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화 비공식 군단장
인간의 발길이 끊긴 마족의 땅.
몬스터로 이루어진 생태계가 펼쳐지고 마기로 변형된 환경이 나를 반겼다.
고약한 악취를 뿜어내는 연못도 있었고, 기괴하게 생긴 몬스터와 마물 또한 아가리를 들이밀었지만.
-콰지지직!
“그하아아악!”
“캬르르르륵!”
내게는 닿지 않았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갈라져 땅을 구르는 몬스터들. 생명력이 질긴 놈들은 파이어 밤을 터트려 따끈하게 만들어 줬다.
오늘만 몇 마리 째인지 모르겠다. 징글맞은 녀석들 같으니라고.
“몬스터는 그렇다 쳐도 흑마법사나 마족을 한 명도 마주치지 않을지는 몰랐군.”
목적지로 향한 지 3일 차.
한 번쯤은 마주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코빼기도 안 보인다. 한곳으로 집결하고 있다고 하더니 이미 다 모인 건가.
그러면 교단과 마탑에서 파악한 것보다 빠른데.
쯧. 작게 혀를 찼다. 이러다 무너진 마탑에 협력한다는 마족을 가장 먼저 보게 생겼다.
“이 녀석들도 대단하단 말이야.”
“그에에.”
마족을 쫓는 마법 집단, 무너진 마탑.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에게 협조하는 마족이 존재한다. 어쩌다 함께하게 되었는지, 왜 마족이 사람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워낙 오래된 일이기도 하거니와 지금에 이르러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내용이기도 하니까.
다만 확실한 건 무너진 마탑이 마족에 관련해서 만큼은 교단도 감탄할 정도의 지식과 기술력을 가진 건 이런 비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마족 본인이 마족을 상대하는 법과 기술을 알려 주는데 발전이 느릴 수는 없지.
“지금은 그 부분이 오히려 발목을 잡을 수도 있지만.”
세상이 망하고 본격적으로 마족이 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마족에 대한 경계와 분노는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마족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하면 타격이 크겠지. 그 의도가 어떻든 간에 배신자로 낙인찍힐 거다.
내가 굳이 베칼과 움직이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그건 그건데.
“녀석들은 어떻게 알았지? 이쪽으로 마족들이 모이고 있는걸.”
이 부분이 의문이다.
해당 내용은 극비일 텐데. 나도 샤일이 전해 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내용이다.
녀석도 용사 후보 중 한 명인만큼 제국이나 교단에서 정보를 내준 걸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녀석이 사용하고 있는 검이 성검인 만큼 교단에서 꽤 홍보를 해 대고 있다고 들어서.
나중에 인연이 되면 다시 마주치겠지.
“거의 다 왔군.”
황량한 공간. 지금까지는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곳이었는데 이곳은 뭐가 없다.
먹을 것이 없어서 몬스터가 안 들어찬 걸까? 그건 아닐 거다. 워낙 생명력이 강한 놈들이라 척박한 곳에서도 잘 사는 종류들이 제법 있어서.
아마 저기 살고 있다는 마족이 주변을 정리했기 때문이겠지.
-사아아아아
건조한 바람이 부는 곳. 황무지에 우뚝 서 있는 풍차가 하나.
과거에는 이곳도 농경지라고 했던가. 풍차를 개조해서 지부로 사용하고 있다고 전해 듣기는 했지만 실물을 보니 대단할 뿐이다.
“그에에.”
“어어, 나도 알아. 마기가 느껴지네.”
덕춘이의 경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하지만 마기가 느껴진다. 은밀하게 다가오는 것이 내가 위험한 존재인지 확인하려는 거 같은데.
“나와라, 파반트. 무너진 마탑에서 온 이블아이라고 한다.”
괜한 오해를 사기 전에 내 정체를 밝혔다.
어찌 됐든 녀석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서 말이지.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마기가 물러나더니 풍차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면바지에 조끼. 조금은 낡은 중절모. 겉보기만 보면 평범한 주민으로 보였으나.
“무너진 마탑에서? 별일이군.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됐는데 말이야.”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와 옆머리를 따라 자라나 뿔은 그가 마족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샤일에게 듣기로는 한때는 부군단장의 자리까지 올랐다고 한다. 그런 녀석이 어째서 이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짓말은 아니겠지?”
