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화 쫓는 자, 쫓는 자, 쫓는 자
난 분명히 기회를 줬다. 1초 안에 답을 하면 통과하는 걸로.
그리 어려운 질문을 던진 것도 아니다. 용사에 대한 소문을 아는가, 혹은 마족이나 흑마법사에 대해 들은 게 있느냐는 질문들.
하다못해 ‘예, 아니오’로만 답해도 봐주려고 했는데.
“으으으으.”
“내 다리, 다리가!”
멀쩡히 서 있는 용병은 기껏해야 2명이 전부였다.
사색이 된 채 바닥을 기어 다니는 동료들을 바라보던 이들이 어물쩍 뒷걸음질 친다.
카운터에 몸을 피하고 있던 종업원과 여관 주인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긴장하는 중.
“소란을 피워서 미안합니다.”
“아, 아닐세.”
사과를 하자 여관 주인이 손을 내젓는다.
괜찮다면 다행이고.
끼긱. 의자를 끌어 앉았다. 서 있는 용병 둘한테 손짓하자 눈치를 보던 이들이 무릎을 꿇고 앞에 앉는다.
뭘 또 꿇을 필요까지 있나 싶지만 본인들이 그게 편하다면 존중해 줘야지.
“아는 거 다 말해 봐.”
“알겠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연다.
악명이라고는 하지만 근방에서는 꽤 이름을 알린 용병단이다. 몰랐지만 용병단장이라는 녀석은 익스퍼트 초급에 오른 실력자라고도 하고.
나야 별 관심 없지만. 여튼 나름 영향력이 있는 놈들인 만큼 잡다한 소식을 자주 접했고 그중에는 내가 궁금한 것들도 있었으니.
“흐음, 용사가 중앙으로 이동 중이다라.”
“흑마법사 무리의 뒤를 쫓고 있다는 것 같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좋을 텐데 용사는 그럴 생각이 없는 거 같았다.
“이름 날린 용병들도 혹시나 떨어지는 게 있을까 몰린다는 것 같더군요.”
“떨어질 떡고물이 뭐가 있다고 그쪽으로 가.”
“아무래도 흑마법사들이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가 있지 않습니까, 헤헤. 망가진 거라도 몇 개 주워서 팔면 이득입니다.”
말 그대로 부스러기라도 먹으려고 근처에 어슬렁거린다는 것.
용사라고 불리는 인물은 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 수습을 하면서 이득을 취하는 것도 딱히 없고 원한이라도 진 것처럼 흑마법사들을 쫓아가고 있다고.
용병이나 모험가들은 남겨진 물건들을 노리고 따라 붙는 중.
‘의도한 건가 아니면 안일한 건가.’
흑마법사를 노리는 거라면 소문을 만들지 않고 조용히 움직이는 게 맞았다.
이곳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라면 흑마법사 또한 소식을 들었을 테니까. 용사를 피해 도망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공격을 가할 수도 있었다.
그리 현명한 판단은 아닌 거 같았으나 의도가 섞여 있다면 말이 달랐다.
‘일부러 본인의 위치를 드러내 놈들을 끌어들이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본인이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곳으로 용병들을 불러 모으는 것일 수도 있겠군.’
흑마법사와 전투를 치른 곳은 혼란할 테니 누구든 수습을 해야 했다.
막대한 인력이 필요하다는 말. 그런 의미에서 용병들과 모험가들이 몰리면 잔당을 처리하는 건 편하겠지.
좋은 효과만 있지는 않겠지만. 반대로 그들 때문에 분위기가 뒤숭숭해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거야 내가 어떻게 할 게 아니니 넘어가고.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이동 방향으로 봐서는 혼령탑으로 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혼령탑?”
“예. 던전화된 곳인데 언데드도 득실거리고 온갖 괴상한 소문이 무성한 곳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벌어지는 곳이지요.”
“지도 내놔.”
“안 그래도 드리려 했습니다요.”
용병이라는 게 돈에 따라서는 타 지역에 가서 일할 때도 많은지라 지도를 비롯해 각 지방에서 유용하게 쓰일 만한 물건들을 가지고 다닌다.
이곳까지 오면서 지도가 없어 불편했던 만큼 이번에는 지도를 따라 움직일 생각.
“마족 하니까 하는 말입니다만 최근 아사칸 공국이 마족의 손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곳에 있던 친구한테 들었으니 틀림없을 겁니다.”
