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화 새로운 기회
-당신은 알 수 없는 비밀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고작 한 줄.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데이본드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을 뿐.
킬더레스도 그렇고, 데이본드도 그렇고 머리에 직접 말을 했다. 아마 마왕 정도 되는 강력한 악마들이 사용하는 능력 같은데.
일단 다른 종족이 사용하는 건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그거야 그렇다 치고.
‘데이본드가 말하려 했던 건 아무래도 그거 같은데. 탑이나 숭배자에 대한 이야기.’
보통 시스템적 제약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내용들.
NPC인 이상 시스템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말하면 안 되는 정보를 줄 경우에는 여러 대가를 치러야 한다.
릴카가 내게 여러 정보를 간접적으로 주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마왕쯤 되면 잠깐이지만 시스템의 감시를 피해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마기는 혼돈과 가장 가까운 에너지이고 혼돈은 규칙을 일그러트린다.
시스템의 기능을 무시하고 작동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 마기로 그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능적인 부분을 잠시 넘어가자. 중요한 건 녀석이 했던 말이니까.
넋두리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내용의 근간을 살펴보자면…….
희망.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희망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었다.
‘녀석은 이 세계가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마족들을 대피시켰어.’
어째서? 가짜라 한들 자신이 지키지 못한 마족들이 죽어 나가는 꼴을 보기가 괴로웠나?
굉장히 인간적인 이유였지만 마족이라고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답을 말해 줄 녀석이 죽었으니 자세한 건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알 수 있는 건 하나.
“숭배자들의 목적은 단순히 영생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모든 숭배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진짜 단순히 죽기 싫어서, NPC라도 되어 멸망한 세계에서 탈출하려던 이들도 분명히 존재할 테니까.
다만 그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숭배자가 된 이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게 뭔지는 알아봐야겠지만.
데이본드가 죽은 시점에서 그 대답을 해 줄 존재는 그 녀석이다.
90층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존재. 다이아 등급의 탑 숭배자.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골드 등급도 전투력이 꽤 높은 편인데 다이아 등급은 어느 정도려나.
혼돈의 파편도 상대하게 될 텐데 장애물이 많구만.
아무튼.
“승리했다!”
“우아아아아아아!”
“데이본드를 쓰러트렸다!”
전투는 승리했다. 여전히 숨이 붙어 있는 마족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우두머리가 사라진 이상 이전과 같이 뭉치기는 쉽지 않겠지.
-야야야야! 군단장 처리했다!
-마족들을 와해했습니다!
더불어 통신 구슬을 통해 다른 곳의 승전보도 들려왔다.
남은 건 잔당을 처리하는 일뿐이겠지.
이건 내가 없어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상 시나리오가 끝나는 시점이라는 것이었고.
“이블아이! 해냈어! 해냈다고!”
데이본드의 숨을 끊은 샤일이 나를 얼싸안았다.
녀석뿐만이 아니다.
“큰 신세를 졌군. 막바지에 못난 모습을 보였다. 내가 인간을 인정하게 될 줄은 몰랐군.”
호페그라마 역시 거대한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바라봤으니.
[전 서버 최초! 드래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칭호, 드래곤의 친구를 획득합니다!]
새로운 칭호가 생겨났다.
접점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녀석의 인정을 받은 사람은 나 혼자.
샤일 또한 동료로서 함께하기는 했지만 살짝 부족한 감이 있었나 보다.
뭐, 지금의 성장세를 본다면 나중에는 단순히 호페그라마의 계약자가 아닌 인정받는 대상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샤일은 중립 NPC니까.
작게 혀를 차며 주먹을 내밀었다.
“마무리 좋았다?”
“크흠. 나야 뭐 거들기밖에 더했나.”
“우오오오오! 망할 녀석을 처리하니까 기분 좋은데!”
탈모맨도 주먹을 내지르며 소리를 내질렀고.
“내 황금이… 내 황금이이! 이건 적자라구.”
“그래도 결과는 좋잖아?”
