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515화 (514/740)

515화 날 수 있나

브레스.

순수한 파괴의 힘이 덮치며 느껴지는 격통은 잠깐.

이내 몸이 무너져 내리며 의식이 잠깐 끊겼으나 개의치 않았다.

망할 드래곤이 냅다 달려들어서 브레스를 쏘아 낸 것은 어이가 없었지만 내게는 좋은 상황이었다.

상태가 그리 좋은 편도 아니었고 길게 끌고 갔다면 나 역시 위험했을 테니까.

그만큼 데카르는 약한 적이 아니었다. 특히나 게드릭과의 전투를 마치고 바로 상대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상대.

조금은 아쉽다. 새롭게 얻은 스킬의 레벨이 조금 더 높았다면 이 정도까지 몰리지 않았을 텐데.

‘챕터가 지나면서 스킬 합성 대기 시간도 거의 끝난 거 같고 말이야.’

며칠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오로라 빔이라든가 다른 스킬도 상위 등급으로 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 봤자 의미 없는 말이었다. 전투라는 것은 내가 최상의 상태일 때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특히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르르르륵!”

피 끓는 소리를 내며 데르카의 몸이 사라진다.

아무리 강인한 육체라 한들 정신을 잃어 무의식인 상태로 버틸 만한 공격이 아니었다.

나도 그건 마찬가지고. 스킬로 따지면 SSS급에 달하는 스킬이 브레스 아니던가.

이 세계에 마지막 남은 드래곤이라는 설명이 아깝지 않게 그 수준은 상상 이상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난 구사일생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애초에 그걸 믿고 공격을 피하기보다는 데카르를 붙들고 있으려 한 것도 있고.

그럼에도 난 움직였다. 이 정도면 됐지. 그런 생각으로 끝내는 건 운에 미래를 맡긴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구사일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데르카 또한 비슷한 종류의 스킬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혹여나 운 좋게 살아남는다면 당하는 건 나다.

‘드래곤 녀석이 사정을 봐줄 거 같지도 않고 말이지.’

그럴 거였으면 내가 있는 곳에 브레스를 쏘지도 않았겠지.

녀석의 목적은 아마도 마족의 말살. 나와 데르카가 엉겨 있는 지금이 공격하기 최적의 상황이라 망설임 없이 실행에 옮긴 것이라고 봐야 했다.

그러니 지금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마무리 짓는 편이 나았다.

“무지개, 반사.”

떨어지지 않는 입에 힘을 더해 내뱉었다.

나의 의지에 반응한 펠라인 세트가 번쩍였고.

[반사 성공!]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내 몸을 집어삼키려던 브레스가 방향을 바꾸었다.

그와 함께 나와 드래곤 사이에 끼어 있던 데카르는 두 번의 브레스에 격중했다.

“크하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온몸을 비트는 녀석.

잠깐 버티는 듯했으나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고 지우개로 지워 낸 듯이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증발했다.

그만큼 브레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군단장의 자리에 오른 마족까지 이렇게 만들 정도면 파괴력 하나만큼은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해야겠지.

-타닥, 타다다닥

나 역시 브레스를 맞았던 터라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억지로 두 다리에 힘을 줘 자리에 섰다.

타다 남은 재가 떨어지고 붉게 달아올랐던 펠라인 세트 위로 단백질 타는 냄새가 피어오른다.

검붉게 달아오른 몸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들리는 건 덤. 사람 몸에서도 이런 소리가 날 수 있구나, 처음 알았다.

“죽겠다, 진짜.”

구사일생이 발동되지 않은 걸 보면 아직까지는 간당간당하게 버틸 수 있는 모양.

그게 정상적으로 전투를 이어 나갈 수 있는 상태라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도 누가 툭 치면 쓰러질 자신이 있었다.

시선을 올려 이글거리는 불꽃을 입에 머금은 드래곤을 노려봤다.

호페그라마.

마지막 드래곤. 수호자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날뛰는 존재이자 바닥을 기는 용.

알림창의 설명은 정확했다.

‘저 녀석도 정상은 아니군.’

마지막 드래곤이라기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했더니만 웅장하기는커녕 볼품없이 몸을 웅크리고 있다.

덩치 자체는 초대형종과 비견될 만큼 거대했으나 부러진 한 쌍의 뿔과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비늘은 그슬려 있었고 뜯겨 나간 자리에는 흉한 상처가 드러나 있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동자에서는 포악함과 먹이 사슬 최상층 존재의 자부심이 느껴졌지만, 곳곳이 갈라져 진득한 피와 고름이 흘러내리는 모습은 좋게라도 위용 있다 말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날개는 어따 갔다 팔아먹었냐, 도마뱀 자식아.”

