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화 89층
호페그레마의 말에 샤일이 눈을 끔뻑인다.
날 수 있게 해 달라. 당연히 가능하다. 당장 나도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녀석의 보조를 받아 허공에 날 듯이 싸운 경험이 제법 있다.
‘어디까지나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기억 속에서의 일이지만.’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기억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겪은 것 같은 숙련도와 경험을 약속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기억에 의하면 전투 도중에 중량 팔찌를 사용한 적도 더러 있었다.
마력량이 늘어나면서, 중량 팔찌를 진심으로 사용하면 나의 무게는 어지간한 대형종 몬스터와 비견된다.
실력이 늘어난 지금은 더 수월하게 할 수 있겠지.
물론 드래곤은 조금 예외일 수도 있었다. 일단 대형종을 넘어서 초대형종에 육박하는 덩치를 가지고 있기도 하거니와.
“마력 간섭이 있으면 중간에 꼬일 수도 있어. 장담은 못 해.”
정령 마법이 특수한 계열의 능력이기는 하나 근본적으로는 마법이다.
마법의 기본은 마력을 다루는 것이고, 드래곤은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마법의 종주와 같은 존재다.
브레스를 사용할 때만 해도 그랬다. 일대에 있는 마력이 죄다 빨려 들어가듯 모여 쏘아졌었지.
나야 스킬과 권능을 기반으로 전투를 하니 크게 방해받을 일은 없지만 샤일은 다를지 모른다.
본인도 그것을 알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고.
어지간한 규모의 마법으로는 문제없겠지만 직접적으로 보조를 해 주는 상황에서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것은 나와 계약을 하면 된다.”
호페그레마 또한 그 부분을 인지하고 있는지 해결책을 내놓았다.
계약이라.
“이상한 계약을 들이미는 건 아니겠지? 내가 보는 앞에서 육성으로 계약 조건을 말해야 할 거야.”
남들 뒤통수를 친 적이 몇 번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계약 형태로 엿 먹인 적이 있어서 그런가 나는 계약에 대해서는 좀 조심하는 편이었다.
빈틈이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예상 밖의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것이 계약이니까.
샤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맞네. 너 사기 좀 치지.”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군.”
나 정도면 양심적으로 계약을 하는 편인데 말이다.
샤일 이 녀석은 내가 작정하고 불공정 계약을 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고나 있을까.
챕터가 진행되면서 계약서를 이용해 이런저런 일을 한 적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스템에 의한 것.
‘내가 진짜로 했으면 어설프게 안 했지.’
뭐였더라. 계약을 통해 사로잡은 흑마법사와 마족을 다루어 본거지를 이용한 후 같이 처단하거나 정치적인 장치로 사용한 정도?
적어도 고기 방패로 사용하거나 양패구상으로 써먹지는 않았다. 감정적으로 사람을 무너트린 적도 없고, 믿음을 줬다가 앗아 가는 행위도 한 적이 없다.
마음만 먹었다면 더 악랄하게 뽑아 먹을 수 있었는데도 말이지. 가족을 인질로 삼은 것도 아니었고, 몸속에 시한폭탄으로 심어 자폭병으로 사용하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신사적으로 행동한 거 아닌가?
잠시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동안 호페그레마가 입을 열었다.
“난 나와 함께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는 것이다, 인간.”
“이블아이다. 인간, 인간 거리지 마. 뒈지려고.”
“그에에.”
“여기 위대한 개구리 님도 있으니까.”
호페그레마에게 중지를 세우는 덕춘이를 가리켰다. 잘한다, 덕춘이.
브레스를 한 방 먹어서 그런가 괜히 심술을 부리게 되네.
이게 다 마족과 흑마법사 때문이다. 자꾸 사람 성질을 긁으니까 내가 이러잖아. 녀석들이 내 성격을 버려 놨다.
그 대가로 마주치면 머리통을 깨 놔야지.
머리가 아픈 듯 얼굴을 쓸어내리는 샤일과 기다란 혓바닥으로 입가를 핥는 드래곤.
묘하게 둘이 하는 행동이 비슷하다.
