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화 용사?
위로 떠오른 메시지. 3군단장 게드릭이 나를 쫓겠다는 말. 메시지를 본 건 나뿐만이 아닌지 샤일과 나그마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마, 마족의 낙인!”
“당장 교단으로 가야 합니다! 마족의 낙인은 끈질긴 것이라 어떻게든 추적해 올 겁니다!”
마족의 낙인이라. 여기서는 이렇게 부르는 모양이군.
거슬리는 일이기는 하다. 어찌 됐든 내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는 거니까. 그 과정이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GPS처럼 정확히 내 위치가 드러나는 건 아닐 거다. 단순히 낙천적으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고.
“괜찮아. 이런 적은 몇 번 있었거든.”
“어?”
“예?”
이미 겪어 본 게 있어서 하는 생각이다.
탑을 오르면서 나한테 원한을 가진 놈들이 한둘이 아니어서. 굳이 마족이 아니더라도 재앙이나 숭배자들 아, 지금은 혼돈의 파편도 나를 어쩌니 하면서 쫓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지금까지 지들이 찾아왔나. 내가 찾아갔지.”
탑에 종속돼서 자기 층에 눌어붙어 있던 놈들이 찾아오네 마네, 지켜보고 어쩌구 하는 모습이 웃기지도 않는다.
나의 투덜거림에 샤일과 나그마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구태여 물어보지는 않았다.
후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여기는 좀 나을 거다. 같은 층대에 있고 무엇보다 시나리오에 속해 있는 존재니 내 앞에 나타나겠지.
좋은 소식 아닌가.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는 해악이 알아서 목을 내밀어 주겠다는데. 만나면 그대로 반토막 내 줘야지.
“그, 실력에 자신 있는 건 알겠지만 마족이라는 족속들을 영악하기 그지없습니다. 사람이 가장 약해졌을 때를 노리고 덤벼들 겁니다.”
“그럼 가장 약할 때도 처리할 수 있도록 강하면 되겠군.”
“아니…….”
내 대답에 말문이 막힌 나그마가 입을 벙긋거렸다.
빈말로 하는 게 아니다. 이제는 진짜 그 수준에 도달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전투를 치룬 적이 별로 없기도 했고.
얻을 건 다 얻었다. 이제 남은 건 혼령탑으로 들어가 용사와 숭배자인 흑마법사들을 만나는 것.
가는 길에 마족도 잘게 썰어 버리면 모두에게 좋겠지.
그러기 전에…….
“너는 이만 돌아가라.”
“어떻게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습니까!”
나그마가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빠악!
바로 녀석의 머리통을 때려 줬다.
“크헥!”
“가라면 가. 어지간하면 데리고 갈까 했는데 아직은 안 되겠다. 목숨을 장담하지 못해.”
“크으윽. 마족을 처치하기 위해서라면 이 한목숨 이블아이 님과 함께하겠습니다.”
부담스럽게 왜 이래? 처음 볼 때만 해도 신성 마법 쏘아 대고 의심하기 바쁘더니.
마족 하나 잡았다고 전쟁을 함께한 전우와 같은 표정이다.
쓸모가 있다면 데려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나쁘지는 않으나 좀 강한 마족이 튀어나오면 별다른 힘도 못 쓰고 당할 게 분명했다.
이미 녀석에게 보여 줘야 할 것도 다 보여 줬고.
마족, 그것도 3군단장의 영혼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마족을 봤다. 이곳이 마계의 유적인 것도 밝혀졌고.
나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교단에 이 사실을 알려 지원군을 데리고 오는 것이 백배 나았다.
슬쩍 녀석의 어깨를 잡았다. 또다시 머리를 때리는 건가 싶어 몸을 움찔거린 녀석을 향해 진중하게 말했다.
“너에게는 중요한 임무가 있다. 이곳, 유령 마을은 혼령탑의 초입에 불과함에도 이만한 거물이 모습을 드러냈지.”
스윽, 가루가 되어 사라진 리치가 있던 곳을 가리켰다.
“혼령탑은 이 이상의 괴물이 도사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교단의 판단이 틀렸다. 지금 준비한 전력으로는 피해만 커질 뿐이야.”
“그, 그런…….”
“네게 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렸다. 제국군, 신의 이름으로 이곳에 온 사제들까지. 그들을 헛된 죽음으로 이끌 생각은 아니겠지?”
양손으로 어깨를 잡았다.