“그건 그랭!”
냥펀도 투덜대기는 했지만 나름 만족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전면에 나서는 것보다는 제국에 속해서 뒤 작업을 많이 했던 터라 이번 시나리오에서 공헌도가 적을까 고민했던 모양이다.
이번에 큰 역할을 했으니 보상이 기대되는 게 아닐까 싶다.
[챕터Ⅲ- 대침공 종료]
[대기실로 전송됩니다.]
* * *
한순간에 암전되는 공간.
챕터가 종료될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진짜 끝났구나, 하는 안도감일지 아쉬움일지 모를 감정만 잔류할 뿐.
80층대 마지막 챕터가 끝났다. 어둑한 공간, 익숙한 소파와 화면이 펼쳐졌다.
풀썩, 소파에 앉아 재생되는 화면을 바라봤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 이래서 시나리오 이름이 그거였나?”
“그에에.”
화면을 통해 마지막 챕터 이후의 모습이 보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시점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호페그라마를 탄 샤일이 마족의 잔당이 있는 곳을 날아다니며 그 아래로 정령 마법을 난사했다.
호페그라마도 지지 않고 브레스를 뿜어 댔으니.
“브래스가 사기는 사기야. 광범위 공격도 드물지만 저 정도 위력을 내는 것도 많이 없으니까.”
저항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마족들이 그대로 휩쓸려 나간다.
그야말로 땅 위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불 싸지르는 광경. 데이본드와 군단장을 잃은 마족들이 날뛰어 봤자 발버둥에 불과했다.
-촤르르르륵
화면이 이어진다.
이번에는 제국. 무너진 마탑주가 된 녀석에게는 용사라는 칭호가 붙었다.
나도 없거니와 그나마 후보 자리에 있던 베칼 또한 타락했다 정신을 되찾았으니 사실상 용사라 불릴 사람은 녀석뿐.
명실상부 성녀로 인정받은 헤렐다와 교황의 축복 아래, 황제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용사 자리에 앉게 되었다.
출세했네, 출세했어.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무너진 마탑 말단이었는데.
차츰 마족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이번 세계는 걱정이 많았다. 멸망하고 있는 세계치고는 위험에서 벗어날 만한 인적 자원이 부족했어서.
어떤 면으로는 우리 세계와 비슷한 상황이라 더 신경이 쓰였던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 또한 멸망의 과도기를 지나고 있지만 고작해야 60층대에 오른 헌터가 최강자 소리를 듣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이곳처럼 마법이니 오러니 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뭐, 그거야 우리는 과학이 발전되었으니 비슷한 셈인가. 몬스터도 생명체인 만큼 화기가 아예 안 통하는 건 아니다.
물론 특성에 따라, 방호력이 높거나 덩치가 큰 놈들은 총기로는 어림도 없지만. 그래도 미사일 정도 쏘면 효과가 있기는 하겠지.
[시나리오- 용의 숨결 종료.]
[전 서버 최초! 성공적으로 멸망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칭호, 세계를 구한 자가 생성됩니다!]
“오오오오!”
마지막 시나리오라 그런가 칭호를 많이 퍼주네.
세계를 구한 자라. 이름부터가 심상치가 않다. 뭔지는 몰라도 상당히 좋은 게 아닐까 기대되었고 이번에 얻은 칭호들을 확인했다.
[세계를 구한 자(칭호)]
-멸망에 치달았던 세계를 구한 자!
-당신은 영웅입니다!
-모든 구원 행위에 보정치를 받습니다.
“버프 같은 건가. 괜찮군.”
이런 칭호가 좋은 점이 범위가 확장적이라는 거다.
설명으로 봤을 때 버프가 들어오는 건 확실해 보이고 눈여겨봐야 할 건 구원 행위라는 단어인데.
“굉장히 주관적이기는 한데 어떻게 보면 보편적인 단어라는 말이지.”
예로 들어 단순히 구원 행위가 아니라 세계를 구하려는 행위라고 적혀 있었다면 제한이 크다.
