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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520화 (520/740)

520화 마탑주

제국 내부에 들어온 건 오랜만이었으나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비슷하기도 했거니와…….

“어째 무너진 마탑은 양지로 나와서도 이러냐.”

“오랫동안 이어져 온 관습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어렵지. 파반트도 있고.”

“그거 미안하게 됐군.”

샤일을 따라 이동한 곳은 무너진 마탑이 가지고 있는 은거지 중 하나였다.

일반적인 마탑은 거대한 건물을 중심으로 상권이 들어선 형태가 대부분이다만 여기는 좀 달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마을이나 마찬가지. 눈에 띌 만큼 높은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특별한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건물 곳곳에 소속 마법사들이 들어가 연구를 하거나 잠을 자는 형식.

잠자리도 수시로 바꿔 가며 자거니와, 중요한 자료 대부분은 개인이 가지고 다니기에 보안 부분에 있어서는 꽤 뛰어난 편이었으나…….

“암만 그래도 가구는 새로 좀 사라.”

“아직 쓸 만하거든?”

꿰맨 티가 역력한 쿠션이나 철판을 덧대 고친 의자를 보자니 절로 짠내가 날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지. 마족과 맞서기 위해 움직이는 곳이다 보니 자금 상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서.

인간의 영역이 크게 줄어들며 경제가 많이 꺾이기도 했고.

-끼이이

삐걱거리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녀석이 대접해 준 차를 홀짝였다.

싸구려 맛이 나는 게 정겹기 짝이 없다.

“것보다 하던 말이나 계속해 봐. 마족과의 전면전? 헤렐다가 괜찮은 미래를 봤나 보지?”

“극비 중 하나지. 차원의 균열이 열리는 것을 봤거든. 가동할 수 있는 인원을 전부 써서 예지에 나온 위치를 찾고 있어. 이미 후보지도 좁혀졌고.”

기막힌 우연이군.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찾아온 거였는데.

아직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아니지만 차원의 문은 열렸다. 불안정해서 언제 어떤 식으로 열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마족 놈들보다 먼저 찾는 게 관건이겠군. 마침 도움이 될 녀석을 알고 있지. 인사해. 이름이 뭐더라, 포로 1호?”

“읍읍!”

포박해 놓은 흑마법사의 재갈을 풀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간단한 심문은 마친 상태다.

“사, 살려 주시오. 내가 아는 건 이미 다 말했소!”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혹시 알아? 잠시 까먹어서 말하지 못한 게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치?”

“이런 악독한!”

흑마법사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않나?

아무튼.

“대략적인 이야기는 대충 들었을 거야. 놈들이 마왕을 소환하려는 걸 막았어. 완전히 막은 건 아니라서 확인은 해 봐야겠지만. 중요한 건 마왕 데이본드가 넘어올 균열의 위치를 놈들도 모른다는 거야.”

“우리는 놈들보다 빠르게 그곳에 가서 균열을 막으면 되는 거고.”

“마왕이 넘어오지 못하는 걸 확인한 후 마족들과 흑마법사를 쓸어버리자 이거잖아. 놈들이야 데이본드와 함께 움직일 게 뻔하니 뭉쳐서 다닐 테니까.”

“정답. 말이 잘 통해서 좋다니까.”

“그리고 말이야.”

툭.

바닥에 엎어져 있는 포로 1호를 발로 밀었다.

“녀석들도 균열의 위치를 모른다고는 했는데 아예 모르는 건 또 아니더라고. 차원의 틈이라는 게 아무 데나 생길 수 있는 게 아니라서 특정 조건들이 필요해. 이 친구가 그거에 대해서는 잘 알지.”

굳이 여기까지 힘들게 데리고 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나타날 수 있는 환경은 알고 있다는 것. 특히 이 녀석은 직접 데이본드를 부르는 마법진을 만드는 데 있던 녀석이니까 더 잘 알고 있겠지.

헤렐다의 예언. 제국과 교단에서 나온 조사단. 흑마법사인 포로 1호까지.

이 정도면 흑마법사 무리보다 먼저 위치를 찾아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스윽, 포로 1호에게 고개를 내밀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어. 네가 위치만 정확히 알아낸다면 말이야.”

“이, 이익!”

듣자 하니 마기가 고이는 장소 중 특정한 패턴을 내는 곳이 있다는데 워낙 감각적인 부분이라 이 녀석이 직접 확인을 해 줘야 한다.