“가서 이 사실을 알려라. 보다 확실하게 마족과 흑마법사를 처치할 수 있는 전력을 모아 다시 와라. 그때까지의 시간은 내가 벌겠다, 나그마.”
마지막으로 힘주어 녀석의 이름을 말하자 입술을 깨물던 녀석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가 본 모든 것을 교단에 알리고 합당한 전력을 모아 오겠습니다!”
“믿고 있지.”
“저, 그런데 이 자는?”
나그마가 슬쩍 샤일을 바라본다. 자신은 그렇다 치는데 이 녀석은 왜 데리고 가냐는 말.
그 뜻을 읽은 샤일이 헛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하! 난 말이지 이블아이와 함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라 이거야.”
“이 녀석은 안 된다. 혼자 이곳을 벗어날 능력이 없다. 네가 가야 한다.”
“아.”
작게 감탄한 나그마가 맡겨 달라며 유적을 떠났다.
“그 뭐냐, 그쪽도 노력하면 잘될 겁니다.”
떠나기 전 샤일을 위로하는 것도 잊지 않고.
교단 사람이라 그런가 사람이 괜찮네.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 응원도 해 주고.
정작 응원을 받은 샤일은 똥 씹은 표정이었지만.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난 약하지 않다. 드문 정령 마법사이자 무너진 마탑의 일원으로…….”
“그래. 네 말이 맞아.”
빠르게 수긍하고 넘어가자 뭐라 말을 하려던 녀석도 입을 굳히고 따라 나온다.
빈말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녀석 실력도 나그마랑 비슷하다. 아니지. 객관적으로 따지면 더 떨어진다.
그럼에도 나름 유용한 거 같아 데리고 가는 거다. 아니었으면 나그마가 갈 때 같이 데리고 가라 했지.
“네 말대로 정령 마법은 드물지. 마족 또한 마찬가지야. 신성 마법이 딜레이도 없고 강력하기는 하나 마족들은 계속해서 주의하고 있다고.”
그뿐일까.
“마기와 반대되는 힘인 만큼 마족들은 직감적으로 신성 마법이 발휘된다는 걸 알아차려. 아까도 그렇더군. 즉발이나 마찬가지인 신성 마법의 장점이 사라지는 거다.”
3군단장의 영혼 파편을 견제하기 위해 샤일과 나그마 모두 마법을 날렸었다.
강력한 것만 따지면 나그마가 우위였지만 녀석의 공세를 뚫고 도달한 마법은 샤일의 것이었다.
그저 신성 마법이 더 위험해서 신경을 쓴 걸까? 그럴 리가. 그런 이유였다면 둘이 마법을 쓰든 말든 나한테 집중했겠지.
못 막은 거다. 낯설어서. 혹은 신성 마법에 묻혀 기척이 줄어들어서. 정령 마법 특유의 은밀함도 한몫했을 거고.
‘적어도 마족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이 녀석이 좀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
일종의 변수다. 정공법으로 가려면 신성 마법이 맞겠지만 이미 나라는 신성력을 지닌 각성자가 있다. 굳이 한쪽에 힘을 몰리게 할 필요는 없지.
내 진심이 통한 걸까.
“흠, 잘 알고 있군. 그래. 내가 도움이 많이 되지.”
녀석도 흡족해한다.
물론 지금까지의 이유는 전체 이유의 2할 정도이고.
‘이 녀석을 그냥 보내면 나중에 무너진 마탑이랑 연락하기가 쉽지가 않아.’
이게 남은 8할의 이유였으나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자고로 가끔은 진실을 감출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 * *
혼령탑.
한때는 영웅을 비롯해 수많은 이들이 묻혔던 장소.
신분으로 나뉜 곳인 만큼 왕족과 귀족, 이름 있는 집안의 사람들은 개인 소유, 혹은 국가에서 지정한 묘지에 안치했으나 그 외에 사람들은 아니었다.
간혹 고향이 그리워서. 약자들의 편에서 서서 싸우다 죽은 이들은 이곳으로. 장례를 치를 수 없어 교단의 도움을 받아 장을 치른 이들 또한 이곳에 모였다.
어떻게 보면 모두의 묘지라고 볼 수도 있는 곳이었지만 그것도 옛말. 마계와의 문이 열리고 세상이 바뀌며 이곳 또한 모습이 바뀌었으니…….
“살벌하네.”
