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499화 (498/740)

499화 샤일

혼령탑으로 가는 길. 나야 이곳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곳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유명한 장소인 거 같았다.

“그곳으로 가려는 건가. 흐음,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모르겠군.”

“굳이 죽으러 간다면 말리지는 않지. 묘지는 많으니 골라잡으면 될 거야.”

“히익! 저주받은 자인가! 저리 꺼져!”

어째 마주치는 사람마다 반응이 별로다. 지도를 보고 따라가고는 있지만 몬스터로 인해 지형이 바뀐 곳도 있고, 애초에 측량법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 부족한 부분이 있다.

어쩔 수 없이 가는 길에 마주친 행인들에게 길을 물어보고는 있지만.

“쉽지 않네.”

“그에에.”

다들 기겁하거나 조롱을 하며 거리를 벌릴 뿐 쓸 만한 이야기는 해 주지 않았다.

현재 내가 있는 곳은 규모가 좀 되는 도시. 엄청 크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있을 건 다 있다.

인적이 드문 골목 벽에 몸을 기댄 채 지도를 펼쳤다.

‘이쪽 영지를 기준으로 마족한테 먹혔다는 아사칸 공국이 북쪽에 있군, 혼령탑이 있다는 곳 바로 옆이네.’

그래서 먹힌 건가? 정황상 혼령탑은 마족이나 흑마법사가 모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근처에 있는 공국을 먹어 두면 편하겠지.

흑마법사라고는 하더라도 일단은 사람 아니던가. 기반 시설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혼령탑이 있는 곳은 과거에 거대한 공동묘지로 사용했던 곳, 흑마법사 중에는 네크로멘서도 있다고 하니 포기하기 싫은 곳일 거다.

온갖 사령들이 깃든 곳인 만큼 음에너지가 많아 마계와의 문을 열기도 수월할 거고.

다르게 말하면.

“반드시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

흑마법사 무리가 포기할 수 없는 중요 포인트라는 거다. 용사도 그걸 아니까 끈덕지게 달라붙는 걸 테고.

물론 이곳 말고도 놈들의 거점은 많겠지만 그곳들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일단은 눈에 보이는 곳부터 처리하는 게 맞았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어째 놈들이 조용하단 말이야. 나라면 이곳부터 먹고 시작할 거 같은데.”

혼령탑을 중심으로 활동하려 한다면 이곳 영지까지 먹어 두는 편이 좋다. 공국도 먹은 마당에 옆에 딱 붙어 있는 이곳을 놔둘 필요는 없으니까.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빠져나갈 경로가 늘어나고, 마족의 거점으로써의 역할도 커질 테니 조금 무리해서라도 차지할 가치가 있었다.

왕국도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이곳으로 병력이 모으고 있지만. 이곳까지 먹히면 왕국 입장에서는 타격이 크다.

‘마크달 왕국이라고 했던가.’

지금까지 내가 활동한 왕국의 이름이다. 강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뭐하지만 약소 왕국도 아닌 적당한 규모의 나라.

다만 제국과 거리가 가까워 그다지 기를 펴지는 못했는데, 멸망이 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 부분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외부의 세력이 제국으로 침입하기 전에 막을 수 있는 방파제. 제국 입장에서 마크달 왕국의 역할은 그것이었으니까.

굴욕적인 처사라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왕국 또한 제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흑마법사와 마족들도 왕국과 제국을 경계하느라 이쪽을 건들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대신 느리지만 확실하게 집어삼키려 들겠지. 이전에 있었던 마족처럼 영주에게 접근해 수작을 벌이는 식으로.

그건 그거고.

“잠시 신분증 확인 있겠습니다.”

“흐음, 배낭 내부를 좀 봐야겠군요.”

제국과 왕국에서 보낸 병력들이 행인들의 신분과 짐을 확인하고 있다.

아무래도 혼령탑과 관련돼서 보내진 병력들인 거 같은데.

‘필립이 신분패를 줘서 다행이군.’

안 그랬으면 곤란할 뻔했다. 지도를 집어넣고 골목에서 나가려는 타이밍.

“이봐, 이방인이지?”

골목 안쪽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아까부터 알짱거리는 건 알고 있었다.

기척을 감춘다고 감춘 거 같기는 한데 내 감각을 속일 정도는 아니라서.

초라한 행색. 누더기나 다를 바 없는 넝마를 둘렀고 꾀죄죄한 얼굴 위로 눈빛만 반짝인다.

“안 나가는 게 좋을 거야. 이방인은 환영받지 못하니까. 이쪽으로 오게. 내가 좋은 길을 알아.”