“그렇게 의심할 거면 왜 모습을 드러낸 거지? 그냥 입 다물고 숨어 있는 게 나았을 텐데.”
“아하하하! 그것도 그렇지. 들어와라. 혼자 있다 보니 의심만 많아지더군.”
웃음을 터트린 녀석이 손을 까딱이더니 풍차 안으로 들어간다.
악마들이 으레 그러하듯 이 녀석도 제멋대로인 부분이 있는 거 같다.
안으로 들어가니 제법 그럴듯하게 꾸며진 공간이 나왔다.
“차라도 들어. 요즘 사정이 안 좋아서 이런 것밖에 없지만 나름 먹을 만하다고.”
근처에서 뜯었을 게 분명한 말린 식물로 차를 끓인 파반트가 의자에 앉는다.
나무 의자가 삐걱거리는 것이 어지간히도 낡은 거 같다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마족들이 모이는 중이라던데.”
“잘 알고 있군. 용케 알아냈어. 무슨 수로 알았지?”
“글세, 나도 마탑에서 전해 듣기만 해서 잘 모르겠군.”
차를 홀짝이며 말을 흐렸다.
도움을 준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마족. 특히나 마계에서 침공해 오면서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마탑과의 인연을 끝내고 다른 마족들과 한패가 됐을 가능성도 있다는 말.
지금 이 순간에도 기감을 넓게 펼쳐 수상한 움직임이나 기척이 있지 않나 살피고 있다. 권능을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고.
[파반트]
-제5 마계의 배신자.
-7군단 부군단장의 자리에도 올랐었죠!
-당시 군단장보다 강했다는 소문도 있죠!
-500년 전, 무너진 마탑의 마탑주와 계약을 했습니다.
-계약의 마침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마탑에 도움을 준 건 계약 때문이었던 건가. 이래서 계약은 신중해야 한다니까.
아직까지 별다른 일은 없는 거 같은데 마지막 설명이 살짝 걸린다.
아무리 강력한 계약이라도 영원할 수는 없는 법. 그 끝은 존재했고, 무려 500년 동안 계약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파반트는 머지않아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이후에 녀석은 어떻게 나오려나. 녀석이 마탑에 마족에 대한 것을 알려준 것처럼 마족에게 마탑과 관련된 정보를 누설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즛!
권능이 강화되며 보다 구체적인 정보가 드러난다. 눈이 따끔한 것이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는 참을 만했고.
“흠.”
[계약 종료까지 남은 시간: 78시간]
정말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략 3일 정도 남은 건가.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말해야 할지.
“무너진 마탑에 아쉽거나 한 건 없나?”
“음?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오면서 술이라도 마신 건가.”
슬쩍 물어봤지만 고개를 까딱일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한심한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테이블 아래에 있던 두루마리를 펼쳤다.
지도다. 수정을 여러 번 했는지 지도에 선이 어지럽게 이어져 있다. 작성자가 아니면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
“좀 더럽기는 한데 보다 보면 익숙해질 거니까 진행하도록 하지. 먼저 놈들이 모였을 거라 추정되는 곳이 세 군데. 괜히 얼쩡거리다 잡히면 안 되니까 아직 세세한 측정은 안 했지만…….”
파반트가 설명을 이어 나간다.
마탑과의 연락이 끊기고도 역할에 충실했던 모양. 설명과 함께 지도를 보자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이래서 샤일이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한 건가.
“…거리는 짧아. 빠르면 2일, 늦어도 5일 내로 답사가 가능할 거다. 이후에 어떻게 행동할 건지는 네가 정해야 하는 거고. 질문 있나?”
질문이라.
원하던 정보는 얻었다. 그 정보가 사실인지, 어떻게 써먹을 건지는 녀석이 말한 것처럼 내 역량인 거고.
그래서 그럴까.
“왜 마탑을 돕는 거냐?”
나도 모르게 그런 질문이 나왔고.
“마족은 원한을 잊지 않기 때문이지.”
잠시 입을 다물었던 파반트의 눈에서 귀기가 피어올랐다.
* * *
탐색은 어렵지 않았다.
