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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524화 (524/740)

524화 실수와 운

나와 냥펀은 미간을 좁혔다. 분명 우리가 있는 곳은 균열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낮은 곳이었다.

물론 가능성이 낮은 거지 아예 안 나온다는 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위험을 감당할 생각을 했다는 것.

가뜩이나 미끼가 되어 흑마법사와 마족들의 시선을 끌고 있으니 나름 안전 대책도 세우기는 했다.

지금도 울리고 있는 통신구 알람. 각 위치에 있는 멤버들이 현 상황을 보고하려 한다.

데이본드가 등장한 곳이 있으면 즉각적으로 지원을 오기 위함.

-구구구구구구

균열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 나와 냥펀 역시 긴장감을 올렸으며 거기에 더해.

“냥펀, 아무래도 오는 거 같지?”

“으아아앙! 내가! 이래서! 네 옆에 있으면! 문제가 생긴다구!”

저 멀리 마족들로 보이는 무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냥펀이 내 어깨에 펀치를 날린다. 나도 정말 이쪽에 균열이 생길 줄은 몰랐지.

“진정하고 전투 준비나 하자. 가만히 있는다고 저 녀석들이 돌아갈 것도 아닌데.”

“태평해서 더 화가 난닷!”

말은 그렇게 하지만 냥펀도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해 온 아이템을 꺼내며 전투에 대비했다.

아직은 거리가 제법 있지만 오래지 않아 이곳에 도달할 터. 지원이 오기까지 둘이서 버텨야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상위 헌터라도 좀 데리고 올걸 그랬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후회한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나와 냥펀만 움직이는 건 놈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선택이었으니까.

숭배자의 척살 1순위인 우리가 다른 대규모 병력에서 이탈해 몰래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녀석들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다.

다른 곳으로 간 병력이 눈속임이라고 착각하게 만들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일이 꼬이기는 했지만 여기까지는 예상 범위 안이다.

“이쪽으로 오라고 애들한테 말해야겠다.”

“안 그래도 연락하고 있징.”

역시 이런 쪽은 빠르네. 옳은 선택이다. 둘이서 모든 것을 해결할 필요는 없으니까. 버티기만 하면 그만. 외부에서 지원이 온다면 그림이 달라진다.

포위당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마족들이 될 테니. 그럼 놈들을 일망타진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다.

-치지지직

약간의 노이즈가 발생 후, 통신 구슬이 연결되었다.

“여기야, 여깅! 균열이……!”

빠르게 입을 여는 냥펀.

그에 화답하는 걸까, 반대편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으니.

-데이본드가 나타났다! 지원 요청!

“어?”

“냥?”

데이본드가 나타났다는 소식이었다.

방금 연락을 한 곳은 샤일이 있는 곳. 이어서.

-데이본드가 그쪽이라고? 그럼 뭐야! 얘네는 그냥 다른 놈들이야? 마족만 수백은 되는 것 같은데!

-군단장! 군단장만 4명이 나타났어!

핥짝이와 탈모맨이 있는 곳에서도 적들이 나타났다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종합해 보자면.

“후보지 4곳에서 전부 균열이 일어났다? 설마…….”

우리가 병력을 분산한 것처럼 놈들도 분산해서 이곳으로 진입하려는 거다.

놈들이라고 멍청이는 아니니 우리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했다는 거지. 그래도 그렇지 무식하게 차원 균열을 4개나 만들어 낼 줄이야. 애초에 이런 짓이 가능한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지원은 기대 못 할 거 같은데.”

“어째서어어어! 데이본드에 군단장, 마족 무리까지? 뭐냐구!”

냥펀이 절규한다. 계획이 꼬이기는 했다만 우리라고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우리는 둘. 신나게 달려오고 있는 마족 무리는 척 봐도 백 단위.

머릿수 차이가 있는 만큼 포위당하면 빠져나가기 쉽지 않겠지만, 반대로 신경 쓸 사람이 없으니 몸만 빼내는 거라면 어떻게든 가능하다.

나도 그렇고 냥펀도 그렇고 탈출하는 건 자신 있으니까.

“그래도 다행이지 않아? 데이본드랑 군단장이 다른 곳으로 나왔으니 망정이지 이곳으로 나왔으면 도망도 못 치고 싸웠을 텐데.”

“공블아이, 긍정적인 게 보기 참 좋앙. 정강이 한 번만 차도 되냥?”

“아니, 그건 좀.”

“근데 걔네들이 다 딴 곳에 간 거면 저기선 뭐가 나오는 거얌?”

“음?”

아무렇지 않게 질문을 건넨 냥펀. 순간 냥펀과 눈이 마주친다. 고개를 갸웃하면서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잠시.

“그러게?”

대체 뭐가 나오는 거지?

이미 나올 만한 놈들은 다 나오지 않았나? 데이본드가 두 명일 리는 없고, 군단장도 4명이나 나왔다는 건 남아 있는 군단장에 이어 새롭게 부임한 군단장까지 모습을 드러냈다는 거다.

