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화 너무 많다
잘못 들었나, 이 녀석이 용사라고?
느껴지는 기운이 영 별로다. 개인적인 평을 남기자면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뭐, 당장 이곳에서는 잡졸이나 다를 바 없는 고스트가 나타나니 문제가 없겠지만.
설마 다른 곳은 유령 마을이라던가 다른 억제제가 없나? 그렇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끽해야 이 근처에서 본 몬스터는 높아 봐야 5성급이었으니까.
일반인이나 일정 수준 이하의 헌터에게는 위협적일지 몰랐으나 마족과 비교하면 한없이 약한 객체들이다.
‘5성급을 그렇게 보는 것도 웃기기는 하다만.’
당장 내가 탑에 들어올 때만 해도 5성급이 나타나면 재난 상황이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그때야 6성급 몬스터가 최고였고, 재앙이라 불리는 놈들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때라.
이거야 어디까지나 지구의 이야기고, 여기는 80층대다. 그것도 마지막 시나리오 구간.
아무리 첫 챕터여도 5성급은 명함도 못 내밀지.
“하하, 손이 민망하네요.”
“이블아이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손을 맞잡았다.
어찌 됐든 본인 입으로 용사라지 않았던가. 뒤에 있는 부하들도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이놈, 이름이 뭐였더라. 가엔? 이놈도 문제지만 저 녀석들은 문제가 더 심각하다. 옆에 있는 샤일이랑 붙어도 질 거 같은데.
그러거나 말거나 악수를 나눈 가엔이 호탕하게 가슴을 두드린다.
“이곳까지 오며 얼마나 험한 여정을 겪었는지 이해합니다. 저희도 마침 5성급 몬스터와 사투를 벌이고 도달한 곳이니까요.”
은근히 자랑하듯 내뱉는 말.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인 여성이 커다란 송곳니를 들었다.
어떤 몬스터의 이빨인지도 모르겠다. 잡다한 것 중 하나겠지.
“혼령탑에 온 용기는 가상하지만 여기부터는 저희에게 맡기시죠.”
“크흠, 뭐하면 우리를 따라가는 것도 말리지는 않으마.”
“위대한 여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니까요.”
가엔의 말에 몇 마디 붙이는 녀석들.
살짝 피곤해졌다. 정말로 이 세계의 용사라는 것들이 이 정도라면 그냥 혼자서 해결하는 편이 나아 보였으니까.
샤일 또한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헛웃음을 짓는다.
“허허, 재밌는 친구들이네. 대놓고 이리 말하다니. 재밌어. 아주 잼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어. 말할 게 없어서 용사를!”
맞네. 이 녀석은 내가 용사인 거로 알지.
따악!
샤일의 머리통을 쳤다.
“아! 왜 때려!”
“나도 모르게 그만.”
몇 번 쳐보니 손맛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쳤다.
벌써 릴카 정수리 금단 증상이 나오나. 하긴 시나리오 구간은 긴 편이니 그럴 수 있다.
그래봐야 릴카보다 못한 머리통이라 아쉬움이 남지만. 어쨌든.
“가는 길은 같은 듯하니 가지. 여기서 떠들고 있어 봤자 뭐가 없으니까.”
“호쾌하군. 하지만 틀렸어.”
왠지 한 대 먹여 주고 싶은 표정으로 손가락을 까딱인 녀석이 어느 한곳을 가리킨다.
“여기 강대한 사념이 깃든 언데드가 있다! 전투 준비! 너도 뒤로 빠져! 아직까지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저놈은 위험하다.”
가엔의 말에 전열을 가담은 녀석들이 무기 끝을 겨누었다.
누구한테?
“끼아아?”
누구기는 누구야. 내가 소환한 망구지.
“크윽. 보통 녀석이 아니군. 아까부터 느껴지던 마기를 느끼고 따라왔더니 이곳에서 고위급 마족과 마주칠 줄이야.”
식은땀을 흘리던 녀석이 애써 입꼬리를 올린다.
“하지만 걱정 마라. 여기에는 내가 있으니까.”
“오오! 용사님, 믿음직스럽습니다!”
“이 또한 시련. 그러나 여정을 위한 한걸음에 지나지 않지요.”
호응하는 동료들. 특히 뒤에서 평온한 얼굴로 개소리를 하는 교단 사람이 가관이다.
나그마는 저 정도로 얼빠진 녀석은 아니었는데. 실력도 그렇고.
