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3화 균열은 어디에
샤일의 마탑주 임명식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가 얼어붙었다.
각자 무기를 꺼낸 상황. 손가락 한번 까딱하면 바로 전투가 벌어질 상황이었으나.
“으하하하하! 대단한 패기야!”
“이거야 원, 이야기는 들었지만 보통이 아니오.”
황제가 웃음을 터트리는 것으로 분위기가 깨졌다.
목청이 터지라 웃는 탓에 기사들은 어쩔 줄 몰랐고, 덩달아 웃는 교황의 반응에 사제들 또한 눈치를 보았다.
샤일은 창피한지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난 뻔뻔히 나가기로 했다.
“칭찬이라 생각하지.”
“제발 닥쳐 줘.”
그럴 수 없지.
상황에 따라서는 실력 행사까지 염두 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나와 주면 나야 고맙지.
한참을 웃던 황제와 교황이 웃음을 멈추더니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재밌는 이야기야. 그래, 맞는 말이지. 우리에게는 공통된 목표가 있지 않았던가.”
“본질을 꿰뚫는 말이오. 우리가 촌극을 찍고 있었어.”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기사들과 교인들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무기를 집어넣었다.
자신들이 따르는 주인이 이렇게 나오는데 본인들이 성을 내 봤자 웃기는 일이었으니.
대충 분위기는 잡힌 거 같고.
“그래, 솔직히 인정하지. 마탑에 첩자가 있다는 건 우리라고 안전하지는 않다는 뜻이야.”
“지금도 변절자나 이단은 꾸준히 잡고 있소. 어디까지 들어왔는지는 모르오만 적지는 않을게요.”
이렇게 순순히 인정할 줄 몰랐지만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애초에 마족의 전략이 그런 쪽이기도 했고. 당장 첫 번째 챕터에서 만난 마족도 영지를 차지할 계략을 짜고 있지 않았던가.
스윽. 황제가 탁자에 팔꿈치를 붙인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이번에 새로운 예언이 나왔다는 건 잘 아실 거고. 그동안 미루어 왔던 결전이 코앞까지 왔다는 것도 인지했겠지.”
“결전이라…….”
“첨언하자면 헤렐다의 예언은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시간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들이 몇 개 있었죠. 길어야 일주일. 제가 해석한 내용으로는 그렇습니다.”
정신을 차린 샤일이 거들었다.
다름 아닌 꿈 해석자의 증언이다. 지금까지 헤렐다가 했던 모든 예언을 구체화한 장본인인 만큼 신뢰도는 분명했으니 황제와 교황 또한 허투루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좋다. 시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내부에 있는 첩자를 이용하자는 건 무엇이지?”
“별거 없어. 놈들보다 빠르게 데이본드가 등장할 장소를 찾아낸 후 병력을 다른 곳으로 보내는 거니까.”
“엉뚱한 장소로 병력을 보내 눈속임을 하겠다는 것이군. 나쁘지 않은 방법이나 너무 얕은수가 아닐지 걱정되오만.”
교황의 우려는 타당하다.
병력을 보낸다? 그 정도 눈속임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고, 또한 적들도 조심할 만한 사항이었으니까.
어중간한 병력 이동으로는 티도 안 날 가능성이 있고.
다만.
“나와 파반트가 미끼가 될 거야.”
내가 직접 움직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숭배자들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는 눈엣가시. 반드시 처단하고 싶은 존재였으니까.
게다가 마족의 배신자인 파반트가 함께한다?
‘우리가 있는 쪽에 시선이 쏠릴 가능성이 높아.’
자만하는 게 아니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니까.
흑마법사 무리에는 숭배자들이 다수 섞여 있다. 그들에게 있어 이 세상은 재현된 가짜 세계에 불과하며, 황제든 교황이든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인형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등반가다. 반드시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이자 놈들이 경계할 만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는 자만이라고 말할지 몰랐으나 사실이 그러했다.
나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간 헌터들이 있다. 그 수가 소수일지라도 분명한 사실. 그럼에도 숭배자들은 내게 더 신경을 쓰고 있다.
내가 그들에게 끼친 피해가 많기 때문에? 그것도 있겠지만 놈들의 목적은 위로 올라가는 등반가를 고꾸라트려 세상을 멸망시키는 거다.
그래야 탑은 계속해서 존재하며 다음 세계로 넘어갈 테니까.
그렇다.
