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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526화 (526/740)

526화 변절자들

냥펀이 나를 반기는 건 또 오랜만이네. 그만큼 상황이 나쁘다는 거겠지.

척 보기에는 그리 나빠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이건 뭐, 돈지랄도 이런 돈지랄이 없군.’

바닥에 굴러다니는 일회용 아티팩트와 기능을 다 한 아이템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나 또한 대인전에 강한 편이지만 냥펀도 마찬가지라서. 육탄전을 하는 탈모맨과 중장거리, 근접 시 압축을 통해 싸우는 핥짝이는 비교적 소수의 인원을 상대할 때 빛을 발했다.

특별한 이유는 아니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스킬과 권능 차이로 인한 결과. 단순 화력만 따지면 조건이 충족됐을 때 나 이상의 화력을 낼 수 있는 게 냥펀이니까.

화조국의 지원과 본인의 수완 능력으로 쌓아 올린 부는 말 같지도 않은 스펙을 가지게 해 줬고, 특히나 저거.

[골드 익스플로젼(S) Lv.MAX]

-콰아아아아앙!

태생 등급을 뛰어넘는 화력을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스킬이 가히 사기적이다.

재료로 사용하는 재화에 따라 위력이 올라가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으아아아! 내 소중한 금은보화가!”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눈물을 머금고 사용하는 중.

아이러니하지. 멤버들 중 가장 부자인 동시에 금전적으로 가장 자유롭지 못하는 입장이니.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아,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가. 어쨌든.

“고생 많았어.”

“말만 하지 말고 얼른 뛰라구!”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가볍게 박찬 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근처에 있던 마족의 머리를 베어 냈다.

뼈를 가르는 느낌이 드는 게 보나 마나 즉사. 역시나 몸과 머리가 분리된 녀석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이게 전투지. 그동안 베어도 회복하고 잘려도 재생하는 놈들만 만나서 그런가 조금은 싱거울 지경이다.

물론 숫자가 적당히 있었다면 말이지.

“많네. 꽤 많이 잡은 거 같은데.”

“징글징글한 게 너 같다구.”

무슨 그런 실례되는 소리를. 대충 흘겨봐도 냥펀이 잡은 마족은 백 단위. 아무리 아이템과 같은 자체 성능을 가진 물건을 이용했다지만 체력도 그렇고 마력도 그렇고 줄어들었을 것이 뻔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포위망이 허물어졌군.”

“이게 다 나 덕분인 거징. 엣헴.”

“역시 냥펀. 항상 믿고 있다고.”

냥펀의 활약 덕분에 견고할 것만 같았던 포위망 일부가 무너졌다는 거다.

예상보다 냥펀의 저항이 거센 것도 있었고, 차원의 균열을 넘어 도주한 마족들에게 길을 터 주느라 열린 것도 있을 거다.

“그럼 가자.”

“엉? 어딜?”

“뭐긴 뭐야. 탈출이지.”

바로 냥펀을 붙잡고 무지개다리를 사용했다.

처음부터 목적을 달성하면 전장에서 이탈할 생각이었다. 머리 터지게 싸워 봤자 별다른 이득도 없는데 죽자고 덤빌 필요 없지.

그럴 시간에 다른 녀석들과 합류해 적의 핵심이 되는 놈들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촤아아아악!

“이거 재밌넹. 이히히.”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고갱님.”

이동 중에 파괴불가. 내가 허락하지 않은 자는 탈 수 없는 것이 무지개다리다.

마족들이 괴성을 지르며 원거리 공격을 해 댔지만 닿을 일은 없었다. 냥펀이 가지고 있는 보호 아이템이 발동되기도 했거니와 이 정도 공격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니까.

날 수 있는 녀석이라도 있으면 또 모르겠는데.

-파다다다닥

“아, 마족 중에는 흔하지?”

“날파리 같은 녀석들이라구. 저거 봐. 시커멓잖아. 똥파리야 똥파리. 잡아도 돈을 주는 것도 아니란 말야.”

“게임도 아니고 잡는다고 나오겠니.”

“아쉽다, 아쉬웡!”

잡담을 하면서도 행동은 빨랐다.

난 오로라 빔을, 냥펀은 그동안 본 적 없었던 활을 꺼냈는데.

-파아아앙!

“봤냥? 내가 종종 핥짝이한테 활 쏘는 걸 배웠지.”

“오, 정말 못 쏘는걸?”

“에잇! 에이잇!”

냥펀이 내 머리를 때린다. 그래 봤자 투구에 막혀 별다른 타격은 없었지만.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못 쏜다. 표적이랑 떨어져도 너무 떨어졌잖아. 대충 아무렇게나 쐈다 해도 믿을 정도. 그래도 괜찮다.

