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화 제국으로
한곳에 뭉쳐 있던 마족들.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정도 규모를 가지고 모였으니 필시 보통 일은 아닐 터.
나와 파반트 역시 인기척을 죽이며 동태를 살폈다.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고 은신 스킬을 사용한 만큼 쉽게 들키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는 게 있으니까.
놈들 중에도 탐색에 특화된 마족이 있을 수 있고.
‘이상하군. 아무리 머릿수가 많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경계가 허술하다니.’
우리의 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마족들의 경계 수준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마족이란 놈들이 체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무방비하게 돌아다니는 멍청이는 아니다.
특히나 군단이라는 이름으로 뭉쳐 있는 녀석들은 나름의 규율이 있는 놈들이었고, 그 사실은 그동안 겪어 봤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뭐랄까.
‘사열식을 보는 거 같아.’
자기 자리를 지킨 채 윗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지금도 부산스러워 보이지만 진짜 움직이는 놈들은 앞단에 있는 녀석들.
공터에 깔렸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한다. 덕분에 시야가 트였으니.
‘흑마법사?’
안개 속에 모습을 숨기고 있던 이들은 흑마법사였다. 마기를 품고 있기는 하다만 인간인 이상 진짜 마족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 차이를 눈치채는 건 쉬운 일이었다.
파반트 또한 저곳에 흑마법사가 대기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지 눈살을 찌푸린다.
모든 흑마법사가 그런 것은 아니나 현시점에서의 흑마법사 대부분은 마족과 계약을 통해 힘을 얻은 존재들.
마법 지식과 마기의 결합으로 강력한 힘을 내는 무리였지만, 본인이 가지지 못한 마기를 마족으로부터 받아들이기에 상하관계가 존재했다.
정말 뛰어난 마법사라 마족을 제압하거나 유리하게 계약했다면 모를까 보통은 마족이 우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저렇게 많은 마족이 모인 곳에 당당히 있을 수 있는 흑마법사라면 거물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나 다를까.
“저 녀석 군단장과 계약했군.”
파반트가 낮게 읊조렸다.
과연 그런 건가. 계약한 대상이 군단장인 만큼 다른 마족들이 불만을 표할 수 없는 거다.
“계약한 군단장을 소환하려는 건가? 그것치고는 너무 거창한데.”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제물이 보이지 않아. 마석이나 영혼을 담은 물체로 대신할 수도 있지만 다른 물건도 보이지 않고 말이지. 구성 자체는 소환 의식 같기는 하다만.”
그럼 뭐지? 주술? 아니면 다른 무언가?
이 부분은 파반트에게 판단을 맡겨야 한다. 흑마법에 대해서는 나보단 이 녀석이 더 전문가라서.
“영문을 모르겠군. 제물도 없는데 소환이라. 저기 있는 녀석들을 제물로 사용할 거라면 또 모를까.”
“하하. 그러게 말이야.”
반쯤은 농담으로 건넨 말. 파반트 역시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지만 그것도 잠시.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미 겪어 보지 않았던가. 게드릭을 소환하는 의식. 그때 사용된 제물에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마족의 시체도 섞여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저 정도 규모면 군단장이 아니야! 마왕이다.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돼!”
“제기랄. 어쩐지 우르르 몰려 있다 했더니만 데이본드를 맞이하러 나온 거였군!”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왜 생각을 못 했을까. 군단장이 한 번에 쓸려 나가며 전력이 줄어든 녀석들. 전황을 뒤집기 위해서는 강력한 카드가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수적인 열세고 나발이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놈들이 하는 짓을 막는 게 중요한 거지.
“무작정 싸우려 하지 마라! 소환 의식만 끊으면 돼!”
“무슨 뜻인지 잘 알았어. 가서 눈길을 끌어!”
“좋다. 제대로 알아 들었… 응?”
파반트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펠라인 스킬을 사용했다.
[프리즘 레인보우(SS)]
“이, 이런! 으아아아아! 와라! 네놈들은 내가 저지하겠다!”
배신당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던 파반트가 이내 마음을 굳혔는지 놈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수많은 마족을 향해 단신으로 덤비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그럼에도 뛰쳐나간 건 내 은신이 완벽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완전 은신 스킬.
코앞에 있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강력한 은신을 자랑했고, 하물며 앞에서 파반트가 눈길을 끌고 있는 와중에 나를 알아보는 이가 있을 리가 없었고.
‘마법진이랑 흑마법사만 해치우면 돼.’