이 녀석은 샤일한테 맡기도록 하고.

“둘이서 할 말이 있다고 했나?”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니라 마탑주지.”

내 말에 샤일이 옆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탑주가 보고 싶다는 거 같더라고. 슬슬 계약이 끝날 때가 됐다고 들었지. 아마 그것과 관련된 게 아닐까 하는데.”

샤일의 말에 파반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를 치우고 싶은 모양이군. 이제 와서 나라는 존재가 알려지면 여러모로 골치 아플 테니까. 계약이 끝나면 서로 공격할 수 있으니 이때다 싶었을 거야.”

“그런 말은 따로 없었으니 괜한 짐작은 하지 않는 걸 추천하지. 어찌 됐든 오랫동안 상부상조한 사이잖아?”

“상부상조라. 부인하지는 않지.”

“마지막 정보는 마탑주가 직접 건네준다더군. 도망칠 거면 지금 도망쳐.”

샤일이 넌지시 말했다.

무너진 마탑과 파반트의 관계가 정확인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냥 좋은 사이는 아닌 거 같고.

“가도록 하지.”

-따악

찻잔을 내려놓은 파반트가 손가락을 튕기자 포로 1호가 바닥에 쓰러진다. 기절시킨 건가. 마족의 마법도 상당하군.

적당히 녀석을 묶어 가두는 사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파반트가 방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뒤따라 가려는 샤일을 불러세웠다.

“정보라는 게 무슨 말이야? 파반트를 처리하려 한다는 게 사실인가?”

“나도 정확히는 몰라. 저 녀석이 원하는 정보가 있고 마탑주는 그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 그게 계약 유지 조건이라던데, 으음.”

잠시 미간을 찌푸린 샤일이 파반트가 나간 문을 흘낏 바라본다.

“처리하려는 건 맞을 거야. 이미 마족과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은 충분히 얻었을뿐더러 파반트는 여러모로 위험한 마족이거든.”

“오래 본 건 아니지만 특별히 이상한 행동을 하지는 않던데.”

“과거에 했던 짓이 있어서 신뢰할 수 없어.”

오래전 이야기였다.

샤일이 속한 마탑이 무너진 마탑이라 불리게 된 사건과도 연결되어 있고.

간단히 요약하자면 마족의 침공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고 모종의 이유로 인해 파반트가 마족을 배신, 무너진 마탑과 거래를 하며 어떻게든 마족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러기 전까지 파반트의 손에 죽은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

당장 마족들이 각 왕국에 침투해 내분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파반트가 속했던 7군단의 전략이었다. 그 선봉에 있던 자가 파반트고.

즉…….

‘딱히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거나 인연이 있어서 무너진 마탑에 협조한 게 아니라는 거지.’

비즈니스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계약이 끝나면 돌변해서 마족의 편에 붙을 수도 있다는 것.

이유가 뭐가 됐든 한 번 배신을 했다는 점에서 신뢰는 사라졌다. 그게 500년 전의 일이라 해도 말이다.

‘고민되는군.’

파반트가 죽도록 놔둘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써먹을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위협이 된다면 내가 직접 나서서 없앨 생각도 있다만.

“가자. 나도 궁금하네. 마탑주라는 사람.”

일단은 지켜보자.

그러고 보니 마탑주는 아직까지 마주친 적이 없다.

제국 내에서 활동한 적이 거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 * *

무너진 마탑.

일반적으로 하늘 높이 솟은 탑을 본거지로 삼는 마법사들과 달리 이들의 탑은 지하로 연결됐다.

덕분에 외부에서 봤을 때는 어느 건물이 핵심인지 알아볼 수 없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고, 또 하나 장점이 있다면…….

“분위기 한번 살벌하군.”

“마족에 대한 원한을 가진 이들이 제법 많거든.”

밀폐된 공간인 만큼 내부로 진입한 대상이 빠져나가기가 극히 힘들다는 것.

노골적으로 파반트를 노려보는 것이 당장 시비를 걸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단순히 마족이라서? 혹은 조상 중 누군가가 파반트에게 죽었나?

어쩌면 내가 외부인이라서 모르는 걸지도 모르겠다만 이 정도로 경계하는 건 정도를 벗어난 거 같은데.

뭐라고 해야 하나.

‘밑밥을 좀 뿌린 거 같은데.’