‘내가 보기에 탑이란 것은 100층까지 올라 완전히 클리어하는 것이 가능해.’
짐작이기는 하다.
탑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모든 코인을 소모하거나 100층까지 클리어하는 것.
처음 탑에 들어설 때 말해 준 것처럼 간단하다,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지만.
만약 100층에 올라서도 탑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숭배자들이 왜 방해를 할까.
지금은 혼돈의 파편이 되어 버린 영웅들은 어째서 100층 클리어가 불가능할 시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재앙이 될 걸 알고도 도전한 걸까.
‘탑을 없앨 수 있거나 적어도 한동안 기능을 멈춰 버릴 수 있을 거야.’
모든 숭배자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숭배자들은 영생을 꿈꾼다.
본인이 엉뚱한 일에 휘말려 죽지 않는 이상, 탑이 존재하는 이상,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는 거다.
이게 행복한 삶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말뿐인 영생이 아니라 실질적인 영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당장 다른 NPC나 등반가를 포섭할 수 있었던 이유기도 하고.
하지만 내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가치다. 이 망할 탑에서 영원히 살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을뿐더러 밖으로 나가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싶으니까.
무엇보다 무한 코인 때문에 무조건 100층을 클리어 해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처억. 테이블에 손을 올렸다.
“의문을 품는 자도 많겠지. 용사 후보는 나를 포함해 여러 명이잖아. 여기 새롭게 무너진 마탑의 마탑주가 된 샤일도 그렇고, 전에 만났던 성검 보유자도 그렇지. 몇몇은 죽었지만 살아 있는 자들은 분명히 있고 방금 말한 이들을 제외해도 1명은 더 있어.”
용사 후보라는 것은 세계의 희망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그 자체로 사명감이 되기도 하거니와 대단한 명예를 가지고도 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나와 샤일, 파반트를 만나러 가는 길에 마주쳤던 베칼. 마지막으로 범죄자 출신도 한 명 있다.
그 외에 후보자라 들리던 이들은 다 죽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 용사 후보라서 부여받는 명예와 권력, 기타 돈이나 다른 이득도 있지만 반대로 짊어져야 하는 책임도 많다.
누구보다 위험한 장소로 들어가 승리해야 한다는 것. 인류의 희망이란 그런 것을 뜻했다.
나야 단순히 등반을 위해 움직였을 뿐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같은 생각은 아니다.
중요한 건 나와 이들의 목표가 같다는 것.
난 손가락을 들었다.
“후보지는 총 4개. 그중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따지면 두 군데로 나뉘지.”
“맞는 말이다. 검증 작업이 남았지만 그러하지.”
“극비 내용인데 잘 알고 있소. 새롭게 자리에 오른 마탑주가 이야기해 준 것일 테지. 두 분의 신뢰에 감탄하오.”
후보지는 4개로 좁혀진 상황, 그중에서도 유력한 곳은 2개.
이곳도 지금까지 보여 준 속도를 봤을 때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지금 바로 움직일 거야. 그래야 적의 눈을 속일 수 있을 테니까.”
난 곧장 이동하는 것을 떠올렸다.
이미 첩자가 내부에 있는 상황. 여기서 움직여야 적의 의심을 피할 수 있다.
확률에 맡기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었으나.
“내가 아니더라도 데이본드를 상대하는 건 문제 없어.”
굳이 나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할 필요는 없다.
내게는 멤버들이 있고, 멤버들이 아니더라도 다른 상위 헌터들이 있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샤일을 비롯해 제국과 교단이 있다.
오히려 내가 걱정하는 건…….
‘호페그라마가 말했었지. 타 차원의 혼돈의 파편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고.’
이 세계 마지막 드래곤인 녀석이 혼돈에 당한 것. 그리고 놈이 이곳을 넘어오는 것을 막아 낸 것.
난 이것 또한 중요하게 여겼다.
‘너무 수월하게 막아 냈어.’
어쩌면 이게 정상적인 난이도일지 모른다. 80층대에 혼돈의 파편이 전면으로 나서는 것은 밸런스가 맞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모습 한번 안 보이는 건 의심쩍은 상황.
거인계를 맨 처음 겪었기에 그렇게 느낀 것일지 모른다. 지금까지 겪었던 80층대 세계와 달리 이곳은 종족값이 높은 곳은 아니니까.
