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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530화 (530/740)

530화 저항

머리에서 시작해 짜릿하게 내려오는 통증.

감전돼도 이런 느낌은 아닐 거 같은데. 오히려 영혼에 타격을 주었던 게드릭의 수법이 더 비슷한 느낌의 고통이다.

한마디로 더럽게 아프다는 뜻.

육체적인 부분으로 감당할 수 없는 타격에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었으나.

[혼돈이 시스템을 거부합니다!]

[당신은 알 수 없는 비밀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혼돈이 저절로 움직였고 게다가 이번에 얻은 효과가 발동했으니.

[시스템 개입이 강제적으로 막힙니다.]

[시스템 조정]

[탑이 당신의 존재가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거짓말처럼 스파크가 사라졌다.

후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깜빡이라도 켜고 들어와라!”

이놈의 탑은 정을 붙이려야 붙일 수가 없네.

뭐만 하면 난리야. 불만을 쏟아냈지만 들어 주는 사람은 없었고, 이내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아이고. 골이야.”

머리를 부여잡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약간의 헤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덕분에 몰랐던 정보를 얻었다.

새로운 기회는 실제 한다.

심지어 중립 NPC한테도 적용이 된다. 이 말의 뜻은…….

“생각보다 시스템은 NPC에게 관대해.”

탑이 중립 NPC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건 권능을 통해 보이는 설명만 봐도 알 수 있다.

권능이라는 것도 그 기반은 시스템이니까. 그럼에도 탑은 중립 NPC인 샤일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재도전.

하나의 단어였지만 그게 뜻하는 바를 모르지는 않았다.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 멸망을 막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거였으니까. 구체적인 과정까지는 모른다.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 회귀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탑을 등반해 100층에 도전할 기회를 준다는 것인지, 그냥 망해 버린 세계로 돌려보낸 뒤 알아서 잘해 보라는 건지 알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그동안 겪어 왔던 탑과 시스템 메시지를 생각해봤을 때.

‘방치하듯 망한 세계로 보낸 건 아닐 거야.’

그건 의미가 없지 않은가. 특히나 선택지 이름 자체가 재도전이다. 시나리오에서 멸망을 이겨 낸 경험을 한 것도 그렇고.

시나리오에서의 경험을 살려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 만한 시점으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싶다. 시스템 메시지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세계선을 새로 구축한다고.

물론 다르기는 할 거다. 돌아가는 것은 샤일 혼자이고 시나리오 동안 쌓았던 인연은 사라질 테니까. 나도 없을 거고 멤버들과 상위 헌터도 없을 거다.

난이도가 훨씬 뛸 거라는 것.

“잘하겠지, 녀석인데.”

완전히 제로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적어도 경험은 남아 있으니까.

그건 그거고.

“중립 NPC에게도 기회를 줬다는 건 숭배자들도 비슷한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뜻 같은데.”

이번 일로 증명이 되었다. 탑은 탑 안에 있는 존재라면 최소 한 번은 기회를 준다.

등반가는 강해질 기회와 100층에 도전할 기회를. NPC는 계승자를 찾을 기회를. 모두가 똑같은 건 아니다.

같은 NPC라고 하더라도 상위층에 있는 NPC는 계승자를 찾기 힘든 대신에 시나리오에서 멸망을 이겨 낸 이에게 기회를 주도록 설계되어 있다.

즉, 상황과 조건에 따라 방식이 조금씩 바뀐다는 건데.

데이본드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머리에 맴돈다.

‘녀석들이 새로운 기회를 얻고 싶어 할지는 모르겠지만 숭배자도 뭔가 기회가 있을 거야.’

적어도 계승자를 삼는 건 아닐 거다. 탑의 존속을 위해 등반가를 공격하는 놈들이었고, 탑은 그 행위를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다른 NPC와 달리 등반가를 공격함에도 아무런 페널티를 받지 않는 것이 증거다.

한마디로 탑은 숭배자들을 등반을 방해하는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

‘숭배자도 상위 NPC처럼 멸망에서 이겨 내면 기회를 얻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데이본드가 마족들을 대피시킨 게 말이 되기는 하는데, 녀석 말고는 그런 행동을 보여 준 숭배자가 없다.

단순 개인의 성향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것.

“에이 씨.”

거칠게 머리를 긁적였다.

