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화 죽음의 군대
죽음의 군대.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언데드로 이루어진 괴물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놈은 정해져 있다. 첫 번째 챕터에서 만난 녀석. 3군단장 게드릭.
‘이러려고 놈을 잡기 전에 챕터를 끝낸 거구만.’
언제 한번 나올 거라고는 생각했다. 이게 아니면 굳이 그 타이밍에 챕터를 종료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한마디로 이번 전투는 이쪽 세계에 큰 영향을 주는 사건이라는 것인데.
‘타이밍이 좋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게는 나쁘지 않은 전개였다.
샤일과의 인연. 녀석과 알고 지내는 여인이자 미래의 단편을 볼 수 있는 헤렐다가 있었으니, 보다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시스템적으로 배치해 둔 거겠지. 이쪽으로 움직이도록.
이곳만이 아닐 거다. 적은 많았고 위로 올라온 등반가 또한 상당했으니, 각자 자신이 발견한 힌트를 바탕으로 멸망을 가속시키는 대상을 해치우려 들 것이다.
제국과 관련된 곳은 멤버들과 상위 헌터들이 책임지고 있고 오지혁과 김소담은 다른 군단장을 잡으러 갔다.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요정 클럽은 용사 후보 중 한 명과 동행하는 듯했으니 이쪽은 내가 해결하면 되겠지.
애초에 그러려고 움직인 거고.
“시기는 알 수 있나?”
“그렇게 자세히는 몰라. 시간대까지 알았으면 헤렐다를 진작 무너진 마탑이나 교단에서 데려갔을 거야. 과거 성녀라 불리던 사람도 미래를 봤다고 했거든.”
하기야. 당장 내가 등장하는 시기도 모르고 있어서 샤일과 개인적인 연락만 주고받았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샤일, 헤렐다를 계속 여기에 둘 건 아니지?”
“당연한 소릴. 몰랐다면 모를까 살아 있는 걸 확인했으면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지.”
“데려갈 곳은 정했어?”
“일단은 무너진 마탑의 은거지 중 한 곳을 생각하고 있긴 해.”
아무래도 본인 소속이 그곳이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한 거 같은데.
“교단은 어때? 네가 말한 대로 전대 성녀가 미래를 봤다며.”
“그건 안 되지. 헤렐다는 신성력이 없어.”
“상관없지 않나? 교단 입장에서는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생기는 거라 알아서 그 부분은 포장해 줄 거야.”
교단이라고는 하나 정말 신앙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다.
특히나 지금처럼 인류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는 희망의 상징이 되는 사람들이 필요한 법.
괜히 사람들이 용사를 찾고 그러는 게 아니다. 교단이 나를 명예 교인으로 인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고.
“헤렐다를 데려가는 것으로 교단은 상징성을 하나 더 얻을 거고, 헤렐다의 꿈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너의 힘이 필요하니, 교단과 마탑 양쪽의 힘이 커진다는 거고 너의 입지도 확실해지지.”
정치적인 부분까지는 어지간하면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거 하나하나 고민하다 보면 발이 묶이기 십상이니까. 다만 샤일에게는 다른 문제다.
“넌 계속 헤렐다 옆에 붙어 있을 수 없어. 그렇다고 마탑이나 다른 곳에서 위치가 높지도 않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말이야.”
“끄음.”
나와 함께 다니면서 샤일 또한 성장했다. 어느 정도 명성도 생겼으며,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무너진 마탑 내에서의 중요도도 올라갔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내가 오직 샤일을 통해서만 마탑과 연락을 주고받으니까.
교단이든 제국이든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면 무너진 마탑에 문의한 후 샤일에게 전달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굳이 이렇게 일을 꼰 이유가 있다.
‘귀찮은 놈들 상대하기도 싫고 이렇게 해야 샤일이 영향력이 생겨.’
비록 시스템적으로 만들어진 기억과 경험이지만 샤일과의 유대감이 생겼다.
단순히 친근해진 거라면 상관없지만 난 가능성을 보고 있다.
다른 마법사들은 흑마법사에게 파훼 당하기 쉽다. 기존의 마력뿐만 아니라 마기도 함께 다루니까.
교단 사람들은 마족과 흑마법사에게 강하지만 동시에 상극인 힘을 가지고 있어 적들이 눈치채기 쉽다. 경계 대상 1순위라는 뜻. 무슨 일을 하든 가장 먼저 공격당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정령 마법을 다루는 샤일은?
