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화 용사?
나의 명령에 망령이 똥 씹은 표정을 한다.
망령도 눈으로 욕할 수가 있구나. 몰랐던 사실이다.
데르카 또한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잠시 멍청히 서 있다가 노성을 터트렸다.
“빌어먹을 인간이 나를 농락해!”
“아 씨, 귀청이야.”
급분노하는 걸 보니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 마족이란 놈들은 대체적으로 감정선이 오락가락하는 게 아닐까.
그러거나 말거나.
“나도 이런 기회에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그래야지.”
어느덧 80층대 마지막 시나리오. 90층대에 진입하면 혼돈의 파편과 싸워야 할 것이 뻔한데 그냥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혼돈의 힘을 이용해 스킬의 등급을 강제적으로 올리는 방법을 알아내기는 했지만 그걸로 만족할 수는 없다.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지금까지 해 본 적 없던 도전을 해야 했으니까.
지금도 그런 의도로 하는 거고. 내가 나서면 더 빨리 끝날지 모르겠지만 그래서야 지금까지 하던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스킬 등급이 올라가면서 패턴이 단조로워진 느낌이 있어.’
과거에 스킬이 애매할 때는 물뿌리면서 전기 쏘고, 땅 파서 발 묶고, 온갖 난리를 다 쳤었는데. 파이어 밤도 그때는 자폭용이었다.
물론 메인은 그대로 가야겠지만 변수를 만들 만한 뭔가가 있으면 좋지.
속으로 뿌듯해하며 망령의 어깨를 두들겼다.
“응원의 의미로 너에게 이름을 하사하마. 어디 보자. 그래. 망령이니까 넌 오늘부터 망구다. 가라!”
“끼아아…….”
망구도 기분이 좋은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간다. 맨손으로 싸우게 하기 뭐해 데몬 스피어까지 쥐여 줬으니 잘하겠지.
어찌 됐든 본인도 그렇지만 창도 S급 아닌가. 레벨도 MAX는 아니지만 최대치 근접하게 찍었고.
“기어코 나를 능멸하려 드는구나!”
나의 순수한 의도를 무시한 데르카 또한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발을 박찼다.
덩치가 있어서 그런지 전차가 돌진하는 거 같다. 그에 반해 우리의 망구는 호리호리한 편이고. 기본적으로 망령이라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고 얕잡아 볼 수는 없는 것이.
-사르르르
영체 기반이기에 육체적인 발놀림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 게다가 일반적인 물리 공격은 거의 통하지 않는다.
그림자처럼 곡도를 피해 낸 망구가 창을 내지른다. 노리는 건 곡도를 쥐고 있는 손.
나쁘지 않은 판단이다. 아무리 기동성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리치 싸움에서 지고 들어가니까.
전투에 있어 상대방의 무기를 떨구기만 해도 무장해제나 다를 바 없다.
“흥!”
-후웅!
하지만 놈 또한 호락호락하지는 않아서 뒤로 물러서며 크게 곡도를 휘둘러 망구를 떨쳐 냈다.
어쩐지 할 만하다 싶었는지 망구가 기세를 올린다.
“끼아아아아악!”
그동안 서러움이라도 쌓여 있던 건지 더덕이가 떠오르는 비명을 지르며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으니.
“제법인데.”
“그에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숙련된 창술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디서 따로 배우지는 않았을 테니 본인 실력인가.
망령이 되기 전에 어떤 존재였을지 가늠이 안 된다.
나 또한 검을 주로 사용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알리오스의 권능 덕에 검술 관련 보정치가 붙어서 그런 거고, 탑에 올라오기 전에는 잡다한 무기를 익히려고 애썼다.
언젠가는 탑에 올라갈 것이고 어떤 무기를 쓰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였으니까.
그중에는 창도 있었으니.
“나보다 훨씬 잘하는 거 같은데?”
창에 대해서는 식견이 좁은 내가 봤을 때도 수준급이다.
처음에는 무시했던 데르카마저 전투에 집중해 곡도를 휘둘러 댔으니 말 다 했지.
그렇다고 완전히 압도하는 건 아니라서 약간의 도움을 주기로 했다.
[심연의 눈동자(S) Lv.10+]
-쩌적!
허공이 갈라지며 등장한 눈동자와 데르카의 시선이 맞닿자 녀석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S급에 이르는 정신 공격. 내가 면역에 가까워서 그렇지 다른 이들에게는 굉장히 위협적인 공격이다.
내성 스킬이 있더라도 이런 류의 공격은 본인의 정신력에 크게 좌지우지 되니까.
모든 마족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 녀석은 차분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크하아아아!”