성큼 한발 다가가 교단 녀석이 단 브로치를 뜯어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가짜군.”
나름 비슷하게 만든 거 같지만 내 눈에는 아니다.
나그마가 착용하고 있던 것을 옆에서 보기도 했고, 교단에서 내준 물건인 만큼 은은한 신성력이 깃들어 있어야 정상이다. 이건 아무런 느낌도 없고.
그냥 사칭꾼, 아니면 사기꾼. 둘 다 거기서 거기니 할 말은 없다만 상대방은 그렇지 않은 듯했고.
“말 같지도 않은 모함은 신성 모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그런 거로 하지. 이 녀석은 적이 아니다. 내가 데리고 다니는 녀석이야.”
손짓을 하자 망구가 창을 꼭 껴안은 채로 내 뒤에 선다.
몇 번 써 보니 마음에 들었는지 전투를 안 할 때면 저 상태다.
“서, 설마 이 자가 마족?”
“그렇다기에는 좀 애매한데.”
“헛소리 그만하고 가자. 시간이 아깝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기습을 해야 하니 뭐라니 떠드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했다.
집단지성의 힘을 빌려 내 정체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도 같았지만, 집단지성이 항상 옳은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
“그렇군. 이해했다. 흑마도에 빠져들었지만 실체를 깨닫고 그동안의 죄악을 씻어내기 위한 자였어.”
“과연 그럴듯하다.”
“속죄의 길을 걷는 자라면 우리와 같은 길을 걸을 자격이 있지요.”
타다닥.
옆으로 바짝 붙은 샤일이 엄지로 뒤를 가리키며 속닥인다.
“저 병신들 데리고 가게?”
“내버려 둬. 지들 인생 지들이 사는 거지.”
“그것도 그렇긴 하지. 아효, 별 잡놈들이 다 설치네.”
“그에에.”
덕춘이도 같은 생각인지 울음을 터트린다.
나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별수 있나. 용사라는데. 시나리오의 흐름을 알 수 없는 지금 클리어를 위한 핵심 키라고 의심되는 것들은 모두 잡아야 한다.
혹시 아는가. 용사가 없으면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세계관일지.
지금은 초창기라 아무런 힘도 없지만 성장을 거듭해서 세계를 구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 그동안 들렸던 소문은 뭐지?’
몬스터에게 점령당했던 왕국을 수복하고 흑마법사와 마족들을 무찔렀다는 이야기.
5성급 몬스터도 우르르 달려들어 간신히 잡는 녀석들이 그럴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은데. 마족과의 전투 경험이 있는지도 의문이고.
내가 소환한 망구룰 보고 고위 마족이니 뭐니 촌극을 찍지 않았던가.
모르겠다. 그냥 소문이 부풀려진 것일 수도 있으니까.
-콰르르르릉!
혼령탑에 근접했을 때, 굉음이 들렸다.
적막했던 공간이 울리며 짜릿하게 올라오는 전투의 혈기가 느껴졌다.
그와 함께 뿌연 안개가 주변을 맴돌자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쉿. 조용히 해라. 혼령탑은 놈들의 근거지. 이 정도는 당연한 거니까.”
[위장의 안개(S) Lv.10]
-길을 잃기 딱 좋은 안개!
-소음 차단도 가능합니다.
-같이 떠들던 상대방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우연이 아니겠죠?
흑마법사가 깔아 둔 건가?
어쩐지 오면서 너무 조용하다 했다. 안개에 묻혀 소음이 사라진 거였다.
혼령탑 내부로 가는 것도 방법이지만 곧장 파고들기는 좀 부담스럽고.
‘소음이 나는 곳부터 가자.’
자세를 낮추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차, 그 전에.
“다들 이거 잡고 따라오도록.”
아공간에서 로프를 꺼내 샤일과 용사 등등에게 건넸다.
안개를 뚫고 가다가 흩어지면 각개격파 당할 가능성이 크다. 내가 앞장서는 편이 낫겠지.
내 의도를 알아차린 샤일이 고개를 끄덕이고.
“과연, 한때 흑마법사였던 만큼 이쪽의 지리를 잘 안다는 것인가.”
“적진 한가운데에 있다니 호승심이 샘솟는군!”
등신들, 아니 용사 무리도 헛소리를 하며 줄을 잡았다.
뭐라 해 주고 싶었으나 그럴 시간도 아까웠다. 이곳에서는 나도 긴장해야 하기도 했고.
시야가 제한된 상황, 권능 덕에 남들보다는 수월하게 나아가지만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습을 해 오면 대응하기 만만치 않다.
