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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525화 (525/740)

525화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자강두천.

정말이지 그 말이 딱 어울렸다.

“이이익! 이놈이!”

“뭐 이딴 녀석이 다 있어!”

피 칠갑한 차원의 균열. 일그러진 시공간과 주변에 즐비하게 깔린 시체는 음침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곳에 있는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혼돈의 파편은 촌극을 찍고 있었다.

-촤라라라락!

어지럽게 내지른 검. 당연히 의도하고 한 공격이 아니다. 내가 이따위 허접한 검로를 그릴 리가 없으니까.

그저 손잡이가 급격히 미끄러워지며 흔들린 것에 불과했고.

[영역 내에서의 실수는 라프테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그때를 노려 라프테가 팔을 휘둘렀다.

카앙!

마치 쇠가 맞부딪치는 것과 같은 소리. 마찰력이 급격히 떨어진 손잡이에 순간적으로 검이 빠져나간다.

설상가상 바닥이 끈적인다 싶더니 발이 꼬여 균형까지 흐트러졌지만.

[행운 스텟이 발동됩니다!]

-휘리릭. 착!

오히려 몸이 비틀리며 가속도를 내었고, 손아귀를 빠져나갔던 검이 빙글돌더니 다시 손에 잡혔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오랫동안 합을 맞춘 후 쇼를 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후욱. 훅.”

“후우우우.”

정작 나와 라프테는 서로를 노려볼 뿐이었다. 속으로 욕을 하는 건 덤.

‘혼돈의 파편이 이상한 놈들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짜증 나는 힘은 또 처음이네.’

아니. 이거야 원, 전투다운 전투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하다. 페이크에 페이크. 실수에 실수. 행운과 행운.

의도했던 바랑은 전혀 상관없는 외부의 변수에 따라 전투가 진행되고 있으니까.

녀석의 능력이 위협적이지 않은 건 아니다. 전투에 있어서 실수라는 것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행위일 수 있으니까.

당장 나도 목을 내놓아야 할 순간들이 여럿 있었다. 행운 스텟이 발동되며 넘어가서 그렇지.

조금은 답답한, 동시에 그때그때 상황 파악을 통해 대응해야 하는 싸움의 연속.

“그아아악! 이곳은 내 영역이다! 어째서 그따위 능력을 쓰는 것이냐!”

녀석 또한 지금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소리를 내지른다.

누가 할 소리.

“너야말로 혼돈의 파편이면 제대로 싸워! 이딴 짓 하지 말고!”

“닥쳐라! 난 원래 이런 존재다!”

맞는 말이기는 하군. 권능으로 봤을 때 실수와 도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지.

다르게 말하면…….

‘혼돈의 파편이라고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컨트롤 할 수 있는 건 아니란 거야.’

혼돈은 질서를 무시하는 힘. 어떤 식으로 변화되어 사용될지 알 수 없는 에너지다.

그렇기에 혼돈의 파편은 개인의 역사와 성향에 따라 고유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

검은 비에 침식되었던 거인계의 영웅, 델버튼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개인의 힘과는 별개로 혼돈에 의해 펼쳐지는 재앙은 말 그대로 재앙.

누군가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실수가 발생합니다.]

본인의 능력이기에 누구보다 빠르게 익숙해지고 활용하는 법을 깨달았을 뿐.

만약 이 녀석에게 다른 혼돈의 힘이 부여됐다면 그에 맞는 전투 스타일을 사용했겠지.

냉정하게 생각했다. 놈은 상대방의 실수를 유도한다. 강제적인 법칙이 그렇게 만든다. 그 모든 실수가 본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에 빈틈을 노려 공격하는 스타일을 고수하는 거고.

다르게 말하면 대응. 실수가 먼저 발현된 후에 공격하는 타입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가능성 한 가지.

‘실수는 녀석에게도 동일하게 들어간다.’

-스르륵

손을 뻗었던 녀석의 신체가 옆으로 빠진다.

본인이 움직인 게 아니다. 순간적으로 무릎에 힘이 빠지며 몸이 옆으로 기운 거지.

그 덕분에 내가 찔러 넣었던 검을 피할 수 있었고.

실수 자체는 놈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다만 본인이 한 실수마저도 스스로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일 뿐.

만약 그 법칙을 벗어날 만큼의 컨트롤을 보인다면?