‘마력과 더불어 정령력을 쓰지.’
수많은 전투를 통해 입증됐다. 만약 전투에 있어 히든카드가 있다면 이 녀석이라고.
전투의 판도가 바뀔 수 있는 변수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크다.
샤일 말고 정령 마법사가 없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다만 검증된 정령 마법사는 그 수가 워낙 적어서 말이지.
“천천히 생각해 봐.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고.”
샤일이 말해 준 해석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조언은 여기까지. 이제는 전투에 집중할 시간이다.
* * *
그레이트 브릿지와 이어진 대륙 남부. 그곳은 사실상 마족의 땅으로 분류된 곳이었다.
게이트가 터지며 식생이 바뀌어 몬스터가 가득해진 공간. 그럼에도 그쪽에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세상이 이 꼴이 돼도 권력을 못 참는 애들이 있지.”
그레이트 브릿지나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한 사람들과 용병들, 병사들이 모여 만들어진 도시가 있다고 들었다.
도시라기보다는 패잔병들의 집합지라고 보는 게 맞았지만 그곳을 지배하는 자는 왕국이라고 칭하는 곳.
뭐라 했더라. 페이검 왕국이라고 했나. 그곳의 왕을 자처하는 이가 본인의 이름을 딴 지었다고 한다.
몬스터를 사냥하고 부산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 더불어 보호비를 명목으로 그레이트 브릿지에서 식량과 생활 물자를 받아내는 자들.
하는 짓은 강도나 다를 바 없었지만 전력만큼은 나쁘지 않다.
“왜 그레이트 브릿지로 들어오지 않았는지 모르겠네. 그쪽을 차지하는 편이 놈들에게도 좋았을 텐데.”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지만 그레이트 브릿지는 제국의 영향권 안이야. 괜히 차지했다가 제국군일도 출동하면 곤란해져.”
페이검 왕국으로 가는 길목, 샤일과 잡담을 나누었다.
한마디로 제국의 눈치가 보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왕 행세를 한다는 것이었는데.
‘놈들이 뭘 하고 있든 관심 없어. 내 알 바도 아니고.’
중요한 건 이거였다. 적어도 남부 지리와 상황에 있어서는 이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것.
언데드를 봤다는 소문과 드래곤의 목격담 모두 이곳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레이트 브릿지 역시 그 소문을 적극적으로 알리려 노력하고 있었고.
그래야 위험을 느낀 제국이 나서고, 기회를 틈타 수도로 이주할 수 있으니까.
“저기군.”
나름 구색을 갖춘 요새가 보인다.
남부 전선, 과거에는 전략적 요충지로 쓰였다는 성을 개조해 왕국으로 삼고 있었다.
대략적인 정보를 들었을 때 인구가 고작해야 10만 명을 조금 넘는다나. 생각보다 사람이 많기는 하다.
도시 국가라고 말하고 다닐 수준은 된다는 것.
‘이상하군.’
그레이트 브릿지의 인구가 끽해야 4만 명이다. 그런데 그보다 배는 많은 사람이 이곳에 살고 있다?
가능한 일인가. 인프라가 확보되었다 치더라도 식량을 수급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울 텐데.
나야 요리 스킬이 있어 몬스터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다른 일반인이나 등반가들은 아니다. 독에 중독되어 결국에는 죽기 마련이니까.
언데드 이야기를 듣고 가장 의심한 것이 이거다.
이미 페이검 왕국은 흑마법사들이 차지했을 가능성. 그들이 있다면 이 정도 인원이 모인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마족의 땅에서 살아가는 놈들인 만큼 어떤 식으로든 식량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까.
“여기서부터는 긴장해. 그냥 전원이 흑마법사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거야.”
“나도 알지. 그러니까 이렇게 준비한 거고.”
샤일이 노새가 끄는 마차를 툭 친다.
현재 나와 녀석은 그레이트 브릿지에서 생필품을 가지고 온 행상인으로 위장하고 있다. 그나마 자유롭게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는 신분이 이거여서.
아무튼.
“식량과 생필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는 요새를 지키고 있는 병사에게 목적을 밝혔다.
투구를 깊게 눌러 쓴 채 텅 빈 눈으로 우리를 흘낏 살핀 녀석이 말없이 길을 비켜준다.
과묵한 편인가. 편하게 가면 나도 좋으니 내색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딱히 경계하지 않아서 좋군.’