난 곧장 놈들 안으로 파고들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계획을 마쳤다.
“여기까지 방해꾼이 들이밀다니. 제국 놈들 보통이 아니군.”
“아니, 저자는 마족 아닌가. 어째서 이런 짓을?”
고작 한 명이었기에 흑마법사들은 그다지 위기의식을 가지지 않아 보였다.
물론 파반트가 보여 주는 무위가 대단하기는 했지만 절대적인 인원수 차이가 있었으니 머지않아 진압되리라 생각한 것.
그게 실책이었다.
-푸욱
시선이 쏠린 틈을 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녀석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고.
“누구?”
-서걱
옆에 있던 녀석의 머리를 날려 버렸으며.
[파이어 밤(SSS) Lv.6]
-콰아아아아아앙!
마법진을 향해 폭발을 일으켰다.
챕터가 진행되며 내가 가지고 있던 스킬의 레벨이 상승한 건 물론이었고, 새롭게 초월한 스킬 또한 있었으니.
[프로즌 브레이크(SS) Lv.3]
[일렉트릭 쇼크(SS) Lv.6]
얼어붙어 터지는 일대와 얼음 파편과 함께 퍼져 나가는 전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거세게 피어오르는 먼지구름. 갑작스러운 공격에 놈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 틈을 타 난 마법진을 살폈다.
파이어 밤 정도의 위력이면 분명히 박살 나고도 남아야 정상이었지만.
“쿨럭! 쿨럭!”
마법진 바로 옆에 있던 흑마법사의 방어막에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마법을 사용한 건가. 아니면 특별한 아티팩트? 얼굴이 창백한 것이 생명력을 대가로 뭔가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상태를 봤을 때 한 번 막은 것이 한계.
“죽어.”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공격하면 그만이다.
망설임 없이 검을 긋자 녀석의 몸이 반토막 나 바닥을 나뒹군다.
문제가 있다면.
-우우우우우웅!
녀석이 죽었음에도 마법진이 활성화됐다는 것.
자동으로 작동하는 방식이었나. 게다가 나를 잡기 위해 마족들이 움직였고.
[차원의 틈을 열기 위한 제물을 흡수합니다.]
-사아아아아악!
한쪽에 모여 있던 마족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역시나. 제물을 얻기 힘드니 같은 마족을 제물로 바치려고 한 건가.
순식간에 마족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하늘로 치솟은 마기가 마법진에 빨려 들어간다.
-콰과과과과광!
가차 없이 마법진을 향해 연달아 폭발을 일으켰다.
방해하던 흑마법사까지 죽은 마당에 마법진이 나의 공격을 받아 내는 건 불가능.
-쩌저저저적!
그대로 균열이 가더니 박살 났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말이지.
[차원의 틈이 긴급 시퀀스에 돌입합니다.]
[마기가 부족합니다.]
[불안정한 균열이 벌어집니다!]
“안전장치를 해 뒀군.”
철저한 녀석들. 혹여나 중간에 마법진이 파괴되어도 불안정하게나마 작동할 수 있게 만들어 뒀다.
쩌억. 뭔가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일대가 멈춘다.
[차원의 틈이 위치를 옮깁니다.]
균열의 위치를 바꿀 수도 있던 건가. 내가 마법적인 지식이 있었다면 대응을 빨리했을 텐데 이 부분은 좀 아쉽다.
그래도.
“일단 저지한 거에 의미를 둬야겠군.”
“그에에.”
당장 급한 것은 끝냈다.
오히려 이 부분이 나을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 있는 건 나랑 파반트 두 명이 고작. 이곳에 모인 마족 전부를 쓸어 버리는 건 힘들었으니까.
억지로 차원의 틈을 열고 소환된 데이본드나 다른 군단장이 가세하면 더 힘들어지고.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번 것에 만족을 하자.
대신…….
“파반트! 도망칠 준비해!”
-콰악!
난 아직 죽지 않은 흑마법사 한 명을 움켜잡았다.
정보는 얻어야지. 불안정하게 발생한 차원의 틈이 어디에 나타날지 알 수만 있으면 그곳으로 병력을 보내면 된다.
제국에 영향력을 끼치는 멤버들도 있으니 준비하는 건 쉽겠지.
-구구구구구구구
땅굴 이동으로 파반트가 싸우고 있는 곳으로 진입.
“가자고.”
“현명한 선택이다.”
[무지개다리(S)]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장에서 벗어났다.