어째 머리가 복잡해지기만 한 거 같다. 이건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놈들이 우리를 방해하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

그보다 할 게 있다.

-찰랑

인벤토리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라프테의 마지막 양심(S)]

-혼돈의 파편, 라프테의 마지막 양심입니다.

-아차! 몸 밖으로 나왔네요.

-라프테는 양심이 없습니다!

-라프테의 인간성과 기억이 일부가 깃들어 있습니다.

라프테를 쫓아내며 훔친 물건. 릴카의 퀘스트 아이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90층에 진입할 수 있는 조건의 단서.

조금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확인해야지. 다행히 마지막 챕터가 끝난 거라 그런가 바로 90층으로 넘어가는 거 같지는 않고.

봐라.

[대기 시간- 33:16]

대기실에 타이머가 떠 있다. 아마 처음에 준 시간은 1시간 정도였을 거다. 나야 보상도 확인하고 갑자기 시스템이 공격해서 시간을 좀 버린 거지.

“확실히 뭐가 있긴 하네. 대기 시간이 있는 걸 보면.”

“그에에.”

망설임 없이 목걸이를 착용했다.

어떻게 사용하라는 말은 없었지만 목에 차는 거니 착용하면 뭐든 변화가 있겠지.

다행히 틀린 생각은 아니었는지 바로 반응이 온다.

왠지 몽롱한 기분이 들었지만 거부하지 않았다. 아이템 설명에도 쓰여 있지 않았던가. 목걸이는 라프테의 마지막 양심. 녀석의 인간성과 기억이 담긴 아티팩트라고.

[목걸이에 담긴 혼돈이 깨어납니다.]

[혼돈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혼돈의 파편, 라프테의 기억 단편을 엿봅니다!]

쑤욱.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과 함께 시야가 암전됐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아니, 이게 여기서 왜 발동되는데.”

나의 모습은 라프테였다.

[수면 전투 복기(S) Lv.MAX]

알리오스의 계승자가 되면서 배운 스킬. 알리오스의 전투 경험을 꿈속에서 재경험할 수 있게 해 주었던 능력이 발동됐다.

* * *

[라프테의 기억이 종료됩니다.]

“아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 자체는 꿀잠을 잤는지 입가에 침을 흘리기까지 했지만 정신은 매우 피로했다.

바로 목걸이를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쨍그랑

그대로 부서져 깨지는 목걸이. 라프테의 기억을 재생하는 것으로 기능을 다한 모양.

양심이 있으면 그래야지. 쓰는 사람마다 그딴 기억과 경험을 하게 했으면 아티팩트가 아니라 저주받은 물건이다.

아, 맞네. 이거 라프테의 마지막 양심이었지.

“양심도 없는 새끼.”

이제 마지막 양심까지 사라졌으니 명실상부 공식적으로 양심 없는 녀석이 되었다.

얼굴을 쓸어내렸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라프테의 기억은 길지 않았다. 대충 1시간 남짓 됐나?

문제는 수면 전투 복기 스킬 때문에 놈과 동화되어 실제나 다를 바 없는 경험을 하고 왔다는 것.

당시 나는 90층에 진입하는 라프테의 몸에 있었으나 온전히 몸을 컨트롤 하지는 못했다. 뭐랄까. 라프테의 의지와 뒤엉켜 뒹굴었다고 해야 하나.

차원 균열에서 만났을 때도 제정신이 아니라고는 생각했는데 혼돈의 파편이 되기 전에도 정상은 아니었다.

함께 등반을 하던 동료 대부분을 잃은 상태였으니까.

90층으로 진입한 사람은 라프테 한 명. 짧은 시간이었지만 동화되었던 난 녀석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녀석은 피폐해져 있었고 내면에 남은 것이라고는 상실감과 죄책감, 무기력감과 공포뿐이었다.

그가 겪은 80층대 시나리오. 자신의 실수로 인해 동료들이 전멸해 버렸으니까.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내 일인 것처럼 느낀 것도 기분이 더러운데 이어진 일은 더 짜증 났다.

“혼돈에 뒤섞이는 감각이라. 굉장히 불쾌하군.”

90층으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혼돈으로 가득한 공간을 지나가게 된다.

그곳에서 등반가는 아주 잠깐이지만 혼돈의 파편이 된 것처럼 자신만의 규칙과 능력을 지니게 된다.

다르게 말하면.

‘혼돈의 파편이 됐을 때의 나를 볼 수 있는 거라고.’