몸체보다 크게 자랐어야 할 날개가 엉망진창이라는 것.

한쪽은 아예 잘렸는지 터졌는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고, 남은 한쪽도 몸통만 한 뼈대는 보였지만 피막이 죄다 찢어져 장식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인간.”

“그래. 보다시피 인간이다, 파충류야. 털도 없는 게 불은 줄기차게 뿜어 대네.”

실제로 불을 뿜은 건 아니지만.

뭐랄까. 내가 직접 겪어 본 브레스는 불의 형상과 비슷하지만 동시에 광선과도 같았으며 공간을 일그러트리는 기묘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이 무너져서 그런가. 밖에 있을 때 의외로 판타지 소설이 인기가 있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드래곤은 색깔 별로 특징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허구의 이야기였으며 실제로는 다를지 몰랐으나 이 녀석은…….

‘변색된 거 같은데.’

기존의 색이 있는 거 같기는 한데 온몸에 검은 반점이 올라와 색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얼핏 봐서는 검붉은 비늘을 가진 것도 같고, 다르게 보면 보라색인 거 같기도 하다.

하는 짓은 괴팍했지만 이성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녀석의 눈은 차분했다.

바닥을 기는 용, 호페그라마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상한 존재로구나.”

“네가 그렇게 말하니 나도 할 말이 없네.”

특이한 것으로 치자면 드래곤인 녀석이 제일 신가한데.

그러거나 말거나. 난 작게 안도했다.

‘완전히 맛이 간 녀석은 아니야.’

그랬다면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지도 않았겠지. 나보고 이상한 존재라고 하는 건 좀 의외였지만.

내가 브레스를 맞고도 버텨서 그런가.

“괴상하게 생긴 것이 마족은 아닐까 했거늘. 마기도 느껴지는 것이 오해할 만도 했고. 네가 가진 신성력이 아니었다면 적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방금 네가 뱉은 브레스는 공격이 아니라 환영 인사였나?”

“그건 사과하지. 저 녀석은 반드시 없애야 할 타차원의 존재였다.”

나도 따지고 보면 다른 차원 출신인데.

아마 시스템적으로 조작이 가해져 그건 인지하지 못하는 거 같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저 녀석, NPC가 아니야.’

권능을 사용했다.

짜릿한 통증과 함께 녀석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호페그레마]

-이 세계 마지막 드래곤.

-드래곤은 균형의 수호자입니다. 모든 세계가 그런 건 아니지만요!

-광폭하고 남을 위해 희생할 일 없는 최강자이지만 드래곤에게는 임무가 있습니다.

-세계를 무너트릴 적에 대항하라.

-혼돈에 침식되고 있습니다.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혼돈에 침식되고 있다라, 저게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름 인연이 있던 델버튼과 같이 혼돈의 파편이 되는 중이거나…….

‘혼돈의 파편에 당했거나.’

또 몰랐다. 혼돈의 파편이 아니라 혼돈의 힘을 쓰는 누군가에게 공격 받은 것일 수도 있으니.

전자일 가능성은 낮은 거 같은 게 만약 혼돈의 파편이 되는 중이었다면 권능을 통해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혼돈의 파편은 탑의 기준에서도 존중을 해 주는 특별한 존재였으니까.

‘예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혹시 아는가, 혼돈의 파편이 되는 데 실패하면 NPC도 뭣도 아닌 형태로 남는 것일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가능성도 낮으니까.

오히려 후자일 가능성이 크지. 원흉은 말할 것도 없이 숭배자고.

놈들도 탑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만큼 혼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적어도 골드 등급까지는 혼돈의 힘을 제대로 쓰는 거 같지는 않았지만.

기껏해야 흉내 내는 정도? 나처럼 컨트롤 하는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

‘적어도 지금까지 혼돈과 관련된 사고는 없었어.’

눈앞에 있는 호페그레마가 유일하다.

녀석의 임무는 세계를 수호하는 것. 그렇다면…….

“네가 혼돈을 막고 있었군.”

“임시방편일 뿐. 완벽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것은 의지를 깨부수는 간악한 것. 틀어쥐려 할수록 삐져나오려 하지.”

말 한번 어렵게 하네. 제대로 정리 못 했다는 거구만.