물론 종합적으로 7군단까지 있으니 이곳에도 새로 군단장 자리에 오른 놈들이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는데.

-쿠구구구구구궁!

“…어째 그냥 마족은 아닌 거 같지?”

“이건 혼돈이잖앙!”

균열이 점차 벌어지며 느껴지는 건 마기와 함께 섞여 있는 혼돈의 기운이었다.

나도 그렇지만 냥펀도 혼돈 수치를 100점은 넘겼을 거다. 혼돈 에너지를 충분히 느끼고도 남을 수준이라는 것.

[차원의 균열 열립니다!]

[제5 마계와 연결됩니다.]

[주의!]

[연결이 불안정합니다!]

[혼돈이 침투합니다!]

경고 메시지가 연달아 떠오른다.

일단 마계와 연결되어 있는 건 사실인 거 같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키햐아아악!”

“으으으으!”

“도망쳐!”

균열이 열리고 빠져나온 건 군단장도 병사도 아니라는 것.

마족으로 보이는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쏟아진다. 그중에는 이지를 상실한 듯 울부짖는 자도 있었으나 공통점은 있었다.

“저리 비켜!”

“문을 닫아! 닫아야 한다고!”

균열을 통해 넘어오는 무언가를 피해 달아나고 있다. 균열을 닫으라며 소리치는 것도 같은 이유겠지.

이제야 알겠다. 후보지 4곳 모두에 차원 균열이 열린 이유.

“침공이 아니야 이건. 대피야.”

“그런 거 같넹. 으아앙! 데이본드가 안 나왔다고 좋을 게 아니었잖아!”

단순히 우리가 매복할 것을 염두에 둬서 이런 일을 벌인 게 아니다. 녀석들 입장에서도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

아무렇게나 열 수 있었다면 진작에 열어서 쳐들어왔겠지. 당장 연결이 불안정한 것만 봐도 분명하다.

다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계가 무너지기에 억지로 문을 연 거다.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이 너머에 있을 괴물.

‘혼돈의 파편.’

이번 테마를 알겠다. 어째서 다른 80층대 시나리오에 비해 위협이 크지 않았는지. 이건 디팬스다. 혼돈의 파편에 쫓겨 이곳으로 넘어오려는 마족들을 막아 내는.

초반부터 완전히 틀어막았으면 별다른 문제 없이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마족과 더불어 혼돈의 파편과도 일전을 벌일 수 있는 것.

다행이랄까.

“해볼 만하군.”

우리는 나쁘지 않게 마족의 침공을 막아 냈다. 적어도 마족들을 상대하는 데 있어 부담감은 적은 편이라는 것.

할 일은 간단했다.

“냥펀, 애들 올 때까지 혼자서 버틸 수 있지?”

“엉?”

“역시, 믿고 있었어!”

“아니잇! ‘엉’이 아니라 ‘엉?’이라구! 야!”

냥펀이 뭐라고 했으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균열을 향해 몸을 던졌다.

* * *

균열을 타고 빠져나오는 마족들이 걸리적거렸지만 나를 공격하기보다는 밀치고 도망치기 바빴기에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상황이 예상보다 꼬이기는 했지만 해결 방법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전에 만났던 녀석을 상대했을 때랑 똑같이 하면 돼.”

균열을 통해 넘어오려는 혼돈의 파편을 상대하는 건 이미 경험이 있지 않던가. 정령계에서 만났던 스쿠룬타. 죄책감과 변명으로 이루어져 있던 녀석을 상대했을 때도 지금과 같았다.

“흠!”

코를 찌르는 혈향에 얼굴을 찌푸렸다.

균열의 틈은 난장판이었다. 미쳐 빠져나오지 못한 마족들은 육편이 되어 사방에 흩어져 있었고,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공간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눈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지만 무시하고 인벤토리를 열었다. 여기서 해결하지 못하면 여기와 똑같은 풍경이 세계 곳곳에 펼쳐질 테니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난 할 수 있어.’

내게는 타락한 천사의 검이 있으니까.

경계를 끊는 검. 등급과는 별개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 대상에는 차원의 균열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마계와의 연결만 끊으면 굳이 혼돈의 파편을 상대할 필요 없다는 것. 바로 능력을 타락한 천사의 검을 사용한 후 탈출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끝이기는 한데.

“아니.”

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쉽게 쉽게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런 말은 없었잖아, 릴카!”

아무래도 쉽게 가기는 그른 거 같다.

80층에서 받은 릴카의 퀘스트.

[릴카의 부탁(7)-강제 퀘스트]

-당신을 위한 마음이 느껴지시나요?

-감사한 마음으로 구르란 말입니다!

-라프테의 마지막 양심(0/1)

-목걸이는 반짝반짝입니다!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라프테의 존재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통로를 따라 걸어오는 존재. 권능을 통해 보이는 정보에 숨을 길게 내뱉었다.