“공국 말고도 비공식적으로 마족의 영역이 된 곳이 몇 있습죠.”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넘어간 곳이 있다는 건가.
하긴 내가 지나온 남작령도 조금만 늦었으면 마족의 손에 들어갔을 테니 할 말이 없다.
“교단에서도 대대적인 토벌 명령을 내린다는 것 같습니다.”
“교단의 3성 중 한 명이 최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니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하는 것 아닌가 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교단의 3성은 또 뭐야.
난 놈들에게 계속 이야기하라며 턱을 까딱였고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곳 세계에서 교단은 하나. 교단을 수호하는 강력한 성직자들을 일컬어 교단의 3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각각 팔라딘, 프리스트, 신성 마법사 군단을 이끌고 있다나.
‘그러고 보니 나도 신성 마법사라고 거짓말을 했었는데.’
어째 여기에 오고 나서는 거짓말만 는 거 같다. 마법사라고 뻥 치고 신성 마법사 사칭하고.
아닌가, 어찌 됐든 마법형 스킬도 쓰고 신성도 쓰니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암, 그렇고말고.
놈들이 넘긴 지도를 살폈다. 이 시대에 지도는 비싼 물건. 지도 자체가 귀한 것도 있지만 지도를 사용하는 이들이 남겨 놓은 정보와 기록이 있어 더 가치가 높다.
그만큼 보안을 위해 암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 또한 그러했으나
.
[통역(A) Lv.10]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내게는 소용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표기해 둔 비밀 통로나 암시장의 위치, 불법 치료사의 은거지 등등 쓸 만한 정보가 제법 있다. 이건 내가 잘 쓰도록 하고.
“여긴 뭐지?”
“그건…….”
난 아무런 설명도 없이 X로 적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용병 한 명이 눈동자를 굴리길래 바로 머리통을 때렸다. 코피를 줄줄 흘리며 엎어지는 녀석.
“탈락. 분명 말했을 텐데. 1초라고.”
“보, 보물입니다!”
보물이라. 안 그래도 궁금했다. 이 녀석들이 왜 여기까지 와서 난리인지. 권능으로 살펴본 용병단장은 자칭 트레져 헌터. 보물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어떤 보물?”
“그건 잘 모릅니다. 진짭니다!”
스윽, 주먹을 들어 올리자 홀로 남은 용병이 발작하듯 손사래를 친다.
혹시나 용병단장이나 다른 동료들이 깨어 있지는 않을까 눈치를 살피던 녀석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소문의 출처는 알 수 없지만 혼령탑으로 가는 초입부에 유령 마을이 하나 생겼다고 합니다.”
“유령 마을이 뭐가 어때서.”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마주친 유령 마을만 2개다. 멸망이 가속되고 인류의 영역이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현상이다.
“기존에 있던 마을이 비어 버린 게 아닙니다. 뚝 하고 갑자기 생겨난 것이죠. 누가 미쳤다고 혼령탑 근처에 마을을 만듭니까.”
이건 좀 다르네. 기존에 있던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거니까.
“저희는 그게 유적이 아닐까 해서 찾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유령 마을이 실제 한다는 것을 확인했거든요.”
“마족이 침공하면서 잊힌 유적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간혹 있습니다. 어쩔 때는 마계에 있어야 할 유적이 이곳으로 넘어오기도 하죠. 위험하지만 도전할 만한 일입죠.”
한탕 거하게 하고 편히 살겠다는 뜻이었다.
아마 마계와 차원이 일부 연결되면서 생긴 기현상인 거 같은데.
‘어쩌면 유령 마을이 아니라 재앙일 수도 있고.’
전에도 한 명 있지 않았던가. 벌룬 파크.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무언가를 풍선으로 만들어 숨겨 두던 재앙. 그거랑 비슷한 것일 수도 있다.
툭툭, 손가락을 두들겼다.
‘한번 들러야겠군.’
어차피 용사를 만나려면 혼령탑으로 가야 한다. 엇갈리는 길도 아니니 슬쩍 봐 보기라도 해야지.
유적이면 그곳에 숨겨져 있는 뭔가를 챙기면 그만이고, 재앙이나 마족과 관련된 거면 부숴 버리면 된다.
판단을 마무리했으니.