“키하아악!”

“봐봐! 명중이잖앙!”

“아니, 템빨이잖아.”

타깃이랑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날아가던 화살이 돌연 방향을 바꾸더니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마족에게 꽂혔으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미간에 정확히 꽂혔다. 냥펀이 대단한 궁술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스킬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쏘는 활이 SSS급 장비면 말이 달라지지.

유도 기능이 자동으로 꽂혀 있었다. 그래. 머리로 해결이 안 되면 힘이 부족한 게 아닐까를 의심하고, 실력으로 안 되면 돈이 부족한 게 아닐까 고민하는 거지.

본인 실력과 상관없이 명중을 하자 기분이 좋아진 걸까, 냥펀이 연달아 활을 당겼고 나 역시 손을 뻗었으니.

[오로라 빔(S) Lv.MAX]

-찌유우우우웅!

놈들을 향해 아낌없이 오로라 빔을 쏴 주었다. 몇 놈은 격추당했고, 재주 좋게 피한 녀석들은 열심히 이곳으로 날아왔으나.

“카악, 퉤!”

“으아아아악! 망할 개구리가!”

근처까지 도달한 놈들은 덕춘이의 산성침과 독침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게 킹갓 영물님 앞에서 설치면 안 되지. 숭배자는 물론이고 재앙도 씹어먹는데. 지금 와서 느끼는 건데 혼돈의 파편을 상대할 때도 충분히 잘 싸우지 않을까 싶다.

놈들을 상대하는 데 가장 필요한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충분한 혼돈 에너지였으니까. 덕춘이는 속성 자체가 카오스인 영물이고.

직접적으로 싸우는 건 많이 못 봤다. 따지고 보면 평소 전투 때도 직접 나서는 경우는 많은 편이 아니기도 했고.

“덕춘아, 다음에 혼돈의 파편이랑 싸워 볼래?”

“그에?”

“어허, 주인한테 중지 세우는 거 아니야.”

싫음 말고. 나중에 필요하면 알아서 싸워 주겠지. 지금도 도움이 필요할 때는 잘 싸워 준다.

아무튼.

“다른 애들은 뭐래?”

“마족 무리가 나온 곳은 이기고 있는 거 같고, 군단장 쪽도 어떻게든 잘하는 거 같던데?”

“데이본드는?”

“으음, 쫌 애매행. 말이 별로 없네.”

주기적으로 보고를 하기로는 했지만 상황이 급박하면 못할 수도 있다. 다르게 말하면 연락이 오지 않은 쪽은 고전 중이라는 것이기도 한데.

“데이본드 쪽으로 가는 게 낫겠군.”

“동감. 군단장 쪽은 마족 애들 잡던 애들이 가면 될 거 같앙.”

우리 쪽이 비교적 빠르게 끝났으니 가면 될 거다.

별문제 없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군단장이 있는 곳은 크게 걱정이 없었다. 핥짝이를 비롯해 이미 군단장을 잡은 경험이 있는 오지혁과 김소담이 있는 곳이니까.

다른 마족이 대거 나타난 곳도 숫자는 밀릴지 몰라도 상위 헌터와 요정 클럽이 있다. 듣자 하니 교단 쪽에서도 지원이 나간 거 같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고.

‘탈모맨이랑 샤일이 있는 쪽이 걱정인데.’

“오, 연락 왔당.”

냥펀이 통신구를 내민다. 처음에는 다른 멤버들한테 온 건 줄 알았지만 발신지가 이상하다.

전장이 아니다. 여기는…….

“제국이잖아.”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

첩자다. 7군단장을 잡기는 했으나 제국에 숨어든 모든 첩자를 잡아낸 것은 아니었다.

지금쯤이면 우리의 계획을 눈치챘을 테니 궐기하기에 적격인 타이밍.

아니나 다를까.

-제국에서 마족들과 흑마법사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되는군.”

“에잉. 어떻게 예상을 벗어나질 않냥.”

우려했던 대로 놈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놈들 입장에서는 발악에 가까운 행동. 동시에 효과적인 방법임에는 틀림없었지만.

-무너진 마탑과 연계해서 방어선 구축 중! 민간인 대피에 집중합니다!

우리라고 아무런 대비 없이 있던 건 아니다.

제국의 기사단, 무너진 마탑, 교단. 세 곳 모두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데이본드를 저지하기 위해 대기하다가 지원을 나서기로 하지 않았던가.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병력이 모여 있기도 했거니와, 내부의 첩자를 우려한 황제와 교황 역시 여러 플랜을 짜 두었다.

자체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거다. 버티는 동안 이쪽 일을 마치고 도와주면 마계 진영은 완전히 밀려난다.