까다롭게 굴었으면 뒷돈이라도 찔러 줘야 하나 고민했는데.
여긴 돈도 의미가 없어서 꽤 독한 술로 가져왔었다. 보아하니 쓸 일은 없어 보이지만.
천천히 마차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곳곳에서 분뇨 썩은 내와 쓰레기 냄새가 올라와 코를 찔렀다.
위생 따위는 개나 줘 버린 모습. 이러다 역병이라도 돌면 어쩌려고. 멸망을 앞당기는 건 비단 괴물들뿐이 아닌데.
쯧, 혀를 차면 거리를 둘러봤다.
허름한 옷을 두른 채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
요새의 규모가 작지는 않지만 10만 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만한 사이즈는 아니다.
당연히 요새를 중심으로 밖에도 여러 거점을 만들어 인구를 분산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많다. 너무 많아.’
눈에 보이는 인구 밀도는 예상을 한참 뛰어넘고 있었다.
10만 명을 모두 한곳에 몰아넣은 것이 분명했다.
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
안으로 들어갈수록 악취가 심해진다. 덕춘이도 불쾌한지 코를 찡그렸고, 샤일 또한 코를 막으며 입으로 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
“야, 야야.”
난 겨우 들릴 목소리로 샤일을 불렀다.
녀석이 뭐라 하기도 전에 한쪽을 가리켰고, 이내 그쪽을 바라본 샤일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으니…….
“끼릭. 까드득.”
목조 건물 2층, 창문을 열고 이불을 터는 누군가. 어째서인지 실내에서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돌겠군.”
펑퍼짐한 로브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뼈였다.
스켈레톤.
온몸을 가렸음에도 빈틈으로 보이는 것은 언데드의 그것이었다.
건물에 있는 녀석만 그럴까?
아니.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즛
권능을 통해 정보가 들어온다.
[나이트메어]
-마계의 3군단장, 게드릭이 거느리는 언데드.
-악몽을 꾸는 자, 눈을 뜨지 말지어다.
-꿈보다 더한 악의가 눈앞에 있을지니!
[짙은 그림자의 망자]
-마계의 3군단장, 게드릭의 노예.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크라잉 데드맨]
-마계의 3군단장, 게드릭의 수하.
-비명 소리가 들리면 도망치세요!
-머뭇거리는 그 순간 들이닥칠 테니까요!
.
.
.
페이검 왕국, 내부에 있는 인원 모두 언데드였다.
그것도 3군단장, 게드릭.
요새 초입에 놔둔 사람들은 위장에 불과했다. 사람이 사는 거처럼 속이기 위한.
‘꼬였군.’
생각을 잘못했다. 페이검 왕국인지 뭔지는 망한 지 오래고 흑마법사도 없다.
썩은 내의 원인은 시체였으며, 곪아 가는 상처였다.
죽음을 거부한 망자들만이 거니는 곳.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난 망설임 없이 후드를 벗어던지고 펠라인 세트를 착용했다.
마차를 걷어차 장애물을 만드는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고.
“바람이여 깃들어라!”
샤일 또한 자신의 몸에 정령 마법을 불어 넣었다.
정령의 힘이 감돌며 녀석의 다리가 살짝 떠오른다.
내가 이곳에 온 시점에서 변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
[게드릭이 원한의 대상이 찾아왔음을 눈치챕니다.]
[마족의 낙인이 당신을 가리킵니다!]
게드릭은 나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낙인을 찍어 둔 상태니까.
만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는데.
어쩐지 식량도 뭐도 없이 이만한 인원이 어떻게 모여 있나 했더니만 애초에 필요가 없었다.
언데드는 밥을 먹지도, 잠을 자지도 않으니까.
샤일이 해석한 죽음의 군단. 그것은 바로 앞의 미래였으며.
-우우우우웅!
거센 진동과 함께 언데드들이 우뚝 멈춰섰다.
뒤집어썼던 넝마를 뜯어내며 일제히 나를 바라보는 녀석들. 시퍼런 안광이 번뜩인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와 피부를 찌른다.
잠시 후퇴했다가 덤벼야 할까? 퇴로는 남아 있을까?
머릿속으로 수많은 가능성을 살피는 그때.
-드드드득
놈들이 일제히 길을 열었다.
앞으로 쭉 뻗은 길 너머.
“다시 보는구나.”
게드릭이 턱을 달그락거렸고.
“이번에는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의 손짓에 언데드가 일제히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