“혼령탑은 마계가 열리기 전에도 음한 에너지가 고이는 곳으로 유명했지.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묘역 내로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민둥산 여러 개가 모여 생긴 공간에는 아무렇게나 방치된 묘비가 굴러다녔으며, 이름 모를 짐승의 뼈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오래전부터 쓰여 온 곳이다. 누군가의 관리 아래 계획적으로 묘비를 구성한 게 아닌 마구잡이로 들어선 묘비들은 기이하게 꺾여 있었고, 인적이 끊긴 곳은 심령 스팟이라 해도 믿을 수준이었다.
아, 진짜 스팟이기는 하다.
“기이이이익!”
형태가 불명확한 고스트 계열의 몬스터가 달려든다. 혼령탑에 들어선 후 몇 번째 마주치는지 알 수 없는 놈들.
“가라, 망구!”
“끼아아아아악!”
내 명령에 데몬 스피어를 든 망령이 앞으로 내달려 적을 꿰뚫었다.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라지는 고스트. 좋은 곳으로 갔길 빈다.
그 모습을 본 샤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살핀다.
“교단 소속은 아니어도 신성 마법사라고 생각했는데 사령술이라니, 설마 흑마법사는 아니겠지? 아니지. 그랬다면 신성력이 있는 게 말이 안 돼. 도대체 정체가 뭐야?”
“평범한 사람이지 뭐.”
“평범이라는 단어를 잘못 배운 거 아닌가. 장비부터가 정상이 아닌데.”
일일이 잡기도 귀찮은 잡몹들이라 망구를 불러내 치우게 한 건데 녀석 입장에서는 적잖은 충격이었던 모양.
그러거나 말거나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건 인정했다. 적어도 쓸데없는 곳에서 체력을 쓰지는 않았으니까.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다면.
‘지나치게 조용해.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놈들이 잠잠하다는 것.
아직 핵심 지역에 도달하지 않아서 그런 건가. 아니면 용사 무리에 집중하고 있어 이쪽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고개를 들어 안개 너머로 보이는 탑을 바라봤다.
이곳이 혼령탑이라 불리는 이유는 저거 때문이다. 묘비조차 가지지 못한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납골당.
들려오는 소식이지만 단순히 못 가진 자들만 저곳에 들어가는 건 아니라고 한다.
교단이나 혹은 성인이라 불리는 자들 중에도 종종 자신을 낮추기 위해, 약자와 함께하기 위해 저곳에 뼛가루를 놔두길 바라는 이도 있다고.
물론 지금은 못 하지만.
웃기는 이야기다. 그런 곳이 지금에 와서는 악마의 소굴이 되었으니.
“멈춰.”
그곳을 향해 움직이는 그때, 난 미약한 인기척에 손을 들었다.
샤일 또한 수신호를 보자마자 멈춰 서 정령 마법을 일으킨다. 난 소음이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야, 이거 바로 알아보는군요. 반갑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용병?
처음 느낀 감상은 그러했다. 장비를 착용하고 있기는 했으나 실전에서 구른 티가 났으니까.
여기저기 그어진 검상. 조금은 찌그러진 방패.
특징이 있다면 무리를 지은 멤버들의 종족이 다양하다는 것?
우두머리로 보이는 인간 뒤로 튼튼해 보이는 수인과 엘프 궁수.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사와 성직자로 보이는 교단 사람이 있었다.
샤일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알아볼 수 있었다. 끽해야 나그마랑 비슷하거나 비슷한 수준. 달고 있는 교단 상징도 붉은색이다.
그거지 아마? 청금과 함께 3, 4티어로 분류되는 홍금 마법 사단.
힐러인가, 모르겠다. 일단 홍금은 신성 마법 군단 소속이라는데. 프리스트는 따로 있고.
중요한 건 아니다. 생각해야 할 건 이 녀석들이 왜 여기 있냐니까.
“그쪽도 사악한 마족과 흑마법사를 처단하기 위해 온 영웅이겠죠.”
“영웅은 모르겠고 목적은 맞지.”
“하하하! 겸손하시기는. 저 또한 그렇습니다. 아니, 저와 제 동료들 모두 그러하죠. 가엔이라고 합니다.”
검을 쥐고 있는 녀석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혼란을 잠재울 용사이죠.”
용사?
난 내밀던 손을 멈췄다.
이 녀석이?
찬찬히 녀석과 동료라는 녀석들을 살폈고.
“조졌군.”
작게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