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화 87층 클리어
광범위하게 터진 폭발에 추락하는 마족들.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던 이들이 소나기처럼 떨어지는 광경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격돌하고 있던 이들까지 한순간 멈춰서 그 모습을 바라볼 정도.
나한테는 좋은 소식이었다.
“멍청히 멈춰 있으면 나야 좋지.”
손을 뻗었다.
허공에 떠오르는 수십 개의 광채.
오로라 빔.
-찌유우우우우웅!
-삐유우우웅!
그동안은 한 번에 하나만 쓰거나 연달아 사용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었지만 80층대를 겪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보다 유연하게. 상황에 맞춰 적절한 방식으로 스킬을 사용해야 할 필요를 느꼈고, 갑작스레 융단 폭격이 이루어지자 마족과 흑마법사들이 몸을 던졌다.
“저 미친놈은 뭐야!”
“피해!”
“크하아아악!”
신성력을 듬뿍 머금고 있는 만큼 마족들에게는 치명적인 일격.
굳이 신성력이 아니더라도 오로라 빔 자체의 파괴력이 있어 숭배자들 또한 피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유령 마을에서의 전투 때문에 살짝 의심하고는 있었으나 오로라 빔 역시 강력한 건 마찬가지.
저 정도 수준의 흑마법사들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어차피 마력은 충분한 상황. 스테이터스에 표시된 것만 999점을 넘기고 있었고, 스테이터스에는 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장비를 통해 상승한 스텟도 상당하다.
이미 장비는 최종 셋팅을 마친 상태.
-콰과과과광!
쉬지 않고 폭격을 퍼부었다.
대지를 강타한 오로라 빔이 번쩍이며 산란하고, 깨져 버린 바위와 땅이 파편을 내뱉으며 비명을 질렀다.
단단한 파편을 맞고 정신을 잃은 놈도 있었으며 그대로 직격당해 산화한 녀석도 있었으니…….
“천사? 천사인가!”
“아냐, 사람이다. 사람이라고!”
“이 신성한 빛은… 오오, 교단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교단의 3성 중 하나인가.”
그 모습을 바라본 사람들이 감탄을 터트렸다.
수세에 몰렸던 것도 잠시. 범접할 수 없다고 느꼈던 흑마법사와 마족들이 쓸려 나가는 것에 자신감이 되살아난다.
“우리도 진격한다!”
“놈들이 정신이 없을 때 공격해야 돼!”
“마족도 결국에는 생명체다! 머리가 떨어지면 죽는 건 마찬가지야!”
전투에 있어 기세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
전장을 이탈해 도망치려던 이들도 분위기에 동참해 공격에 가세한다.
위에서는 폭격이, 아래에서는 악을 쓰고 덤벼드는 이들이 날뛰니 마족들 또한 괴성을 지르며 저항했다.
놈들 또한 이곳을 본거지로 삼고 있었으니 쉽게 내주고 달아나지는 않겠지.
그뿐일까.
‘분명 제물을 모으고 있다고 했어.’
아무리 세상에 망조가 들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는 세계가 멸망하지 않았다.
대륙의 많은 부분을 내주었을지언정 여전히 인류가 세를 과시하고 있다는 말. 내가 보기에도 아직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사람들도 많이 살아 있고.
이런 상황에서 흑마법사들이 대놓고 설치는 건 힘든 일. 특히나 이곳은 마족에게 점령당한 곳이 아니라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왕국과 인접해 있는 곳이다.
놈들의 본거지로 삼기에는 애매한 위치라는 뜻.
나도 처음에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제물을 모으기 위해 차지한 것 같았다.
전에 잡았던 마족도 말했었다. 만인장은 몰라도 그 윗급의 존재를 불러오기 위해서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그러고 보니 아까 군단장 어쩌고 했던 것도 같고.
“확실히 부숴 버려야겠어.”
놈이 넘어오기 전에 막을 수 있다면 그편이 좋으니까. 다 튀어나온 후에 해결하려고 하면 피해만 커질 뿐이다.
-쿠우우우우웅!
마족들 사이에서 덩치가 커다란 놈이 나타나 사람들을 휩쓸었다.
지금까지 날뛰던 놈들보다 커다란 덩치. 풍기는 기세도 강력하다.
이 느낌, 전에 봤던 만인장이랑 비슷한데.
“3군단의 만인장! 카갈을 상대할 자는 누구인가!”
역시나 만인장인 모양이다.
살점 조각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해골이었는데 거인족까지는 아니더라도 덩치가 상당했다.
들고 있는 철퇴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잔뜩 묻어 있었고, 줄기차게 뽑아내는 마기에 다른 흑마법사들도 한 걸음 물러났다.
놈뿐일까. 반대편에도 만인장 하나가 울부짖으며 달려온다.