뒷골목 깡패라고 하기에는 미묘한 느낌.

순수한 호의로 내게 다가온 걸까? 글쎄, 내가 느끼기에도 이 세계에 이방인은 경계의 대상이다.

저 녀석에게 있어서는 나도 이방인, 생판 모르는 남이다.

밖에서 돌아다니는 이들보다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으면 있었지 남을 도울 여유가 있을 거 같지는 않다.

나야 신분패가 있으니 병사들이 검문을 해도 상관없고. 끽해야 등쳐먹을 생각에 날 부르는 건 아닌가 싶다.

깡패 놈들을 상대하는 것도 귀찮으니 그냥 무시하려던 때.

“혼령탑에 가려는 거지?”

녀석이 혼령탑을 입에 담았고 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이쪽 분위기가 안 좋은 건 다들 아는 일이지. 이때 외지에서 사람이 올 이유는 몇 개 없어. 혹시나 싶어 몰려온 용병이나 혼령탑에 볼일이 있는 자. 그래.”

녀석이 입을 비틀며 웃는다.

“정확히 말하면 새로 등장한 유령 도시 때문이겠군.”

“정체가 뭐지?”

“보다시피 흔해 빠진 부랑자일 뿐이야. 돈이 조금 필요한.”

스스로를 부랑자라고 소개한 녀석이 손끝을 비빈다.

“내가 보기에 자네는 용병이 아니야. 놈들은 특유의 거친 느낌이 있거든. 건방지고 무례하지.”

“보는 눈은 있군. 내가 좀 얌전하고 예의 바른편이라서.”

“…뭐, 그렇다 치지.”

진짠데. 나름 신사적으로 살아왔다.

어깨에 올라탄 덕춘이가 날 위아래로 훑으며 짠 표정을 지었지만 무시했다.

좋다. 수상한 녀석이기는 하지만 뭔가 아는 게 있어 보이니 잠시 어울려 줘야지.

난 앞장서라고 턱을 까딱였고 녀석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휙 돌아서 걸어갔다.

주변을 살피며 따라갔다. 도시라고는 하나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건 아닌지 건물이 마구잡이로 들어서 길이 복잡하다.

토박이가 아니면 길을 찾기 힘들 터. 특히나 이렇게 골목이어서야 누구 하나 죽어도 모르겠지.

“이름이 뭐지?”

“샤일이라고 부르면 돼, 넌?”

“이블아이라고 한다.”

가벼운 통성명을 시작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몇 가지 궁금점이 있다.

“유령 마을로 가려는 사람이 좀 있나 보지?”

“얼뜨기가 대부분이지. 용사가 도착하길 기다리며 혼령탑으로 가려는 이들이 더 많긴 하지만.”

“넌 내가 유령 도시로 갈 거라고 말했어.”

물론 혼령탑도 갈 거지만.

저번 마을에서 만난 용병단도 유령 마을로 가려고 하기는 했다. 대단히 비밀스럽게 움직이듯이 하더니만 다 아는 그런 거였나.

하기야 그놈들도 소문으로 들었다고 했으니.

샤일이 날 슬쩍 바라본다.

“말했잖아. 넌 용병처럼은 안 보인다고. 용병 아닌 외부인이 갈 곳은 그 정도뿐이야.”

“아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내가 궁금한 건.”

성큼 놈에게 다가갔다.

“어째서 내가 용병이 아닐 거라 확신했냐는 거야.”

“…그냥 떠본 거다. 용병이었으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그게 더 이상한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용병은 무례하니 어쩌니. 내가 진짜 용병이었다면 기분 나쁘지 않았을까?

성격 더러운 용병이면 그 말을 하자마자 주먹이 나갔을 텐데.

여러 가능성이 있기야 하겠다만 확실한 건.

-콰앙!

난 놈의 머리를 잡아 벽에 밀어붙였다.

비명과 함께 내 팔을 붙잡았지만 힘으로 날 밀어낼 수는 없다.

“나에 대해 알고 있지?”

그게 아니면 설명이 되질 않는다.

용병이 아닌 걸 알고 있으며, 내가 유령 마을로 갈 거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는 자.

누구지? 짐작 가는 사람이 없다. 그야 내가 이곳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연락 수단이 마땅치 않은 세계다. 그로핀 용병단이 소문을 퍼트렸다고 하더라도 벌써 이곳까지 정보가 퍼졌을 리가 없다는 거다.

‘어떻게 정보가 퍼졌다 하더라도 말이 안 되지.’

이야기는 그렇다 쳐도 정확히 날 알아보는 건 별개니까. 인상착의로 알아본다?