“그래, 내 이름은 호페그레마. 이 세계를 수호하는 마지막 드래곤이다.”
“나는 샤일이라고 한다. 무너진 마탑 소속이지.”
자연스럽게 나눈 통성명.
보아하니 앞으로도 같이 움직이려는 거 같은데 이름은 알아야지.
갑작스럽기는 하나 드래곤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건 좋은 소식이다. 전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
“계약을 시작하마.”
“바로?”
“미룬다고 바뀌는 건 없지. 아직 처단해야 할 마족이 많다. 나 또한 그리 오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고.”
날개를 봤을 때 느꼈지만 상태가 전반적으로 안 좋은 모양.
스스로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시간이 많지 않은 건 분명했다.
수명을 이야기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드래곤만의 문제가 있는 건지는 확실치 않다.
뭐든 상관없다. 느긋하게 보낼 시간이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
“좋아. 시작하자고.”
“그래. 까짓것. 기다려서 뭐 해. 해 보자고.”
샤일이 동의한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호페그레마가 마법을 발휘한다. 우리 앞으로 생성되는 계약 마법진.
[88층 종료]
그것을 끝으로 챕터가 종료되었다.
* * *
후우. 작게 숨을 내뱉었다.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가 됐다. 성과도 괜찮았고.
과정은 고됐지만 별다른 손해 없이 군단장 2명을 해치웠다. 호페그레마도 끌어들였고, 곧 데이본드가 이곳으로 넘어올 거라는 정보도 얻었다.
가만히 소파에 앉아 화면을 바라보았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투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내가 그레이트 브릿지에서 싸운 것처럼 다른 곳에서도 흑마법사와의 전쟁이 한창이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군.”
제국으로 모인 멤버들의 활약도 얼핏 보였고, 상위 헌터가 전장에서 날뛰는 것도 보였다.
또 다른 곳에서는.
“기어이 잡았군.”
“그에에.”
오징혁과 김소담의 모습도 보였으니, 군단장으로 보이는 마족을 쓰러트리는 장면이 있었다.
둘이 커플이라 그런가 합이 잘 맞는다. 김소담이 메카닉을 이용해 물량전을 펼치면 오징혁이 일대일로 군단장을 상대하는 그림.
아무래도 메카닉이 다수를 상대하는 데 좋고 오징혁은 육체파에 가까워서 이렇게 된 거 같은데, 밸런스가 잘 맞아서 어지간한 적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거 같다.
둘이 밖으로 나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강한 적을 상대하는 경험은 중요하다. 둘은 충분히 잘해 주고 있고.
“가능하면 마지막 챕터까지 클리어하고 나갔으면 좋겠는데.”
시간적인 여유가 많지는 않다.
지금까지 겪어 온 챕터를 봤을 때 제법 시간을 잡아먹는 시나리오기도 했고.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마지막 챕터는 해야 할 게 분명하다는 것.
마왕이라 불리는 데이본드. 녀석을 잡는 것으로 끝이 날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혼돈의 파편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당장은 아닐 터.
일단은 호페그레마가 녀석이 차원을 넘는 것을 막았다고 했으니까.
망할 혼돈의 파편 같으니. 있을 거면 얌전히 있을 것이지 왜 차원까지 넘어와서 난리를 피우려고 할까. 하나같이 심보가 고약하다.
쯧. 혀를 차며 목을 돌렸다. 대기실로 넘어오면서 몸은 회복되었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좀 남아 있어서 말이지.
소파에 앉아 힘을 뺀 채 앞으로 할 것을 생각했다.
“우선 둘을 만나야겠어.”
오징혁과 김소담을 90층까지 올리자. 시간이 촉박한 만큼 속전속결로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가능한 많은 지원을 할 생각.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90층은 따로 조건이 없나.’
이 부분이다.
상위층부터는 안전지대에 들어설 수 있는 조건이 있었다. 80층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모든 스텟이 999에 이르러야 했고, 100층에 도전할 때는 혼돈 수치가 100점을 넘겨야 한다.