그래도 본거지라고 2명을 배치했나 보군.
‘아직까지는 만인장이 가장 위험한 놈인가.’
마계와의 문이 열리기는 했으나 군단장이라고 불릴 만한 놈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끽해야 만인장이 가장 강력한 객체 같은데.
이 정도면 쉽지. 우선 가까이에 있는 놈부터 처리해야겠다. 용병인지 용사인지 모를 녀석들이 분발하고는 있지만 평범한 마족과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여서.
당장 객기를 부리며 달려들었던 사람이 피떡이 돼서 날아갔다. 착용한 장비로 봤을 때 탱커였는데.
뼈밖에 없는 놈이 힘 하나는 장사다.
“음?”
단번에 꿰뚫을 생각으로 하강을 하는데 저 멀리, 카갈이라고 외친 만인장을 향해 달려드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다른 용사 무리보다 제대로 갖춰진 장비. 거리가 있음에도 느껴지는 강력한 기운.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고 특히 저 앞에, 검을 치켜들고 달려드는 녀석은 내 기준에서도 상당한 힘이 느껴졌다.
특히나 저 검.
-우우우우웅!
강력한 신성력이 느껴진다. 희미하지만 하늘에서부터 신성한 빛이 내리쬐고 있기도 했고.
-카아아아앙!
내지른 검격과 철퇴가 맞부딪치며 불똥이 튀어 오른다.
한 치도 밀리지 않은 남자가 연달아 검을 휘둘렀고, 뒤에 서 있던 동료들 또한 마법과 화살을 날리며 지원을 했다.
이어 두꺼운 방패를 짊어진 이가 압박을 가하자 카갈이 주춤거리며 물러났으니.
“저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군.”
시간은 좀 걸릴지언정 질 거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제대로 된 실력을 가진 이들이 있기는 했구나. 하기야 이곳에도 탑을 오른 이들이 있을 테니까.
방향을 선회해 소리를 지르며 일대를 뒤집는 또 다른 만인장 위로 떨어졌다.
궁지에 몰린 용병의 머리를 터트리는 타이밍에 맞춰 검을 정수리에 찍어 넣었고.
“키햐아아악!”
단숨에 머리가 쪼개진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그냥 찌르는 정도로는 안 되는 건가. 나도 이거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검강]
-콰드드드드득!
신성력을 불어 넣어 검강을 뽑아냈다.
단숨에 5미터가량으로 늘어난 검강이 놈의 척추를 타고 뻗어 나갔으니.
-파스스스스
신성력이 뼛속까지 침투하며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말 그대로 산산조각. 만인장의 최후라고 보기에는 허무했으나 전장이라는 곳이 원래 그렇다.
한눈팔면 그대로 죽는 거지. 그러게 언제 누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지 살피지 그랬어.
“가, 감사합니다.”
“됐고 팔다리 멀쩡하면 다른 사람 도우러 가라.”
감사 인사를 하는 용병에게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많은 흑마법사와 마족이 있기는 했지만 시간을 좀만 투자하면 정리할 수 있을 거 같다.
검을 돌리며 뼛가루를 털어 내며 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구구구구구궁!
진동이 울렸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마법진.
전장의 시체들이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적아의 구분도 없다.
죽은 용병과 자칭 용사들, 흑마법사와 마족들의 시체까지 게걸스럽게 마법진이 집어삼켰고.
“오오! 오신다!”
“군단장님께서 오신다! 인간의 파멸이 가까워진다!”
“충분한 피와 살이 모였으니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 고개를 조아려라!”
화색이 돈 흑마법사와 마족들이 함성을 질렀다.
설마 제물이라는 것이 본인들의 시체도 포함되어 있었을 줄이야.
“미친놈들.”
생각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시뻘건 색으로 물든 마법진이 핏빛 광채를 내뿜고.
[제물을 충족했습니다.]
[3군단장, 게드릭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게드릭이 당신의 존재를 눈치챕니다!]
“거, 빨리도 찾아오는군.”
난 작게 혀를 찼다.
자신의 영혼 파편을 없앴다고 떠들던 녀석이 진짜 찾아왔다.
그래도 그렇지 어느 정도 시간은 걸릴 줄 알았는데 바로 마주치게 될 줄이야.
빠르게 앞으로 달려갔다. 소환된 직후가 가장 약한 법. 이곳으로 넘어오는 순간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저리 꺼져!”
그런 나를 저지하기 위해 바닥에서 올라온 스켈레톤과 데스 나이트, 흑마법사와 마족들이 몸을 던진다.
힘으로 안 되니 물량을 쏟아부어서라도 막겠다는 의지.
“그에엑!”
덕춘이 혓바닥을 휘두르며 놈들을 밀어냈고, 나 또한 스킬을 사용했다.