* * *
제국 초입.
제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영역.
많은 영토를 마족과 흑마법사에게 내주었지만 군단장들이 죽으면서 되찾은 영역 또한 많았다.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마족과 몬스터에 대항하기 위해 촘촘하게 요새화된 것이 특징이었는데, 다르게 말하면.
“신분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통과 절차가 까다로워졌다는 것이기도 했다.
마족이야 객체에 따라 특징이 명확하니 겉모습만 보고도 구분하기 쉬웠지만, 흑마법사의 경우는 일반인이랑 차이가 없어 거르기 쉽지 않아서.
물론 내게는 문제가 없는 이야기였다.
“아! 무너진 마탑 소속이었군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별말씀을요.”
“옆에 분은?”
“제 조수입니다. 이 녀석은 포로고요.”
“흐음, 알겠습니다. 더러운 변절자 같으니. 퉤.”
후드를 깊게 눌러쓴 파반트가 신분패를 내밀자 관문을 지키던 병사가 흑마법사에게 침을 뱉고는 자리를 비켜 준다.
잡아 온 흑마법사는 재갈을 물리고 팔다리를 묶어 놓은 상태.
죄인 수송용 철창 마차에 넣어 뒀으니 도망치는 것도, 자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처음에는 저항했었지만 지금은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생기 없는 모습으로 마차 바닥에 누워 있을 따름이다.
‘샤일이 있어서 다행이군.’
병사에게 신분패를 챙겨 넣으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밖에 돌아다니는 일이 많다 보니 신분패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다. 전부 샤일이 무너진 마탑을 통해 만들어 낸 물건이고.
신분 자체는 문제가 안 된다. 신경 쓸 건 하나.
“거기 조수분, 제국 내에서 뿔이 달린 모자를 쓰는 건 오해를 받을 수 있으니 자제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마족인 파반트의 마족 특질을 숨기는 정도.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병사 또한 별말 없이 지나간다.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지자 파반트가 고개를 저었다.
“후우. 쓸데없이 긴장되는군.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은 오랜만이어서 말이지.”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한동안은 이쪽에서 활동해야 하니까.”
나와 파반트가 도착한 곳은 제국으로 진입할 수 있는 왕국 중 하나.
길게 이어진 도로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제국의 수도에 도착할 수 있다.
마음 같아서는 샤일이나 냥펀, 핥짝이 보고 마중 나오라고 하고 싶지만.
‘괜히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겠지.’
어찌 됐든 파반트는 마족이니까.
변장을 하기는 했지만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만약 여기서 정체를 들킨다면?
‘그때는 난리 나는 거지.’
무너진 마탑에서도 보호해 줄 수 없을 거고.
제국과 교단과 함께하며 마족에 저항하는 주축 중 하나니까 마족과 엮여 있다는 것을 부인할 게 뻔했다.
그런 의미에서 녀석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도 위험부담이 있다. 그럼에도 옆에 두고 있는 이유가 있었으니.
슬쩍 녀석을 바라봤다.
[계약 종료까지 13시간.]
파반트가 무너진 마탑과 계약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후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수 없다는 것.
돌발 행동을 하더라도 옆에서 확인할 수 있는 편이 낫겠지.
혹시 아는가. 갑자기 돌변해서 마족 편에 붙겠다고 할지. 만약 그렇게 나온다면 놈들 편에 붙기 전에 처리하는 편이 나았다.
그건 그거고.
“야야, 내가 나오지 말라 했지?”
난 은근슬쩍 옆으로 따라붙은 이에게 핀잔을 줬다.
로브로 얼굴을 가린 채 행인인 척 다가온 녀석.
“역시 바로 아네. 못 속이겠어. 하하하!”
샤일이었다.
마탑의 핵심 인원이 되면서 얼굴이 많이 팔린 녀석이라 얌전히 있으라 했거늘 기어이 마중을 나왔다.
“일부러 나온 건 아니고 마탑 정문으로 들어가기에는 좀 그런 게 있어서 뒷길로 안내해 주려고 왔지.”
샤일이 파반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 무너진 마탑이 양지로 나오며 교단과 제국 인사들의 출입도 잦아졌다.
괜히 정문으로 들어갔다가 파반트의 정체가 들통날 수도 있다는 말. 뒷길로 몰래 들어가는 게 나았다.
“가는 길에 알려줄 것도 있고.”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샤일이 입을 열었다.
“제국에서 마족과의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