[오로라 빔(S) Lv.MAX]

[파이어 밤(SSS) Lv.6]

오로라 빔을 사방으로 쏘아내는 동시에 파이어 밤을 터트렸다.

조준조차 안 했다. 어차피 세심하게 공격할 필요 없다. 원하는 대로 안 나가니까.

그런 나의 예상이 맞은 걸까.

“크하압!”

제대로 된 일격을 허용하지 않았던 녀석이 폭발에 휘말려 비명을 질렀다.

SSS급에 다다른 파이어 밤. 거기에 내가 가지고 있는 혼돈. 내 공격이 녀석에게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까지 닿지 않았을 뿐.

‘할 수 있어.’

충분히 가능하다. 어디까지나 이런 패턴이 반복된다는 전제하에.

단순 전투력만 따지면 다른 혼돈의 파편에는 밀리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만.

-콰직!

그게 녀석이 약하다는 방증은 되지 못했다.

녀석의 발이 명치에 꽂힌다. 행운 스텟이 발동했다면 어떻게든 됐겠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고.

“쿨럭!”

난 기침을 토해 내며 뒤로 밀려났다.

행운 스텟이 놈과의 전투에서 비정상적으로 많이 발휘된 것은 맞지만 무조건적으로 발생하지는 않았다.

이런 식으로 놈의 공격에 당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

대략 계산하기로 8할. 그 정도 확률로 행운 스텟이 발생했다. 평소 행운 스텟이 발동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말도 안 되는 수준.

‘혼돈의 영향이 간 거야.’

내가 가지고 있는 혼돈 수치는 혼돈의 파편과도 비벼볼 수 있는 정도.

물론 놈들보다 높다는 건 아니다. 녀석들은 오랫동안 존재 자체로 혼돈이 되어 살아온 괴물이니까.

나 또한 일반적인 등반가와 비교하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높은 혼돈을 보유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는 녀석들과 비교하면 한 끗 밀리는 것이 사실.

그럼에도 시스템이 혼돈의 파편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많은 혼돈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팩트였고.

[행운 스텟이 발동됩니다.]

그 혼돈이 행운 스텟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전에도 그랬다. 본래 혼돈의 파편이었다면 개인이 가진 특성에 의해 능력이 정해졌겠지만 난 아니었고 그 결과.

‘상대하는 혼돈의 파편에 맞춰서 능력이 바뀌고 있어.’

유동적으로 혼돈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혼돈의 파편을 상대하는 데 있어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것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능력에 나 역시 적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상관없다. 놈들을 상대할 수 있다면 그 정도 수고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으니까.

-파앗!

자신감을 가지고 앞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이전과 같은 싸움이라 생각하지 말자. 확률과 믿음. 놈을 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전투에 임하자.

-콰아아아아앙!

-콰과과과광!

연달아 폭발을 일으켰다. 혼돈검을 휘두르며 사방으로 오로라 빔을 쏘아 댔으며, 전 범위 공격이 가능한 일렉트릭 쇼크를 뿜어냈다.

대상 하나가 아닌 사방에 공격을 하는 것은 내 특기 아니던가.

아군이 몰려 있을 때는 족쇄로 적용되기는 했지만 이 공간에 있는 것이라고는 나와 라프테 두 명뿐.

일대가 무너질 걱정도 없었으며 바닥이 가라앉을 걱정도 없었다.

빠르게 마력이 소비되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노리는 건 단 하나.

“이이이이익!”

순식간에 몸 곳곳에 타격을 입은 녀석이 이를 악문다.

[실수가 발생합니다!]

[실수가 발생합니다!]

여전히 실수투성이. 행운 스텟이 반응하지 않은 경우도 있어 나 또한 상처가 늘어났으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핥핥핥핥!

내 옆에 붙어 회복을 시켜 주는 덕춘이도 있었거니와.

-까득!

중간중간 포션을 꺼내 마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쉽게 생각하자. 버티고 버텨서 서 있는 녀석이 승자다.

그리고.

-콰앙!

몸 뒤로 폭발을 일으켜 순간 가속했다.

녀석이 나를 뿌리치기 위해 공격을 해 댔지만 안개 질주를 사용.

지척까지 도달해 번뜩이는 검격을 휘둘렀다.

[S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빛납니다!]