[라프테]

-혼돈의 파편.

-도주와 실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라프테가 어떤 녀석인가 했더니만 혼돈의 파편일 줄이야.

“진짜 90층에 올라가면 딱밤 100대다.”

이 중요한 걸 말 안 해?

시스템 제약 때문에 말하지 못한 걸 수도 있지만 괘씸한 건 괘씸한 거다.

물론 딱밤도 위로 올라가야 때릴 수 있는 거지만.

우선은 집중하자.

“별수 없지.”

“그에에.”

타락한 천사의 검을 도로 인벤토리에 넣고 혼돈검을 뽑았다.

녀석 또한 터벅터벅 내게로 다가온다. 다른 혼돈의 파편과는 사뭇 다른 느낌. 비교적 차분하게 움직인다고 해야 하나.

전에 본 녀석은 말 그대로 미친놈이었는데.

“오오. 그대가 이블아이로군.”

“그래, 나다. 나에 대해 들었겠지. 델버튼이든 스쿠룬타든 어떤 놈이든.”

어쩌다 보니 이 녀석들에게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안 될 거 같은데 말이지.

가볍게 대화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긴장감을 놓지 않았다. 저러다가 언제 돌변해서 달려들지 몰랐으니까.

애초에 혼돈의 파편에게 신뢰가 별로 없다. 멸망을 몰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변덕이 워낙 심한 놈들인지라.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아니면 혼돈의 파편이 되면서 인격이 바뀐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알 바는 아니고.

‘저거군.’

난 녀석이 차고 있는 목걸이에 주목했다.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는 녀석. 그중 유독 탁한 빛을 내뿜는 목걸이가 있었는데.

[라프테의 마지막 양심(S)]

-혼돈의 파편, 라프테의 마지막 양심입니다.

-아차! 몸 밖으로 나왔네요.

-라프테는 양심이 없습니다!

-라프테의 인간성과 기억이 일부가 깃들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물건이다.

차분히 시선을 옮기며 녀석을 바라봤다.

하얗게 질린 피부. 파랗게 칠해진 입술과 짙은 다크서클.

푸르게 빛나는 머리카락은 중력을 거스르고 하늘거린다.

외형적으로 보이는 특이점은 없는 거 같고. 중요한 건 녀석이 어떤 힘을 쓰냐는 것인데.

‘델버튼은 역병의 안개를 내뿜었고, 스쿠룬타는 그냥 미친놈이었지. 다른 능력보다는 육체적으로 뭔가 이상했었어. 생김새도 그랬고.’

혼돈의 파편이라고 다 같은 타입은 아니라는 것.

아마 신체 변화가 적은 것으로 봐서는 육체파보다는 자기만의 특별한 능력을 쓰는 쪽을 즐기는 게 아닌가 싶다.

확실한 건 봐 봐야 알겠지만.

-콰직

“아차, 실수.”

녀석이 바닥에 널브러진 마족의 시체를 밟는다. 그 바람에 얼굴까지 피가 튀었으나 녀석은 웃으며 혀로 피를 핥아 냈다.

“신선한 게 참 좋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응. 전혀.”

오케이. 이 녀석도 제정신이 아니다.

그나마 멀쩡해 보여서 가능하면 대화 좀 나누면서 혼돈의 파편에 대한 정보나 더 뽑아 볼까 했더니만. 그냥 입 다물고 공격하는 게 낫겠다.

무리하지는 말자.

‘굳이 피 튀기게 싸울 필요는 없어. 목걸이만 챙기고 타락한 천사의 검을 쓰면 돼.’

판단을 마친 난 앞으로 돌진했다.

최대한 빠르게. 노리는 것은 녀석에게 치명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움찔거리게 만드는 것.

무슨 생각일까. 코앞까지 당돌했음에도 녀석은 꼼짝하지 않았다.

발을 내뻗으며 검을 휘둘렀다. 마음만 먹는다면 녀석의 목까지 베어낼 만한 거리였으나.

-촤악

검은 닿지 못했다.

바닥에 흥건하게 깔린 피. 비정상적으로 미끄러운 피에 발이 미끄러졌고.

“이런, 발을 잘 디뎠어야지.”

[예상치 못한 실수가 발생합니다.]

[영역 내 모든 실수는 라프테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난 그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입꼬리를 올린 녀석이 손을 들어 올린다. 그대로 내 몸을 꿰뚫으려는 동작. 균형을 잃은 상태에서 피하는 건 거의 불가능. 몸에 힘을 주며 버틸 준비에 들어갔지만 충격은 없었다.

“어?”

“음?”

[행운 스텟이 발동됩니다!]

-촤아아악!

예상보다 더 발이 미끄러지며 바닥에 넘어졌으니까.

그뿐일까.

-콰직!

“크아아악!”

의도치는 않았지만 넘어지며 녀석의 발등에 혼돈검을 찍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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