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화 대화는 그쯤하고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단순히 때려 부수는 거면 몰라도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건 힘들어서 말이지.
특히나 무너진 마탑에는 전투 경험이 있는 마법사들이 많다. 대부분 마족과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세상이 개판이라는 뜻은 치안이 개판이라는 말이기도 해서 대인전에 익숙한 이들도 꽤 있었다.
현시대를 대표하는 인류의 주축 세력 중 하나인 만큼 강한 녀석들도 제법 있었고, 파반트가 조금만 늦게 7군단장을 데리고 와 진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면 여럿 죽지 않았을까.
“끄으으윽.”
피떡이 된 채 포박되어 있는 7군단장. 그동안 쌓인 게 많기는 했던 모양인지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재생력이 뛰어난 녀석이라 언제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몰라 끈끈한 무언가로 몸 전체를 붙여 놨다.
지금은 단단하게 굳어 얼핏 보면 유리구슬 속에 갇혀 머리만 내놓은 모습. 마족이라 그런가 신기한 마법을 많이 알고 있다.
아무튼.
“마탑주가 마족이었을 줄이야.”
“마족이 마탑주를 죽이고 연기를 했던 거겠지. 언제부터 그랬는지가 중요하다.”
“내부적으로도 정돈을 한번 해야겠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7군단장의 증언과 자료들 덕분에 오해를 푸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마족들의 온갖 괴상한 술수를 겪었던 무너진 마탑 사람들이라 받아들이는 게 빨랐을 수도 있고.
당장 옆에 있는 동료가 마족에게 포섭되거나 조종당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으면 망설임 없이 공격할 수 있는 자들이기도 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아직,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건 아니지 않소!”
“저자 또한 마족. 어떻게 믿을 수가 있지?”
“오히려 자네가 더 수상하군, 샤일. 이블아이도 그렇고 단기간에 유명세를 떨치지 않았나. 마족과 연관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나?”
여전히 마탑주가 마족임을 믿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고, 되려 나와 샤일을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 정도 혼란은 예상했다. 나라도 그렇겠지. 다만 현실을 냉정하며 마탑주가 죽은 이상 마탑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
나야 마탑 소속이 아니니까 차치한다지만.
“무례한 인간들이 많군. 놀랍지 않다. 태초부터 그러한 족속들이었으니.”
-쿠구구구구궁
“워워. 진정해, 호페그라마.”
여기 있는 샤일은 좀 다르다.
교단에서 성녀라고 홍보하고 있는 헤렐다의 연인이자 그녀의 예언,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해석자.
동시에 보기 드문 정령 마법사이자 이 세계 마지막 드래곤인 호페그라마의 계약자.
지하에서 싸울 때 계속 땅이 울린다 했더니 샤일이 전투에 휘말린 걸 깨달은 호페그라마가 난동을 부렸다고 한다.
다행히 브레스를 쏘지는 않아서 일대가 초토화되는 일은 없었지만 무너진 건물이 상당하다나.
지금도 애꿎게 휘말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마탑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본론으로 돌아가, 여기까지만 해도 샤일의 입지가 높은 상황인데.
“도움을 줘도 난리네. 쯧쯧.”
“왤케 못났냥!”
나와 멤버들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번 일이 벌어지고 가장 먼저 연락한 녀석들. 탈모맨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헤렐다 옆에 있기로 했고, 핥짝이와 냥펀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그냥 온 건 아니고 핥짝이는 제국, 냥펀은 교단과 협력하고 있기에 일종의 사절단 느낌이라고 할까.
시나리오를 여러 번 겪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으니, 규모가 큰 일에 휘말렸을 경우 한곳에 머물지 않고 흩어져 각 세력을 흡수하는 편이 좋다는 거였다.
그래야 내가 모르는 정보를 얻기도 좋고, 다른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을 주기도 쉬웠으니까.
괜히 중간에서 분탕 치는 놈들을 색출해 처치하는 것도 편하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현재 무너진 마탑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은 샤일이라는 거다.
반발은 있겠지만 그동안 쌓은 업적도 있고, 지지하는 세력도 있으니 문제없이 접수할 수 있겠지.
“본의 아니게 마탑주가 되게 생겼군.”