그렇다면 90층은? 이곳도 나름의 조건이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을 거 같은데. NPC들에게는 별다른 정보를 듣지 못했다. 릴카도 따로 말은 안 해 줬고.
뭐, 릴카야 시스템적인 제약으로 말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정답을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건데.
“맞아, 그 녀석들이 있잖아.”
영 궁금하면 물어보면 되지.
90층대에 있을 거로 추정되는 인물이 몇 명 있지 않았던가. 루키 그룹, 요정 클럽.
그들 외에도 극소수기는 하지만 90층대에 있는 헌터들이 있을 거다.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가능할 텐데.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들었으니.
‘루키 그룹의 김조균, 요정 클럽의 마그마 요정과 근육 요정. 이 녀석들이 과연 안 물어봤을까?’
위에 있던 애들은 입을 다물고?
그럴 리가 있나. 어찌 됐든 같이 탑을 오르고 있는 멤버들인데.
한번 무리를 짓기가 어렵지 하나로 묶인 이후부터는 어떻게든 도움을 주기 마련이다.
특히나 탑은 폐쇄적인 공간. 언제든 공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단절이 될 수 있는 환경. 그런 특성 때문에 쁘찡 연합이 이렇게 규모가 커질 수 있었던 거 아닌가.
당장 멤버들도 커뮤니티에서 떠들고 놀다가 인연이 된 케이스다.
‘90층대에 있는 녀석들은 대부분이 초기 등반가들. 오랫동안 탑에 머문 만큼 함께 어울린 사람들을 쉽게 버릴 리가 없어.’
확인해 보면 알겠지.
마그마 요정과 근육 요정도 만나 봐야겠다. 다음 층은 89층. 80층대의 마지막이니까.
-촤르르르
화면도 점차 끝이 난다.
생각을 하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지막 챕터에서 어떤 변수가 나타날지 알 수 없었고, 힌트를 얻을 방법으로 이것만 한 게 없으니.
클리어 보상으로 혼돈 수치가 들어왔다는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무시하고 화면을 노려봤고.
“넘어왔군.”
흑마법사와 마족이 몰려 있는 어떤 공간, 불길하기 짝이 없는 마법진이 활성화되면 어떤 존재가 넘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보나 마나 데이본드. 그동안 이름만 들었던 녀석을 마주할 때가 왔다.
[89층으로 전송됩니다.]
-우우우우웅
전송 마법진이 밝게 타오르며 나를 집어삼켰다.
* * *
사그라지는 빛. 서서히 눈을 뜨자 황폐한 공간이 나를 반겼다.
녹다 만 갑옷과 무구. 거대한 몬스터의 사체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타들어 가고 있었고, 잿가루가 가득한 공간에는 마족의 머리가 굴러다녔다.
흑마법사의 은신처인가. 보아하니 이미 전멸한 거 같고.
‘전장에 떨어지는 건 처음인 거 같은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변을 바라봤다.
흑마법사를 처리한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나와 같은 편일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몇 명이 있는지도 모르고. 한 명일지 아니면 수십 명일지.
불타 버린 은신처의 규모를 봤을 때는 어디 군대라도 들이닥친 게 아닐까 싶다만.
‘대규모 인원이 들어온 흔적은 없어.’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어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수십, 수백 명에 달하는 군대가 몰려왔다면 적어도 진입한 방향으로는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게 없다는 것은.
‘혼자 혹은 소수의 인원으로 여기를 처리했든지, 아니면 내분이라도 난 걸지 모르겠군.’
후자일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았다. 흑마법사라는 놈들도 제정신과는 거리가 멀어서.
검을 빼 들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생존자가 있다면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어딘가 이번 일의 흔적이 남아 있을 거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치지직
인기척이 들렸다. 무너져 가는 담벼락. 그 너머에 있는 사람은 넷.
“아직 잔당이 남아 있었나?”
“다 처리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
“내가 대충 둘러보지 말라고 했지!”
“아니, 다 봤다고. 억울하네.”
다양한 종족으로 이루어진 파티였고 그 중앙, 검을 쥐고 있는 녀석은.
“어라? 당신은?”
나와 구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