펠라인 세트를 입었다면 그럴 수 있다. 무지개색 갑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옷? 그것도 이곳으로 이동하며 갈아 입은 지 오래다. 그 말인즉 얼굴을 보고 알아차렸다는 건데.

“마족이냐, 아니면 흑마법사?”

대답을 들으려는 건 아니다. 그저 놈이 어떻게 나오나 보려는 거지.

질문을 던지며 곧장 권능을 사용했고.

[샤일]

-중립 NPC.

-무너진 마탑 소속입니다.

“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어쩐지 부랑자 치고는 눈빛이 살아 있다 했더니 무너진 마탑 소속 마법사였나?

생각해 보면 나한테 접근할 때도 인기척을 지우는 마법을 쓰고 있던 것도 같고. 평범한 사람이 할 수준은 아니었다.

몸도 허약해 보이는데 어떻게 혼자 골목을 돌아다니나 했네.

“자, 잠깐! 말을 좀!”

-꾸드드득

물론 정체를 알아차렸다고 해서 경계 대상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다.

무너진 마탑이 마족들을 적대시한다는 건 안다. 그거야 좋은 일인데 그거랑 내 뒤를 캐는 거랑 무슨 상관인가.

놈의 머리통을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뭔가 마법을 쓰려는 것 같았지만 마나를 뿜어내어 방해했다.

저번, 바이사와 마족의 싸움을 보며 배운 것. 보니까 마족이 쓰던 검이 마나를 끊고 헤집더라고.

“지금부터 대답 잘해야 할 거야. 허튼짓하면 뒤통수가 시원해질 거거든.”

진심이다. 당장은 내가 제압하고 있지만 이쪽 세계의 마법사는 스킬을 쓰는 게 아니다. 언제 어떤 수로 상황을 뒤집을지 알 수 없다는 뜻.

안일하게 대처했다가 당하느니 과하더라도 확실히 손을 쓰는 게 나았다.

나의 확고한 의지가 느껴진 걸까, 샤일이 마법을 사용하려던 시도를 포기하고 양손을 들어 올렸다.

“나, 난 무너진 마탑에서 보내서 온 거야.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그걸 어떻게 믿지?”

권능을 통해 녀석이 무너진 마탑 출신인 건 알고 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사람은 궁지에 몰렸을 때, 본인의 결백을 증명해야 할 때 더 솔직해지기 마련이니까.

이유야 뭐가 됐든 내게 정체를 숨긴 것은 변하지 않는다.

“바이사 님 알지? 그분이 접근하라고 시켰어.”

미간을 좁혔다. 바이사라, 그럼 이해가 된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나와 함께 싸운 사이 아니던가. 자세한 건 몰라도 어느 정도 서열이 높은 편인 것도 같았고.

내 이름과 얼굴도 직접 봤으니 보다 명확한 인상착의를 아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다만 어째서 그 사람이 내게 사람을 보냈는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인데.

‘흑마법사 때문인가?’

무너진 마탑은 흑마법사와 마족을 증오하니까 명분 자체는 있다.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말이야.

“내 목적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말해.”

이 부분이 걸린다. 내 목적지는 그로핀 용병단을 잡으면서 정한 거니까.

아무리 바이사라 하더라도 이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돌고 돌아 다시 도착하는 의문.

무너진 마탑이고 나발이고 이 부분을 명확히 말하지 않으면 난 그들을 신뢰할 수 없다.

난 샤일의 답변을 기다렸고.

“그야 네가 용사니까! 당연히 혼령탑으로 향하겠지! 바이사 님이 계신 영지에서는 이곳이 가장 가깝고 갑자기 생겨난 유령 마을에 들르는 건 당연하잖아!”

“어?”

순간 뇌정지가 와서 이상한 소리를 냈다.

놈은 사실을 들켜 놀랐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를 높여 말을 이어 나갔지만.

“소문으로 퍼진 용사는 가짜란 걸 우린 이미 파악했지. 녀석들은 선발대잖아? 혼령탑으로 먼저 보내려고 하는. 그 말은 곧 진짜 용사인 넌 혼령탑보다 유령 마을을 더 중요시 여긴다는 거지. 훌륭한 눈속임이었어.”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뭔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거 같은데, 내가 그 사실을 짚어 주기도 전에 샤일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내 쪽을 바라봤다.

“흐, 놀랐나? 당황하지 마. 우린 그저 마족을 없애고 싶은 거뿐이니까. 어때? 이제 좀 이야기할 생각이 드나?”

자신감에 찬 눈빛을 보며 난 얼굴을 쓸어내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