애초에 놈들 또한 혼돈의 파편을 피해 이곳으로 넘어온 거 아니던가. 온전한 전력을 유지하지도 못하고, 수장이나 다를 바 없는 데이본드까지 죽는다? 그럼 끝이지.

긴장의 끈은 놓지 않을 거다. 데이본드 자체는 걱정되지 않는다. 그래 봤자 골드 등급이고, 가장 위험했을 혼돈의 파편은 내가 퇴치했으니까.

묘한 불안감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신경 쓰지 말자.

“위치는 대충 알지?”

“나만 믿으라구!”

품에서 지도를 꺼낸 냥펀이 데이본드가 있는 방향을 가리킨다.

오케이. 위치는 확인했으니.

“빠르게 가 보자고.”

내 의지를 읽은 무지개다리가 속도를 높였다.

* * *

데이본드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곳. 그중 한 곳을 담당한 탈모맨과 샤일.

둘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이거 쉽지 않네.”

“지독하기가 이블아이 같군.”

처음에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탈모맨 본인의 무력도 대단했고, 샤일 또한 드래곤과 계약하며 월등히 강한 힘을 내뿜었으니까.

그 외에 도움을 주겠다며 각지에서 몰려든 영웅들이 있었으니, 물밀 듯 쏟아지는 마족들을 상대함에도 큰 어려움이 없이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었다.

문제는…….

“어째서!”

“이제 와서 배신이라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으냐!”

변절자가 있었다.

데이본드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된 병력 내부에서도 그리고…….

“저 녀석, 용사 후보 아니었어?”

“아무래도 마기에 노출된 거 같은데.”

중간에 참전했다가 돌연 아군을 공격해 혼란을 주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 중심에는 용사 후보 베칼이 있었다.

그가 쥐고 있던 성검에서 거무튀튀한 마기가 흘러내린다. 그의 동료였던 자들 역시 타락해 마족의 편을 들었다.

승기를 쥐었던 전세가 묘하게 뒤집힌 건 한순간. 돌발적으로 나오는 배신자의 등장에 아군끼리도 믿지 못했고, 흐트러진 진형은 마족들의 공격에 뚫리기 일쑤였다.

난장판 그 자체, 피로 물들어 질퍽한 대지 위에 선 베칼이 검을 들었다.

“세상의 저편을 보지 못한 자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오히려 그편이 낫다.”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은 베칼이 마기와 신성력이 뒤섞인 힘을 부리며 다른 교단 사람들과 제국군을 휩쓸어버린다.

마족과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데 모든 전력을 쏟았던 만큼 신성력을 쓰는 적의 등장은 그 자체로 재앙과 같았으나.

“어딜!”

-콰아아아앙!

마기와 신성력을 동시에 쓰는 건 탈모맨도 마찬가지. 그의 주먹이 성검과 맞닿으며 굉음을 울렸다.

힘에서 밀린 베칼이 뒤로 주르륵 밀려난다. 손목이 부러져 덜렁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팔뚝을 뚫고 나온 촉수가 손목을 강제로 고정하며 힘을 준다.

정상적인 힘이 아니다. 마기로 변형된 신체에서 오는 힘. 그렇다 한들 부술 수 없는 것은 아니었고 탈모맨의 주먹은 괴상하게 꿈틀거리는 육체도 충분히 뚫어 냈다.

신성함을 잃은 검은 뭉뚝하기 짝이 없었고, 충동적인 살의를 품은 일격은 파괴적이었으나 직선적이었으니.

-투웅

탈모맨이 검면을 흘리며 안으로 전진. 이어 폭발적인 힘을 실어 복부를 뚫어 버릴 기세로 주먹을 내뻗었지만.

“그러면 쓰나. 내 소중한 종이거늘.”

-촤아아아악!

땅을 뚫고 나온 검은 줄기가 탈모맨을 튕겨 냈다.

사방에 가시가 달린 넝쿨. 이걸 넝쿨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탈모맨은 그렇게 생각했다.

정면으로 나선 것은 데이본드.

80층대 마지막 골드 등급 숭배자이자 5마계의 마왕.

가시 왕관을 쓴 그가 베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멸망한 세계의 단편을 본 자,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알 것이다. 아무것도 겪지 못한 자들이 해결할 수 있는 재앙이 아니라는 것이지.”

빙긋, 데이본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공생을 위한 과정일 뿐이다. 잘 봐 두도록. 너희의 세계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이니.”

“지랄.”

순간적으로 들린 목소리에 데이본드와 베칼, 탈모맨과 샤일의 시선이 쏠린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걸어오는 두 인형.

“악! 피 튀기잖앙!”

“아, 쏘리.”

이블아이와 냥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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