[검강]

[절삭(S) Lv.MAX]

[영혼 찢기(S) Lv.MAX]

놈 또한 빠르게 손을 뻗어온다. 경로로 봤을 때 정확히 내 목을 뚫을 수 있는 공격.

내가 내지른 검 또한 녀석의 목을 향하고 있다.

닿으면 죽는다. 나도 저 녀석도.

급격히 흔들리는 라프테의 눈동자. 피하지 않을 거냐고 녀석의 눈이 묻고 있었고.

‘안 피해.’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행운 스텟을 믿는다. 무한 코인도 묻는다. 어차피 한 번쯤은 죽어도 구사일생으로 버틸 수 있다. 그것도 아니면 펠라인 세트 스킬로 반사를 노려볼 수도 있다.

선택지는 차고 넘쳤으며.

“이, 이런 또라이 새끼!”

결국 먼저 피한 것은 녀석이었다.

질린 듯한 표정으로 팔을 회수하는가 싶더니.

[혼돈의 파편, 라프테가 전장을 이탈합니다!]

[전서버 최초! 라프테를 격퇴했습니다!]

[혼돈 수치 +30점]

[칭호, 더러워서 피한다를 획득합니다!]

강렬한 빛무리와 함께 라프테가 모습을 감추었다.

허공을 가르는 검이 허전했지만 결과를 보자면 나의 승리.

혼돈 수치도 달달하게 받았고 새로운 칭호도 얻었다. 어째 이름이 마음에 안 들기는 하다만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겠지.

“이거 까딱 잘못했으면 죽었겠네.”

스윽, 목을 닦았다.

녀석의 손끝이 닿았던 자리에 혈선이 그어져 있다.

깊지는 않았으나 조금만 더 들어갔다면 동맥까지 깔끔하게 잘리지 않았을까.

하필 이 타이밍에 행운 스텟이 발동하지 않을 줄은 몰랐는데.

결국에는 잘 끝났지만. 게다가.

-찰랑

난 검 끝에 걸린 물건을 바라봤다.

[라프테의 마지막 양심(S)]

-혼돈의 파편, 라프테의 마지막 양심입니다.

-아차! 몸 밖으로 나왔네요.

-라프테는 양심이 없습니다!

-라프테의 인간성과 기억이 일부가 깃들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내 목표는 이거였다.

녀석을 반드시 없애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는 말.

원하는 물건만 얻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타락한 천사의 검을 사용해 차원 균열을 끊어 버릴 생각이었다.

어쩌다 보니 치고받고 난리를 피우기는 했지만.

아무튼.

“성공적이군.”

균열을 타고 넘어오려는 강대한 적, 라프테를 쫓아냈다.

녀석이 없는 것만으로도 우리 쪽 부담감이 줄어드는 건 물론이었고, 릴카의 퀘스트를 클리어한 것도 기정사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목걸이를 걸고 싶다.

90층에 올라가는 단서 아니던가. 설명을 봤을 때 라프테의 기억 일부가 단서가 아닐까 의심되는 상황.

미리 알아내면 좋기야 하겠다만.

“냥펀이 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거 같단 말이지.”

“그에에.”

균열 밖에는 냥펀이 전투를 이어 나가고 있다.

지금쯤이면 내 욕을 실컷 하면서 싸우고 있지 않을까. 벌써 잔소리 들을 생각에 귀가 아픈데.

그래. 목걸이는 조금 있다가 착용하자. 위로 올라가기 전에만 쓰면 된다.

칭호만 간단히 확인해 보자.

[더러워서 피한다(칭호)]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요, 더러워서 피하지!

-당신과 싸우는 대상이 전투 의지를 상실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대단해요! 여러모로!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군.

나름 쓸 만할 거 같기는 하다. 쓸데없는 싸움은 피하는 편이 좋으니까.

그럼 얻을 것도 얻었겠다, 냥펀한테 가 볼까.

난 미련 없이 발을 돌렸고.

[차원 균열에서 벗어납니다.]

일렁이는 느낌과 함께 균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 *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것은 뒤집힌 대지와 메케한 연기.

산산조각 난 무기와 방어구, 함성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음과 그것을 잠재우는 폭음.

그 중심에서 번쩍이는 황금빛이 나를 반겼으니.

“공블아이이이이이! 이제 나오냐구웃! 사람 살려!”

마족들의 뚝배기를 깨고 있는 냥펀이 격하게 나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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