악질적이다. 90층에 오른 사람은 100층에 도전할 가능성이 높다.

탑에서 미리 검사를 하는 거다. 이 사람이 혼돈의 파편으로 적합한지, 그렇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 힘을 쓸지.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능력을 각성하도록 트라우마가 될 법한 끔찍한 기억들을 되뇌기까지 했으니까.

더 짜증 나는 점은…….

‘90층에 진입할 때는 이 기억을 잃게 되어 있어.’

이제야 이해가 된다. 어째서 90층대에 있는 등반가들이 아무런 힌트도 주지 못했는지.

다른 루키 그룹이나 요정 클럽 소속인 애들도 별다른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지.

그야 기억이 안 나니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으니 말하고 싶어도 못 말하는 거다.

그저 평소와 똑같이 전송 마법진을 타고 안전지대에 들어선 것처럼 느꼈겠지.

물론 난 예외다. 어디까지나 라프테의 경험을 엿본 거에 지나지 않으니까.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뭐, 조언이랄 게 없군.”

그냥 한번 미쳤다가 돌아오는 거라서. 기억까지 말소되고.

다만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난 커뮤니티를 켰고.

[쁘띠공듀]: 여러분, 여러분! 곧 90층에 올라간다면서용?

[쁘띠공듀]: 큰일 났다. 진짜 여러분 큰.일.났.다.

[쁘띠공듀]: 왜 큰일이냐구용? 고거슨 직접 겪어 보면 안다구욧!

내가 글을 올리자 바로 멤버들이 반응을 보인다.

다들 대기 시간 동안 심심해서 커뮤니티를 보고 있던 모양.

[냥냥펀치]: 핥짝아! 공듀가 겁준다! 혼내 줭!

[정수리 핥짝]: 뒈질래? 감히 우리 냥펀을 질질 짜게 만들어?

[냥냥펀치]: 아닝… 질질 짜지는 않았음.

[니머리 탈모]: 뭐어어엇? 냥펀이 눈물, 콧물 다 뽑으면서 엉엉 울었단 말이야?

[냥냥펀치]: 안 울었다구!

[정수리 핥짝]: 냥펀은 나가 있어. 뒈지기 싫으면.

[냥냥펀치]: 고맙다…….

[니머리 탈모]: 그 영화 아는구나! 고전인데!

“허허, 이 녀석들.”

이때다 싶어서 떠드는 것 봐라.

뭐 좋다. 지금부터 긍정 회로 돌리고 있어야지.

[쁘띠공듀]: 다들 멘탈 꽉 잡고 가라구엿! 진짜 엉엉 울지도 모르니까☆

난 할 말 다 했다.

나머지는 알아서 잘하겠지.

사실 따지고 보면 기분이 더럽다뿐이지 별문제 없이 90층에 도착하게 될 테니까.

툭툭.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위로 올라갈 시간이다.

[대기 시간 종료]

[90층- 안전지대로 전송합니다.]

[혼돈의 영역을 지나칩니다.]

[대비하세요.]

-우우우우우웅

전송 마법진이 발동된다.

익숙한 빛에 몸을 맡겼다.

잠깐만 고생하지 뭐. 릴카는 왜 이런 걸로 힌트까지 주려고 했나 몰라. 어차피 안전지대에 올라가면 기억도 안 나는 거.

“그냥 악몽 꾼다 생각하면 그만이잖아. 혼돈이고 시스템이고 무시하고 기억할 것도 아닌데. 그치, 덕춘아?”

“그에에.”

덕춘이가 딱한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요 개구리가 눈을 왜 이렇게 뜨지? 잠깐 그런 생각이 스칠 때쯤.

[혼돈의 영역에 진입합니다.]

“아.”

[혼돈 수치가 일정치를 벗어났습니다!]

[혼돈 영역에 저항합니다!]

[망각 시스템을 거부합니다!]

[정신 보호(SSS) Lv.MAX]

“나 이미 한 번 그런 적이 있었지?”

“그에엑.”

밀려드는 혼돈.

그와 함께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던, 탑을 오르며 쌓아 왔던 스트레스가 터지기 시작했다.

델버튼이 혼돈에 잠식되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혼돈에 침식되어 가던 드래곤 호페그라마는 이걸 안고 계속해서 싸웠던 걸까.

“으아아아아아!”

난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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