나는 공격을 피해도 다른 놈들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곳까지 도달할 때까지 공격은 없었고 언덕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곳에 들어서자.
“뭔 꼴이야 이게.”
“전, 전쟁이다.”
흐릿하게 들렸던 소음이 명확해지며 전장이 펼쳐졌다.
흑마법사. 마기를 풍겨 대는 마족들.
함성인지 괴성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싸우는 사람들.
“제길! 싸워! 도망치지 말고!”
“여기서 뭘 어쩌라는 거야! 이런 말은 없었잖아!”
“죽을 거야. 여기서 다 죽는다고.”
뜨거운 열기와 다르게 사기가 꺾여 있다.
반대로 악을 쓰며 싸우고 있는 자도 있었지만 도망치다 등에 창이 꽂히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통일성이 전혀 없다. 행동하는 것도 그렇고 인원이 제법 있는 대도 불구하고 진형을 짜지도 않았다.
하나의 부대라기보다는 소규모 파티가 여럿 섞인 느낌?
옷차림은 말할 것도 없다.
“저 정도면 그냥 용병 같은데.”
기사나 병사로 보이는 이들도 몇 섞여 있었지만 대체로 복장이 자유롭다.
본인의 취향에 맞게 방어구와 무기를 든 사람들.
게다가 한 가지 더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용사님!”
“여기서 이렇게 가면 어떻게 합니까, 용사님!”
“으아아아아!”
사방에서 용사님 어쩌구 하면서 울부짖는 이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
웃긴 건 울면서 끌어안고 있는 용사가 제각각이라는 거다.
무슨 놈의 용사가 저렇게 많아. 설마 환영 마법에 당한 건가? 그런 의심도 했지만 권능을 통해 본 결과 그런 건 없다.
그 말의 뜻은.
‘이 자식들 서로 자기가 용사라고 떠들고 다닌 건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개판도 이런 개판이 따로 없다.
“새로운 놈들이 왔구나!”
“오라! 군단장님을 부를 제물이 되어라!”
낄낄거리며 살육을 펼치던 마족들이 내게로 눈길을 돌렸다.
신나서 깔깔거리며 달려드는 놈들.
[검강]
-핏
-촤아아아아악!
연속으로 4번 검을 휘둘렀다.
선이 그어지는 듯하더니 내게 덤볐던 마족들이 조각난다.
후두둑. 살 조각이 된 놈들은 전초병.
“저놈을 잡아라! 강력한 제물이다!”
-뿌우우우우!
나팔을 불며 정신없이 날아오르는 마족들.
날개가 있는 놈들도 있었구나. 기형적으로 꺾인 창을 든 채 날개를 퍼덕이니 덩치가 더 커 보인다.
거대한 악의 그림자가 하늘을 덮치는 듯한 모습에 내 뒤에 있던 용사가 뒷걸음질 친다.
“마, 말도 안 돼. 마족이 이렇게 많이.”
아, 이제는 용사가 아닌가. 전장에 있는 용사도 수십 명은 되는 거 같으니 대충 34번 용사 정도로 부르면 되겠다.
“너희가 끼어들 만한 곳이 아니다. 상황 알았으면 도망쳐. 개죽음당하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빠르게 쏘아져 나가며 땅을 박찼고 그대로 점프.
“샤일! 보조해라!”
“알았어!”
내 외침에 정령 마법을 부린 샤일 주변으로 정령의 힘이 깃든 바람이 휘몰아친다.
상승 기류가 생성되며 내 몸을 위로 띄웠고 거기에 더불어 파이어 밤.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홍염이 타오르며 내게 시선이 쏠린다.
좋다. 어정쩡한 놈들 괴롭히지 말고 나한테나 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도 편하게 잡지.”
정점까지 올라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하는 무렵, 차분하게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종류의 마족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흑마법사.
권능을 통해 보니 숭배자가 섞여 있다. 역시나 이놈들인가.
“오길 잘했네.”
[날개 없는 천사의 왼쪽 날개(SSS)]
-파아아아아앗!
천사의 날개를 착용하자 신성한 빛이 퍼져 나온다.
나를 향해 날아오던 마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고.
“사라져라.”
[파이어 밤(SSS) Lv.1]
[러브 앤 피스(S) Lv.10+]
-쿠과과과과광!
우레와 같은 폭음과 세상이 번뜩이더니 수많은 마족이 하얗게 불타오르며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