상대적인 부분이 있다는 거다. 거인계가 느꼈을 위협과 정령계가 느꼈을 위기.
그리고 인류가 느꼈을 압박감은 상대적으로 다르다. 애초에 앞선 두 세계는 게이트나 몬스터의 등장은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았으니까.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어디까지 80층대는.
‘멸망에서 벗어나려는 세계.’
실질적인 위협의 수준과 별개로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던 세계를 테마로 한다.
난 집중했다.
내가 아는 위협과 실질적으로 이 세계가 느끼는 위협.
그 사이에 있을 경계선과 대응할 수 있는 범위를.
“우리의 위협은 크게 둘. 탑 숭배자, 아니지. 흑마법사 무리와 마족들. 마족의 수장인 데이본드. 이놈들을 막는 것이 우선이야.”
혼돈의 파편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 사실을 잊지 말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눈에 보이는 것부터 해결하자.
참으로 간단한 명제이자 경험의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
난 이미 얻어야 할 혼돈 수치를 모두 모은 사람이며, 데이본드를 막아설 수 있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그렇다면 믿어야 한다.
그들이 충분히 해낼 수 있음을, 예상외의 변수에서 해결법을 찾아낼 수 있음을.
“용사 후보자들을 불러. 다른 이들도 움직일 거야. 고르게 분배하면 해낼 수 있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
누구라고 정확히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위험이 따라온다면 그때는 내가 막을 거야.”
이미 막아 낸 경험이 있으니까.
적어도 현시점에 탑을 오르면서 나보다 많이 혼돈의 파편과 마주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알려 주기만 하면 돼. 데이본드보다 감당할 수 없는 적은 내가 상대할 테니까.”
그게 설사 죽음을 담보로 하는 것이라도.
* * *
제국 북부 구릉지.
난 그곳에 서서 차를 홀짝였다.
이곳 문화가 은근히 차를 좋아하더라고. 맛도 나쁘지 않아 어느새 즐기게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녹기 시작한 설산과 미라처럼 말라붙은 몬스터의 사체뿐.
“이게 맞냥?”
“몰라. 나도 봐야 알지.”
내 옆에 있는 건 냥펀이었다.
데이본드가 소환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은 총 4개.
한정된 병력으로 모든 것을 커버하기는 힘들었고, 나와 냥펀은 가장 가능성이 적은 곳으로 이동했다.
나머지 세 구역은 핥짝이와 탈모맨, 상위 헌터들이 각각 책임지기로 했고.
“으아앙. 왜 내가 여깄냐구!”
“업보려니 해야지. 그러게 제국에서 명성 떨치래?”
“이이이이! 에잇! 이거나 맞아라!”
“아파! 악!”
제국에서 마족과 흑마법사를 막는 데 일조한 냥펀은 나와 함께하기로 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적들 입장에서 가장 죽이고 싶은 대상 중 하나가 냥펀이었기 때문.
본인은 안전제일이라면서 제국에 붙어 뒤에서 보조를 한 거 같지만, 그 결과 흑마법사의 타격이 엄청난 상황이라서 말이지.
애초에 나와 함께 움직이는 시점에서 숭배자들의 암살 타깃 우선순위에 들기도 했고.
‘다른 녀석들은 어떤지 모르겠네.’
오지혁과 김소담은 핥짝이 쪽에 붙었고, 샤일과 파반트는 탈모맨 쪽에 붙었다.
용암 요정과 근육 요정, 김서균과 다른 상위 헌터들은 남은 후보지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제국이나 교단은 전력을 아낀 채 데이본드가 나타날 곳으로 병력을 보낼 타이밍을 노리는 중.
‘슬슬 시작인가.’
샤일이 예상한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통신구를 확인했다. 각각 통신구를 통해 상황을 공유하기로 했다. 자신이 위치한 곳에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다른 쪽을 지원하기로 했으니까.
-구우우우우우우
“온다.”
난 짤막하게 말을 마치고 정면을 노려보았다.
주변을 감싸는 마력과 마기의 흐름도 거칠어지고 있다.
무엇이 나올까. 조금은 긴장하며 정면을 바라봤고.
-삐삐삐삐!
그와 동시에 통신구가 빛과 소음을 내뿜었다.
어딘가에 변화가 생겼다는 신호겠지. 그럼에도 나와 냥펀은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으니.
“…아니.”
“이게 뭐냐궁!”
차원의 균열은 이곳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