집착하는 망령과 데몬 스피어, 보조를 위한 심연의 눈동자.
“망구야, 이놈들 막아!”
“키헤아아아악!”
현란하게 창을 휘두르는 망구가 온몸을 던져 놈들을 막는다.
일대일로 만인장까지 잡은 녀석이니 이 정도 놈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물론 적이 많아서 밀릴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때는 뭐, 다시 소환하면 되니까.
“언데드는 너희만 있는 게 아니거든.”
계속해서 부활하는 것. 어떻게 보면 망구도 같은 처지 아닌가.
입꼬리를 올리며 발을 박찼다.
허공에 생겨난 균열, 그곳에서부터 검은 안개와 같은 기운이 쏟아졌으며 탁한 빛을 내뿜는 보석이 잔뜩 달린 로브를 걸친 거대한 해골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 영혼을 찢은 자가 이곳에 있으렷다?”
[정신 보호(SSS) Lv.10+]
텅 빈 눈구덩이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불길. 그것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정신 보호가 발동된다.
등장과 동시에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존재. 따끔하게 달라붙는 살기와 지독한 저주에 침을 삼켰다.
군단장쯤 되면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거겠지.
역시 위험하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저놈을 잡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
“그게 나다, 해골 녀석아!”
-콰아아앙!
파이어 밤을 터트려 가속. 검광과 절삭을 사용하며 놈을 향해 검을 뻗었고.
[87층 클리어]
그것을 끝으로 세계가 암전됐다.
* * *
검을 휘두르는 자세 그대로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난 슬며시 검을 검집에 넣었다.
사람 민망하게 이 타이밍에 클리어 선언이 나오냐.
머리를 긁적이며 소파에 앉았다. 위로 떠오르는 메시지.
[챕터Ⅰ- 용사들 종료]
“역시 이거였구만.”
난 고개를 저으며 메시지를 지웠다.
챕터가 끝날 때까지 안 보여 주길래 뭐 얼마나 대단한 제목일까 했더니만.
막바지 전투를 치르며 생각했다. 아직 이 세계에 모두의 인정을 받는 용사는 없다고.
그저 자기가 세상을 구할 용사라며 외치는 등신들이 많을 뿐.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닐 거다. 아까도 보지 않았던가, 만인장을 상대로 승기를 잡은 파티를.
그 녀석들 말고도 가히 영웅이라고 불릴 법한 존재들도 있겠지. 몇몇은 그들을 용사라고 부를 테고.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고 했던가. 위기가 닥쳐오는 지금, 곳곳에서 두각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저기, 화면에 보이는 놈들처럼.
-촤르르르르
빠르게 지나가는 영상. 그곳에는 내가 전투를 하던 혼령탑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 있는 흑마법사의 근거지, 혹은 마족이 수작질을 하고 있는 영지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과정에서 죽는 녀석도 있었고, 기어코 승리해 함성을 지르는 자도 있었으며, 마족을 물리치고 홀연히 떠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금전을 대가로 요구하는 자도 있었다.
“사기꾼도 있고 말이지.”
자신이 용사라며 멍청한 영주나 가난한 사람들의 등골을 빨아 먹는 이의 모습도 지나간다.
가뜩이나 살기 힘든 세상에 저러고 싶을까 싶지만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넓고 이상한 사람은 많은 법이었다.
여기까지야 그렇다 치는데.
“쟤는 진짜 잘 싸우네.”
다시 화면이 돌아가 혼령탑을 비추는 화면. 그곳에는 나를 쫓아 모습을 드러낸 3군단, 게드릭과 전투를 벌이는 무리가 보였다.
카갈이라고 외쳤던 만인장은 쓰러트린 지 오래, 동료로 보이는 이들은 태반이 죽었으나 끝까지 버티고 있었고.
“오호, 나그마 녀석. 제대로 일을 처리했나 보군.”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지원을 온 제국군과 교단의 전력들이 들이닥치자 게드릭도 더 난동을 부리지 않고 도주했다.
군단장 정도 되면 도망치는 수준도 다른지 결국에는 놓치고 마는 모습.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결과는 아니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저건 일부로 저렇게 만든 거다. 멸망의 과도기를 불러오기 위한 시스템적인 진행.
왜 내가 놈과 싸우지 못하게 챕터를 끝냈을까. 다음 챕터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게드릭이 죽으면 안 됐으니 개입한 거다.
어차피 첫 번째 챕터는 분위기 파악을 위한 무대. 아쉬울 건 없다. 중요한 건 이후에 벌어질 챕터들이지.
난 조용히 화면을 바라보며 다음 챕터에 대한 단서를 찾았고.
“이것 봐라?”
눈앞에 보이는 모습에 입가를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