파반트가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렸다거나 과거의 만행을 들추어내며 선동을 했다든가 하는 식으로.

어디까지나 짐작이다. 어쩌면 단순하게 마족이라서 싫어하는 걸 수도 있고.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얼마나 밑으로 내려왔을까. 복도 끝, 커다란 문을 두들긴 샤일이 문을 열었다.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공기가 가득한 곳. 그 안에는 주름이 깊게 파인 노인이 한 명 앉아 있었다.

머리에 화상 자국이 선명하다. 눈가가 쳐졌으나 위로 치켜뜬 눈은 섬뜩할 정도로 선명했으니.

“와 줘서 고맙군. 고생했다, 샤일.”

“별말씀을요.”

“그쪽이 이블아이로군.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그야 뭐, 볼일이 없었으니까.”

샤일이 툭 팔을 쳤지만 무시했다. 내가 무너진 마탑 소속도 아니고 맞춰 줄 필요가 있나.

상대방도 그리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고.

“파반트.”

“오랜만이군. 처음 봤을 때는 꼬마였는데 말이지.”

“넌 그때와 똑같은 모습이고. 마족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젊음이 오래가.”

“그야 7군단 소속이었으니까.”

“그렇겠지. 흠.”

7군단은 위장에 뛰어나다고 했었나.

얼굴을 바꾸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마족이라고 노화되지 않는 건 아닐 테니.

잠깐만…….

‘앞뒤가 안 맞아.’

500년 동안 외모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외형을 바꾸는 실력이 뛰어나다면 왜 여기까지 오는데는 겉모습을 바꾸지 않은 거지?

뿔이든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든 바꿀 수 있는 거 아닌가?

그 정도면 변장이라기보다는 변신에 가깝기는 하지만 마법도 부리는 녀석이다. 당장 녀석의 상관이었다는 군단장도 종족 구분 없이 모습을 바꿔 가며 활동했다고 했고, 파반트는 군단장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일부러 바꾸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오랜 시간이었어. 무너진 마탑과 자네가 함께한 것도 말이지.”

“본 적은 거의 없지만 말이야.”

“가깝게 지낼 수는 없는 사이니까, 안 그런가?”

그의 말에 파반트가 한숨을 내쉰다.

“대가를 내놔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군. 좋아. 길게 이야기할 사이는 아니니.”

마탑주가 품에서 봉투를 꺼낸다.

가볍게 손을 튕기자 허공을 날아 파반트의 앞으로 떨어졌고.

“이걸로 계약 종료군.”

“연장할 생각은 없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아쉽게 됐어.”

[무너진 마탑과 파반트의 계약이 종료되었습니다!]

[파반트는 계약 조건을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무너진 마탑은 파반트에게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건넸습니다.]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습니다.]

[계약이 완전히 소멸합니다!]

-파사사삭

메시지와 함께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이지만 마탑주와 파반트의 심장에서 빛이 났고 이내 잦아들었으니, 그것은 계약의 고리가 완전히 끊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확인 안 해 보는가?”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마탑주가 입을 열었다.

“그토록 원하던 정보이지 않은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7군단장의 위치가 그 안에 있어.”

7군단장이라.

과연, 군단장에게 원한이 있던 게 맞았나.

“네가 신경 쓸 건 아니야.”

얼굴을 구긴 파반트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아쉽게 됐군. 재밌는 걸 볼 수 있었는데 말이야.”

마탑주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동시에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

문밖으로 인기척이 느껴진다. 마탑의 마법사들일 게 뻔하다.

“역시나 곱게 보내 줄 생각은 없었군.”

고개를 내저은 파반트가 팔을 늘어트린다.

자포자기한 건가, 아니.

-스아아아아아!

지금까지 보여 준 적 없던 강력한 마기가 뿜어져 나온다.

어떻게 지금까지 숨길 수 있었는지 의문일 정도로 난폭하고 거센 기세. 샤일 또한 순간적으로 칼날처럼 쏟아지는 마기의 파편에 팔로 얼굴을 가렸고.

-콰아아아아앙!

그와 동시에 문을 부수고 마법사들이 난입했다.

사방에 번뜩이는 마법진. 폭사시키듯 마기를 끌어올리는 파반트.

그리고.

-푸욱

모두의 시선이 파반트에게 향해 있는 타이밍.

난 마탑주의 몸에 검을 찔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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