일대에 별다른 위협이 없던 것도 있고, 흑마법사와 마족들이 이상하리만치 얌전히 있어 골치 아픈 일도 없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측정을 마친 결과, 놈들이 모인 곳을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
“바글바글하구만.”
“드문 경우군. 통제가 힘들어서 저 정도 규모로 단체 생활은 가급적 피하거든.”
구릉을 넘어 펼쳐진 평야에 뭉쳐 있는 마족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얼핏 봐도 천 단위는 넘는 거 같은데. 실력도 나름 있어 보이고. 적어도 어쭙잖은 놈들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일망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문제는 여기 있는 전력이라고는 나와 파반트 두 명밖에 없다는 거다.
혹시나 싶어 커뮤니티로 멤버들한테 이곳의 대략적인 위치를 말해 주기는 했다.
냥펀도 그렇고 핥짝이도 그렇고 제국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급하면 샤일한테 연락을 줄 수도 있겠지.
탈모맨의 경우는 직접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거 같고.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나도 이곳에 온 지 고작 하루 지났을 뿐이다. 하루 만에 놈들이 모인 곳을 찾을지 몰라서 살짝 당황스럽기는 하다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일단은 정찰. 놈들의 위치를 파악한 것만 해도 충분하니까. 더불어 이곳에 모인 목적까지 알아내면 더 좋으나 우선순위는 낮다.
저 정도 규모면 움직이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그 전에 이 소식을 전파해 전력을 모아 한 번에 쓸어버리는 게 베스트다.
어쩌면 생각보다 빠르게 3챕터를 끝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 하고 잘됐던 적이 없단 말이지.’
이놈의 탑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상황을 주고는 했다. 방심은 금물.
수풀에 몸을 숨긴 채 놈들이 하는 것을 지켜봤다. 물가도 없는데 안개가 깔려 시야가 잘 안 잡힌다.
“뭐 하는 건지 알겠어? 부군단장 자리까지 올랐다면서.”
“너무 오래전의 이야기로군. 지금 보이는 것만으로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다. 뭔가 행동을 해야지 짐작이라도 하지.”
맞는 말이다. 멀뚱히 서 있는 녀석들 보고 뭐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으면 독심술이지.
놈들의 목적까지 헤렐다의 예언으로 알아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이쪽으로 모이는 걸 알아낸 게 전부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넌 몇 군단 소속이었지?”
“그건 왜 궁금하지?”
“옛날이기는 하지만 저쪽 군단장들에 대해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지금 저쪽에는 군단장이 많이 죽었거든. 뭐 아는 게 있나 싶었지. 남은 군단장이 몇 명인지도 알고 싶고.”
현재 5마계의 군단장 자리에는 공석이 있다.
내 손에 죽은 1군단장과 3군단장. 용사 후보에게 죽은 2군단장. 오지혁이 처리했다고 하는 5군단장.
이후 알려진 군단장이 없다. 죽은 녀석들의 자리에 새로운 군단장이 올랐는지도 알 수 없고.
놈들에게 남은 군단장이 몇 명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잠시 고민하던 파반트가 입을 열었다.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군단장은 6명이 있지. 이제 남은 군단장은 4군단장, 마바나타와 6군단장 가넷 지블라 2명이지.”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군단장이라면?”
그 말은 곧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군단장도 있다는 뜻.
“제7 군단장.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마왕의 친위대. 각 군단장의 암행을 맡은 자들의 수장.”
아득. 녀석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제코 말린. 만의 얼굴을 가진 배신자의 왕이 있다. 과거 내 상사기도 했지.”
이명 한번 대단하네. 배신자의 왕이라니.
분위기로 봤을 때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닌 거 같다. 쌓인 게 많은지 씹어뱉듯이 놈에 대한 이야기를 해 댔는데 뭐랄까.
‘상대방의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위장해 모든 것을 알아내는 녀석이라.’
일종의 도플갱어 같은 녀석인가. 보니까 아예 새로운 신분으로 심복이 되었다가 통수 치는 방식도 즐기는 거 같고.
아마 이 녀석도 비슷한 일을 겪은 게 아닐까. 어디까지나 예상에 불과하지만 반응으로 볼 때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어느 순간 파반트가 입을 다문다. 괜히 더 물어보기가 껄끄러워 나 역시 침묵을 유지했고.
“놈들이 움직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족들이 움직임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