기어코 다리에 창이 꽂힌 녀석이 괴성을 질렀다. 그럼에도 기세는 죽지 않았으니 되려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적극적인 공세를 해 댔다.
“끼하아아악!”
망구도 이에 질세라 창을 어지럽게 휘두르며 찔러 댔으니 팝콘이 절실했다.
‘역시 고만고만한 애들이 싸우는 게 제일 재밌지.’
머리 터지게 싸우는 둘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생각은 이렇게 하지만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둘의 전투를 지켜봤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마족이 가지고 있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
자신감 넘치게 1군단장의 만인장이라고 했으니 낮은 계급은 아닐 거다. 그런 의미에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자면…….
“연옥계에서 마주친 애들보다 좀 더 강하네.”
연옥계 시나리오 첫 번째 챕터를 말하는 게 아니다. 마지막 챕터를 기준으로 하는 말이지. 뭐랄까, 강한 건 맞지만 상대하기 힘든 정도는 아닌?
전투력으로 따지면 에이션트 몬스터보다 못했고, 까다롭기로 따지면 재앙보다 별로다.
애매한 위치기는 하지만 일반인이나 어중간한 등반가에게는 위협적인 존재.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은…….
‘군단장이라고 불리는 놈들이 몇 명이나 될지 모르겠단 말이지.’
막말로 한 군단장만 10명쯤 되고, 군단장마다 만인장이 10명씩만 있어도 저런 놈들이 100명은 있다는 거다.
그런 놈들이 떼를 지어 몰려온다면?
‘100명은 좀 많네.’
나라도 일단은 도주한 뒤 각개격파할 거다. 정면으로 승부했을 때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까.
괜히 모험했다가 잘못되면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 한다. 잘못된다는 건 죽음을 의미하니.
조금은 느긋하게 둘의 전투를 지켜보았고.
“끼아아아아아!”
접전 끝에 놈을 쓰러트린 망구가 승리의 비명을 지르며 창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이대로 목을 꿰뚫으면 끝나겠지만.
“오케이, 잘했어.”
“끼아? 끼아아!”
난 스킬을 종료해 망구를 도로 집어넣었다.
망구가 사라지기 전에 내게 욕을 한 것 같은 건 착각이겠지.
“빌어, 먹을.”
“너무 열 내지 마. 잠깐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만신창이가 되어 뻗어있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흑마법사는 어디에 있지? 널 소환한 놈이 있을 텐데.”
“모른다.”
“거짓말하지 말고.”
-콰직
“크하아악!”
녀석의 팔목을 밟아 부쉈다. 마족을 상대로 예의 차릴 건 없다. 애초에 날 죽이겠다고 덤빈 녀석이고.
동시에 권능을 발휘했으니.
[데르카]
-제5 마계의 악마. 마족입니다!
-마계의 1군단장, 바머의 만인장 중 하나.
-시스템에 의해 임시 배치된 완전한 NPC입니다.
놈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임시 배치된 NPC라. 중립 NPC랑은 다른 모양. 그렇긴 하겠지. 완전히 탑에 종속된 녀석이니.
본인이 NPC인지도 모를 거다. 말 그대로 시스템에 의해 사용되는 장기말.
‘별로 쓸모는 없겠군.’
하긴 이럴 거 같기는 했다. 진짜 80층대에서 살아가는 NPC라면 내가 등반가인 걸 알아차리고 협력을 하든 공격을 하든 했을 테니까.
물론 후자는 숭배자일 때의 이야기지만. 놈은 숭배자도 아니었으니 시나리오의 배경이 되는 세계의 흐름에 따라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데.
“왜 몰라? 너 제5 마계에서 넘어온 녀석이잖아. 이쪽으로 온 방법이 있을 거 아니야.”
“마계의 문이 열렸다! 그곳으로 왔을 뿐이야. 정식 소환 의식을 통해 넘어오는 건 부군단장 이상의 마족이다!”
손목을 으깬 채 비비자 말이 바로 나온다.
흐음. 아무래도 이 녀석 수준은 흑마법사가 열어 놓은 균열을 통해 넘어오는 모양. 몬스터로 치자면 게이트를 통해 진입하는 거랑 비슷했다.
부군단장이라고 불리는 강한 놈들은 다른 방법을 통해 넘어오는 거 같고.
정령계에서 겪었던 계약의 문과 비슷한 원리겠지. 강력한 존재를 경계하는 세계의 의지가 반영된 것일지도 몰랐고, 넘어오는 데 페널티가 있어 소환 의식을 필요로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건 대충 알겠는데.
“그냥 넘어온 건 아니잖아. 보아 하니 이곳 영주를 재끼고 영지를 먹으려던 거 아니었나?”
바이사가 말한 게 있다. 영주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고 이상한 행동을 보인 시기와 놈이 이곳을 찾아온 시기가 겹친다고.
