느낌이 달라서.

난 침실로 보이는 곳에서 벗어나 집을 누볐다.

쾌적하고 널찍한 공간. 거실을 넘어 방 여러 개를 열고 다녔고 이내 욕실에 도달했으니.

“에?”

“아?”

나보다 먼저 온 선객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니, 개인 거점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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