세계를 위협에 빠트릴 만한 무언가를 상대할 때와 같은 상황에서만 칭호 효과가 발휘된다는 거니까.
반면에 모든 구원 행위라고 한다면…….
“어디 마차 같은 데 깔린 사람을 돕는 것도 구원 행위라고 볼 수 있다는 거야.”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자세한 건 써 봐야 알겠지만. 있어서 나쁠 건 없다.
칭호를 얻은 것도 좋기는 하다만.
[혼돈 +50점]
“그렇지, 그렇지!”
성공적으로 시나리오를 완수한 대가로 받은 혼돈 수치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혼돈의 파편을 퇴치하면서 얻은 것까지 합치면 근 100점에 가까운 수준. 더불어…….
‘미묘하게 혼돈이 계속 늘어나는 기분이야.’
내 등반 스타일이 원인인 건지 아니면 다른 스텟과 마찬가지로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자연적으로 증가하는 건지는 몰라도 어느 순간부터 혼돈이 늘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100층에 도전하는 조건은 달성한 지 오래. 지금은 혼돈의 파편과 맞서 싸우기 위해 혼돈을 모으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럼 이제 얻을 건 다 얻은 건가. 대기실에 있던 화면도 점차 끝나고 있다. 샤일을 필두로 마족의 영역을 밀어내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머릿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타이밍.
[멸망에서 벗어난 세계.]
[시나리오에 공헌도가 높은 NPC를 지정합니다.]
“어?”
끝난 줄 알았던 화면이 다시 움직였다.
조금씩 클로즈업되는 샤일.
[용사]
[마지막 드래곤의 계약자]
[무너진 마탑주]
[성녀의 연인]
[꿈 해석자]
[마왕, 데이본드를 죽인 자]
.
.
.
주르륵 올라오는 샤일의 업적.
나와 함께 이룬 것도 있었고 녀석의 능력으로 이루어낸 업적도 있다.
꽤 많은 것을 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보니 장난 아니네.
내심 감탄하는 와중.
[공헌도가 높습니다.]
[중립 NPC, 샤일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집니다.]
메시지가 떠올랐고.
-우우우우우우웅!
진동과 함께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중립 NPC, 샤일의 정보를 확인]
[세계선 구축]
[샤일의 육체와 영혼을 재생성합니다.]
[시스템이 개입됩니다.]
[기억이 돌아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빛에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음에도 메시지는 계속되었다.
그러다 뚝.
빛이 사그라지며 어둠만이 남는다.
[샤일에게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NPC / 재도전]
천천히 점멸하며 선택을 기다리는 선택지.
이건 설마.
“…새로운 기회?”
모든 NPC가 가지게 된다는 단 한 번의 선택. 계승자.
자신의 계승자가 100층을 클리어하면 NPC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
멸망한 세계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 말로만 들었고 릴카마저도 그 진실을 알지 못하는 일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아득해진 공간,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샤일.
보이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녀석과는 오랜 시간 동안 같이 움직였으니까.
무엇을 전하고 싶은 걸까, 한참 동안 내게 머물렀던 시선이 사라지고.
[선택 완료]
어둠 속에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재도전]
[무운을 빕니다.]
왤까, ‘나 잘했지? 고맙다.’라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린 거 같은 것은.
잠시 감상에 젖어 있는 타이밍.
[샤일에 대한 정보가 지워집니다.]
-파지지지지직!
예고 없이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내게로 쏟아지는 전격. 아니, 이건 시스템의 개입이다.
새로운 도전을 얻은 존재에 대한 정보는 남아 있지 않아야 하니까. 지금까지 아무런 정보도 없었던 이유는 시스템이 직접 나서 없애 버렸기 때문.
“크으으읍!”
예상치 못한 통증에 몸을 비틀었다.
뭔가가 강제로 머리 안으로 들어와 샤일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 한다.
시나리오가 진행되며 강제로 기억이 생성되던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지만 그때랑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이 온몸을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