마족이 있다는 소문이 퍼진 것도 그 이후고. 쉬쉬하지만 납치라던가 온갖 일이 벌어진 것도 그때쯤이라고 했다.
아무런 의도 없이 그런 행동을 했을까? 본인 입으로 만인장이니 뭐니 떠드는 녀석이?
분명 뒤에서 명령을 내린 존재가 있다. 그게 흑마법사인지 놈이 따른다는 1군단장인지는 알아봐야겠지만.
“말할 수 없다.”
“뭐래, 지금까지 잘만 말해 놓고.”
“으아아아아악!”
반대편 팔도 같이 밟아 주자 놈이 몸을 비틀었으나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중력 팔찌(C)]
아티팩트로 무게를 한껏 늘려 놓은 상태라 무게를 이기지 못한 땅이 움푹 파일 지경이었으니.
이를 악물며 버티는 녀석.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답할 수 없다는 건가.
오히려 그런 행동이 답이 됐다. 앞서 흑마법사에 대한 건 쉽게 답한 데에 비해 이번 질문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1군단장이니 뭐니 하는 녀석이 시킨 거겠지.
‘아무래도 흑마법사와 마족들은 완전한 협력 관계는 아닌 거 같아.’
적당히 서로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함께 하는 느낌? 모든 마족이 그렇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보다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는 마족은 생각이 다를 수도 있고.
그럼 마지막 질문.
“다른 마족의 위치는?”
“모른다! 네놈에게 내가 모든 걸 말할 줄 알았는가!”
-구오오오오오!
놈의 외침과 함께 몸이 팽창했다.
거칠게 터져 나오는 마기!
“자폭은 좀 아니지!”
[펠라인 세트를 착용합니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난 곧장 펠라인 세트를 둘렀고.
-콰아아아아앙!
마기가 폭주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강렬한 충격에 쌓아뒀던 벽이 종잇장처럼 무너지고.
후두둑.
파편과 함께 드러난 공간에는 바이사와 함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기사와 병사들이 있었다.
시선이 내게 쏠린다.
“자네, 그 모습은.”
“아, 이거요? 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이사의 물음을 어물쩍 넘어갔다.
서둘러 망토로 몸을 가렸다.
아, 망토도 초록색이구나. 나도 모르게 입술을 씹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나를 막아섰던 기사와 병사들이 뒤로 물러나며 길을 터 준다.
“뒷일은 부탁합니다.”
타앗!
반쯤은 도망치듯 앞으로 영주성을 빠져나왔다.
“이보게!”
뒤에서 바이사가 나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원하던 바는 이루었다. 이쪽 세계에 대해 대략적인 배경도 들었고, 흑마법사니 무너진 마탑이니 하는 것도 알게 됐으니까.
마족에 대해 좀 더 파고들지 못한 건 좀 아쉽지만 멸망이 진행되고 있는 세계인 만큼 마족은 계속 만나게 되겠지.
어차피 내가 향하는 곳은 용사가 있다는 서쪽.
“에이 씨. 이번에는 눈에 좀 덜 띄려고 했는데.”
난 작게 혀를 차며 발을 박찼다.
* * *
조현수가 떠난 자리, 바이사를 비롯한 영지의 기사와 병사들이 넋을 놓고 그가 떠난 곳을 바라봤다.
“설마 진짜 마족이었을 줄이야.”
“마족이라는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거짓인 줄 알았거늘.”
흔적밖에 남지 않은 데르카의 시신을 살핀 기사들이 미간을 찌푸렸고.
“이만한 공적을 남기고 홀연히 떠날 줄이야.”
“옷차림 또한 범상치 않았지. 혹시 소문의 그 용사가 아닐까.”
“과연 그럴듯하군!”
병사들은 저마다 자신의 감상을 털어놓았다. 바이사 역시 마찬가지.
‘처음에는 신성 마법사인 줄 알았는데 결코 교단 출신이 아니로구나.’
교단 소속의 팔라딘이라면 모를까 신성 마법사는 갑옷을 입고 검을 휘두르지는 않으니까. 무엇보다 옷차림 어디에도 교단 소속의 문양이 보이지 않았다.
암행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바이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남들 몰래 교단의 임무를 하는 자가 저렇게 튀는 갑옷을 입고 있을 리가 없으니.
‘어쩌면 진짜 용사일지도 모르겠군. 마탑에 알려야겠어.’
결정을 내린 바이사가 손을 휘둘렀다.
“마족이 잡혔다. 시신을 수습하고 가장 발 빠른 자를 교단으로 보내라! 난 영주님을 뵙겠다!”
“네!”
바이사가 빠르게 움직였다.