“그래. 난 잔다. 어질러 놓은 거 잘 치우고.”
“예?”
“치우라고.”
“아, 예에.”
하품을 하며 방으로 올라갔다. 난장판이 된 여관을 본 용병의 표정이 시무룩해졌지만 별수 있나. 그러게 까불지 말았어야지.
“참, 너 혼자 치워라. 잔머리 굴리다 걸리면 죽어.”
혹시나 여관 주인이나 종업원에게 피해 끼칠까 싶어 한마디 보태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이틀이 지난 후 난 여관에서 나왔다. 원했던 정보도 얻었겠다 하루만 쉬고 가려고도 했지만 내게 당한 용병단이 마을 사람들한테 화풀이를 할지도 몰라 좀 더 지켜봤다.
다행이랄까 나한테 털린 놈들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아픈 몸을 이끌고 놈들의 거점으로 돌아갔지만.
지도도 나한테 뺏겼겠다, 괜히 유령 마을로 갔다가 나와 경쟁을 하느니 깔끔히 포기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내가 두들겨 준 곳이 아파서 컨디션이 안 좋은 걸지도 모르고.
방값은 3일로 치렀지만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 느긋한 걸음으로 마을 밖으로 향했다. 여관 주인과 종업원이 편의를 봐줘 불편함 없이 지내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이보게.”
그런 내게 말을 거는 이가 있었으니 처음 마을로 왔을 때 봤던 보초였다.
“그로핀 놈들을 혼내 줬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고맙다는 말을 못 했군.”
“별일은 아니었어요.”
“아니. 놈들이 마을에 들어오고 얻어터진 마을 사람들만 여럿이오. 대놓고 칼 들고 협박질을 하기도 했지.”
주먹을 움켜쥔 남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세 명까지는 상대할 수 있지만 전체를 상대하는 건 힘들어 보고만 있었는데 내 속이 다 풀리는군. 개 같은 자식들!”
아무래도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그냥 질 나쁜 용병인 줄로만 알았는데 쓰레기였네. 이럴 줄 알았으면 몇 군데 더 부러트려 주는 건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자 그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가져가쇼. 이쪽 지방 사람도 아닌 거 같은데 여기 같은 조그만 마을이면 모를까 영지 근처로 가면 외부인은 못 지나가지. 그거면 신분을 증명할 수 있을 거요.”
“이건?”
“내가 사용하던 용병패요. 유효 기간이 남아 있으니 1년 정도는 쓸 수 있소.”
단순히 용병패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일이 꼬인다면 본인도 난처해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내게 넘긴다는 거였으니까. 용병패에 적힌 그의 이름을 살폈다.
“잘 쓰죠, 필립”
“별말을. 아, 이름이 어떻게 되오?”
“이블아이라고 합니다.”
“이블아이라,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빌겠소.”
* * *
이블아이가 떠난 마을. 그로핀이 돌아가고 그들을 피해 몸을 사렸던 마을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날카로웠던 분위기가 풀리며 평온함을 되찾은 이들이 그동안 돌아다니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길거리를 배회했다.
문을 걸어 잠갔던 가게가 열리고, 무장을 풀고 가벼운 복장을 한 사람들이 그로핀 용병단을 욕하며 시간을 보냈다.
여관 주인이 기분이라며 술을 내오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음식을 꺼내 가져온다. 오래지 않아 자그마한 잔치가 벌어지는 건 금방이었고, 해가 떨어진 시간 오랜만에 횃불이 켜지며 어둠을 밝혔다.
한적하지만 여유로운 시간.
-따각, 따각
말을 탄 누군가가 마을에 들어섰다.
기둥에 몸을 기댄 채 보초를 서고 있던 필립이 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후우, 요즘 외부인이 많이 오는군.”
평소에는 많아야 한두 달에 한 번 생필품을 쌓은 상인들이나 들르고는 했는데.
작게 한숨을 내쉰 필립이 외부인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잠시 멈추시오.”
“무지개 갑옷을 입은 자를 아는가?”
“무지개? 뭔 개소리를…….”
-촤악!
말을 탄 괴인이 예고 없이 날린 일격에 가슴이 갈라진 필립이 허물어졌다.
덤덤한 표정으로 손에 묻은 피를 털어 낸 괴한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내 동생을 죽인 자가 이쪽으로 갔을 터인데. 흐음, 이상한 일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