“좋은 게 좋은 거지.”
“후우. 부담감만 커지는 거 아니냐고.”
샤일이 작게 한숨을 내쉬길래 어깨를 두들겨 줬다. 괜찮다. 왜냐, 부담감을 느끼는 건 샤일이지 내가 아니니까!
“그에에.”
덕춘이가 짠 시선으로 날 바라봤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사실인데. 내가 괜히 소속 안 가지고 활동한 게 아니다.
미안하지만 내게는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 적어도 마탑은 믿을 수 있는 세력이 되었고,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거니까.
특히나 7군단장이 하려고 했던 일을 막았다는 게 중요했다.
“심문은 얼추 끝났나?”
“이자를 상대로 심문을 하는 건 의미가 없지. 진실은커녕 거짓말만 할 게 뻔하니까.”
“그건 상관없어. 써먹을 방법은 많으니까. 심문이야 교단에서 전문적으로 해 주면 또 모르는 일이고.”
7군단은 은밀하게 정보를 수집하거나 상대 진영을 흔드는 역할을 주로 한다고 했다. 다른 군단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감시하는 역할도 한다고는 하는데 그거야 중요한 게 아니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내부에 침투한 첩자들을 찾아내고 데이본드가 소환될 장소를 찾는다.”
“심플하군.”
“과정은 어떨지 모르지만 말이야.”
대략적인 방향은 정해졌다.
남은 건 실행으로 옮기는 것뿐.
시작은 여기부터. 샤일을 정식으로 마탑주의 자리에 앉혀 보자.
* * *
사람들은 왜 명예를 추구하는가.
단순히 존경을 받고 싶어서? 그런 것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생각 외로군.”
“그동안 살아왔던 게 빛난 거지.”
명예라는 건 돈과 권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어떤 방향일지는 모르겠지만 샤일의 경우에는 추종자들을 모으는 힘으로 발현되었다.
“그동안 샤일이 세운 업적이 대단하지. 용사 후보에도 올랐고 말이야.”
“제국과 교단에서도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지지한다는 사인을 보내왔네.”
“드래곤을 부리는 자라, 어느 누구도 가지지 못한 타이틀이지.”
“듣자 하니 무너진 마탑의 밑바닥부터 올라왔다던데.”
“그야말로 희망이라 불릴 수 있어. 마탑주의 자리에 어울리는 재목이야.”
중간중간 냥펀의 여론몰이도 있기는 했지만, 의외로 샤일이 마탑주 자리에 앉는 것에 동의하는 이들이 많았다.
내부적으로도 그렇고 제국과 교단에서도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다. 샤일이 그만큼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는 거겠지만.
교단에서야 헤렐다를 보호하고 있으니 연인인 샤일과의 접촉점이 많았으며, 제국 역시 샤일을 풋내기로 생각하는 만큼 다루기 쉬울 것이라 예상하고 있을 거다.
특히나 용사 후보라는 타이틀. 무너진 마탑주가 아닌 용사 후보라는 프레임을 씌워 선동하기 얼마나 좋은가.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속으로는 여러 이해관계가 엮여 공식적으로 마탑주가 된 샤일.
모두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그가 첫 행보를 주시하는 사람은 많았고.
“귀한 분들을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하. 그렇게 격식 차리지 않아도 되네. 제국은 언제나 무너진 마탑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교단과 마탑의 우정이야말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아니겠소?”
그 중심에는 황제와 교황이 있었다.
권력의 중심. 하나로 뭉쳐진 인류 영역을 대표하는 자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나 어디까지나 그들에게나 해당하는 일이었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황제의 호위를 맡기 위해 대열해 있는 기사단과 교황의 뒤를 지키고 있는 교단의 3성.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마지막으로 샤일의 뒤에 선 건 바로 나와 탈모맨.
핥짝이와 냥펀은 오지 않았다. 나와의 친분이 있다는 걸 알아낸 황제와 교황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배치했다나 뭐라나.
배치된 병력 간의 기세 싸움이 이어진다. 너무 노골적이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으나.
‘이때다 싶어서 마탑을 집어삼키겠다 이거군.’
의도는 뻔히 보였다.