“내 날개를 희생하고 겨우 막아 내었다. 그럼에도 처리해야 할 것들은 많이도 남아 있지.”

“제대로 말해. 네가 막았다는 그거, 진짜 막은 거 맞아? 어중간한 놈들을 상대하고 착각했다거나.”

의심병이 생긴걸지도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다.

나와 놈은 처음 보는 사이였고, 내게 있어서는 언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변수에 불과했으니.

녀석의 눈에 호기심이 깃든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존재구나. 나에 대해 궁금한 것은 없느냐.”

“말 돌리는 거 보니 맞네. 그냥 대충하다 온 거네.”

“그렇지는 않다. 이 세계로 넘어오려는 혼돈의 파편을 막아 냈으니. 차원에 균열을 일으킨 흑마법사 무리를 소멸시키고 왔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조금은 한시름 놨다. 그런 내게 샤일이 다가오더니 속닥인다.

“야야, 넌 겁도 안 나냐. 드래곤이야, 드래곤. 전설에서나 나왔던 그거. 괜히 말 막하다가 또 공격하려면 어쩌려고.”

“어쩌긴. 그때는 머리랑 손바닥이랑 하이파이브 하게 만들어 줘야지.”

“또라이 자식.”

그러는 본인도 언제든 싸울 수 있게 마력을 가다듬고 있으면서.

나를 보조해 주느라 집중력을 많이 소모했는지 식은땀을 흘려 대고 있었으나 나름 여유가 있어 보였다.

실시간으로 실력이 오르는 거 같아 만족스럽기는 한데 여전히 무리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뭐, 이런 것도 겪다 보면 나중에는 익숙해질 거고 군단장도 홀로 해결할 수 있겠지.

조금은 부러운 부분이다. 녀석이 사용하는 마법은 정령 마법. 감각과 정령과의 교감을 통해 얼마든지 강해질수 있는 분야였으니까.

어떻게 보면 마법인 동시에 기술에 가까운 학문이었다.

반면 다른 마법사들은 등반가랑 비슷한 부분이 있었고. 보다 높은 수준의 스킬이나 권능을 얻어 강해지는 형식이라서.

‘이 부분을 탈피할 방법이 없을까.’

노려야할 건 그거다. 기술적인 부분. 더 위로 향하기 위해서는 성장의 가능성이 열려야 한다.

우리도 숙련도라는 개념은 있다. 레벨이라는 수치가 그거니까. 다만 레벨도 MAX에 도달하면 끝이다. 제한이 있다는 말.

이걸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분명 있을 거다. 100층에 도전했던 녀석들이 있으니 어떤 식으로든 있겠지. 아직 방법을 모를 뿐.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지웠다. 그거야 당장 해결할 수 없으니 접어 두고 챕터에 집중하자.

호페그레마가 했던 말 중에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다.

“흑마법사 무리가 그렇게 강한가? 네 날개를 찢을 정도로?”

그렇다면 놈들의 전력을 재평가해야 했다.

흑마법사는 탑 숭배자. 당연하게도 일반적인 놈들보다 강한 건 맞지만 데르카도 한 번에 녹여 버리는 드래곤을 저 지경까지 만들 수 있느냐 묻는다면 그건 모르겠다.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녀석이 작게 시선을 돌린다.

“…차원의 틈이 일부 열린 건 어쩔 수 없지. 그곳에서 혼돈의 편린을 엿 보았다. 지독하고도 끔찍한 힘이더군.”

“제대로 못 막은 거 맞잖아!”

아까는 해결했네 뭐 했네 이야기하더니 결과적으로는 이거냐.

“균열은 봉합했다. 당장은 열리지 않을 거다. 다만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구나.”

녀석이 나와 샤일을 향해 고개를 내밀며 시선을 맞추려 한다.

“다른 군단장들은 모르겠지만 마왕이라면 봉합을 찢을지도 모르니. 내가 군단장을 잡기 위해 돌아다니는 것 또한 그렇다. 그자가 오기 전에 그가 부릴 수 있는 전력을 깎기 위함이지.”

“그건 의견이 같군.”

“그래서 말이다만.”

흘낏.

녀석이 샤일을 향해 눈을 돌렸다.

“아까 저 반짝이는 자에게 사용했던 마법을 내게도 쓸 수 있느냐.”

“어? 나? 뭔 마법.”

자신을 지목하자 샤일이 당황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페그레마가 뼈대만 남은 날개를 꿈틀거린다.

“내가 다시 날 수 있게 할 수 있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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