이제 막 마탑주가 된 시점이 가장 약할 때. 초장부터 주도권을 가져가겠다는 거지.
진절머리가 난다. 어째서 세상이 무너지고 있는 와중에도 정치 싸움은 사라지지 않을까.
“후우.”
작게 한숨을 쉬자 반대편에 있던 기사가 얼굴을 구기더니 검에 손을 올린다.
오버하네. 충성심 어필인가.
“여기가 어느 안전인 줄 알고!”
“아, 미안. 졸려서.”
“뭐라? 세간에 알려진 명성도 믿을 게 못 되는구나!”
“그만.”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지만 황제가 가볍게 손짓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뒤로 물러난다.
“소문은 익히 들었네, 이블아이. 용사 후보 중 하나. 나도 그쪽을 보고 싶었지. 이제야 보는군.”
“그래, 반갑다. 군단장한테 쫓기고 있는데 사리 분별 못 하고 계속 보자 해서 진짜 칼 들고 찾아갈까 싶었어.”
-채재재재쟁!
내 말에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는다.
“도저히 그냥 들어 줄 수가 없구나.”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자가 이를 악물고 노려본다.
아, 저 사람도 제법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하도 밖에만 돌아다녀서.
살기등등한 기사들과 달리 교황은 입꼬리를 올리는 중.
“듣던 것보다 호탕하오, 이블아이. 격이 없긴 하군.”
“뭐래. 나보다 신성력 딸리는 게.”
“무엄하다!”
-차아아아앙!
이번에는 교단 측.
교단의 3성은 물론이고, 그들이 이끄는 신성군단 정예들까지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오. 뭐야. 싸우는 건가?”
탈모맨이 흥미로운 눈으로 건틀릿을 부딪친다.
참 좋아. 내가 뭔 짓을 해도 그러려니 해 주고.
정작 우리 앞에 앉아 있는 샤일은 얼굴을 쓸어내린다.
“왜 그러냐, 진짜.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어? 날 호위하려는 게 아니라 엿 먹으라고 이러는 거지?”
“어허, 고상한 말을 쓰시지요, 마탑주님.”
“야이, 씨!”
샤일이 울컥했으나 사뿐히 무시하고 근처에 있던 의자를 하나 끌고 와 앉았다.
녀석들 입장에서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으나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정치질하는 것도 좋고, 서로 신경전 하는 것도 좋은데 건설적인 이야기도 하는 게 좋지 않겠어?”
내가 굳이 이 자리에 따라온 건 단순히 샤일의 호위를 위해서가 아니다.
가장 큰 세력을 대표하는 3명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기에 온 거지.
“전 마탑주가 마족이었다. 제국과 교단에도 첩자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고, 그들을 찾아내는 건 많은 시간이 걸리지.”
빙글 손가락을 돌렸다.
첩자는 잡아야 한다. 우리 쪽 정보가 마족에게 넘어갈 위험도 있거니와 그들이 내부에서 혼란을 주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안 그래도 상황이 이런데 서로 견제하고 있으면 시간이 더 늘어진다. 그동안 흑마법사와 마족들은 힘을 모을 거고.
“오히려 이쪽에서 치고 나가는 건 어때? 공동의 목표를 잊지 말자고. 마왕, 데이본드는 머지않아 차원의 틈을 타고 넘어온다. 예언으로 나왔으니 그건 확실하지.”
차원 균열이 생길 후보지는 정해진 상황. 지금도 내가 사로잡은 흑마법사를 데리고 다니면서 조사를 이어 나가고 있다.
최근 소식에 의하면 헤렐다는 또 다른 미래를 봤다. 근시일 내에 균열이 벌어진다는 것. 샤일의 해석에 의하면 늦어도 일주일 내로 균열이 벌어지고 데이본드가 모습을 드러낸다.
내부에 첩자가 있는 지금, 흑마법사 쪽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말을 잇기 전에 권능을 사용했다.
적어도 이곳에 모인 이들 중에 숭배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케이. 보안은 이 정도면 됐고.
“영양가 없는 대화는 이쯤하고 이만 전쟁을 끝내는 건 어때?”
끼익.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내부에 있을 첩자들을 이용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